129화
노인의 나이를 보았을 때, 고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손바닥에 공력을 높여 노인의 가슴을 가격하려던 금월대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노인이 반격은 고사하고, 방어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금월대사는 급히 손의 방향을 틀며 공력을 회수했지만, 노인은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그리고, 피 흘리는 입으로 말했다.
“제발… 제발 손자만은 살려주십시오. 부모도 없는 불쌍한 녀석입니다…….”
“…….”
금월대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마을로 들어와서 자신이 죽인 이들 중 제대로 공격을 막은 이가 하나도 없었다.
살육만을 위해 키워진 악마라면 살육에 최적화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공격력이 있건, 방어력이 좋든… 사람을 죽일만한 뭔가가.
금월대사는 몸을 돌려 싸리문 너머의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도륙하는 상관량과 마교도들, 그리고 수일검과 태청검을 쳐다보았다.
“허억…….”
금월대사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터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마을 사람 누구 하나 제대로 대적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무공을 쓸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다시 노인에게 몸을 돌린 금월대사의 눈동자가 커졌다.
공력도 싣지 않은 장법에 한 대 맞은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노인장!”
금월대사가 바닥에 쓰러진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노인이 의아한 눈으로 금월대사를 쳐다보았다.
“…….”
“미안합니다. 제가…….”
금월대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노인이 입에서 피를 왈칵왈칵 뿜어냈다.
“손주를…….”
말을 하는 노인의 시선이 힘겹게 한 곳으로 움직였다.
금월대사는 작게 열린 방문 틈으로 쪼그마한 사내아이가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피 흘리는 얼굴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금월대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틈으로 눈만 보이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금월대사의 속에서 상관량을 향한 분노가 화악 일어났다.
여기는 양민의 마을이었다.
상관량 놈이 그들을 속여 양민들의 마을을 치고 있었다.
이 일은 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상관량이 그들을 옭아매기 위해 만든 함정이었던 것이다.
정파의 제자들이 양민마을을 습격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들 개인뿐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문파들 또한 세상의 지탄을 면치 못할 테니.
그들은 이제 상관량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의 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목줄이 상관량에게 매여지는 꼴이 되었으니…….
금월대사가 생각을 하는 사이, 상관량을 따르던 마교도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쪽은 내가 처리하겠소!”
금월대사가 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소리쳤다.
마교도들은 금월대사쪽을 한번 쓱 보고는 그곳을 지나쳐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금월대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잠시 후, 몸을 돌려 천천히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었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고 방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그대로 그 마을을 떠나버렸다.
얼마 뒤, 금월대사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소림으로 줄을 끊은 자신의 염주와 짧은 서찰을 보냈다.
스스로 파계하겠다는 서찰이었다.
혈영천마가 사라지고 그를 없앴다는 수일검과 태청검, 금월대사가 영웅시되는 참이었다.
소림에서는 이미 소림을 떠나서 계율을 벗어난 삶을 살기로 한 금월대사의 파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금월대사는 세상을 등지고 홀로 폐관 수련에 든, 진정한 무림의 영웅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악독한 혈영천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행 중에 양민마을 하나를 깡그리 없애버린 천하의 악인이 되어있었다.
무고한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사문의 이름을 더럽힌 금월대사는 하루하루 스스로를 지우고 없애 갔다.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지만, 어린 것을 거두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 작은 것이 홀로 살 수 있을 때까지만 목숨을 연명하기를 바랐다.
그의 입이 무서운 화산이나 무당, 아니면 마교에서 자신을 노릴 것이니…….
“내가… 저 아이의 할애비를 죽였소. 부모도 없다 하니 하나뿐인 혈육이었지. 그러니 원수가 맞지 않소? 저 아이만은 살려주시게. 혈영천마를 해한 건 나지 저 아이는 아니지 않은가?”
한때 금월대사라고 불리던 사내가 연천에게 사정했다.
“…….”
연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혹시… 혹시라도 저 아이를 가엾게 여긴다면 딱 하루만, 저 아이와 작별 인사를 할 딱 하루만 내게 주면 안 되겠나? 절대 도망가지 않겠네. 내일 밤에 내 목숨을 거두어가도 좋네, 내 자네를 기다림세.”
“후우…….”
연천에게는 복수를 하고 싶은 의지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스승님의 복수의 대상이 이자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었다.
‘대체 누구에게 복수해야 하는지…….’
하지만, 금월대사를 통해 그날의 일을 자세히 알아야 했기에, 일단은 그를 보은장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탈탈 털어서 듣고 난 후에 그를 없앨지 말지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게 원하니, 그를 데려가기 전에 하루 정도 제자와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딴 아량 같은 것을 베풀 필요는 없지만, 스승 옆에서 버티는 답답하도록 우직한 그의 제자, 허성의 얼굴이 떠올라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연천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네, 고마워. 내일 보세……. 잊지 말고 내일 밤에 꼭 오시게.”
방을 나서는 연천 뒤에 취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천은 무거운 걸음으로 그의 방을 나왔다.
다음날.
새벽부터 집을 나와 일을 마친, 허성은 익숙하게 스승과 사는 마을 뒷산의 작은 집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곽 영감댁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일한 삯을 받지는 못했지만, 며칠 일한 것을 한꺼번에 받으면 돈이 제법 될 것이다.
지난번에 받아 놓은 술이 꽤 남아있으니, 목돈이 들어오면 스승님 새 옷을 한 벌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는 통에 몰골이 엉망이었다.
옷 꼴도 그렇지만, 머리는 어떻게든 정리가 필요했다.
손도 못 대게 하는 쑥대강이 같은 머리카락을 어떻게 몰래 잘라버릴까 고민했다.
집안으로 들어선 허성은 마당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세간살이며, 그의 옷가지가 모조리 마당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툇마루에 앉아 술을 들이켜던 스승이 허성을 보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당장 나가거라!”
“…….”
허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뒹굴고 있는 세간을 주섬주섬 주웠다.
“이놈이! 나가라니깐. 귓구멍이 막혔냐!!”
“아직 술 많이 남았습니다.”
허성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당을 정리했다.
“저, 저… 나가라니깐 뭔 헛소리야! 내 너를 데려다 키우는 게 아니었어. 너를 데려온 것을 가슴에 사무치게 후회한다, 후회해! 지금이라도 인연을 끊자! 너는 내 마음의 짐이고 혹 덩어리야!”
허성은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듯이 마당을 정리하고는 작은 상에 술상을 차려 스승이 앉아있는 툇마루에 놓았다.
“안주도 같이 드십시오.”
취한이 덤덤한 제자를 노려보다 술상을 뒤집어 엎어버렸다.
작은 상이 마당 흙바닥에 뒤집혀 너부러지고, 상 위에 차려졌던 그릇과 음식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으흠…….”
허성은 또다시 주섬주섬 마당에 흩어진 것을 주웠다.
“나가! 나가라고! 나는 너만 보면 진저리가 나, 내 인생에서 이제 좀 사라지라고.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셈이냐? 네 존재가 내 목을 조르고 내 숨통을 죄어와. 제발 내 앞에서 꺼져!! 나도 숨 좀 쉬고 살고 싶다고오!!”
취한이 허성을 향해 악을 써댔다.
흙 묻은 숟가락을 줍는 허성의 손이 떨렸다.
멀리서 작은 집을 바라보던 연천이 눈을 내리감았다.
저것이 취한이 어젯밤 말했던 제자와의 작별 인사라는 것인가.
‘참으로 요란하고 몹쓸 인사구나…….’
지는 해를 바라보며, 취한만 데리고 보은장으로 갈 것인지 제자라는 아이도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으흠….”
숨을 길게 내뱉어도, 가슴을 꽉 막고 있는 찝찝하고 불쾌한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렇게도 알고 싶어 했던, 그날의 진실을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음?”
석양을 바라보던 연천이 갑자기 작은 집으로 달렸다.
옆에 있던 모충일도 함께 뛰었다.
연천은 망설임 없이 취한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피범벅이 된 취한 옆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허성이 앉아 있었다.
연천의 인기척 때문인지, 내내 스승님을 걱정하던 허성이 들이닥친 것 때문인지 취한을 해한 자들이 연천이 들어온 반대편 담을 넘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연천은 침입자를 쫓지 않고 취한 옆으로 다가갔다.
취한은 아직 의식이 있었다.
“의원! 의원을 불러요!”
모충일에게 외치고, 일어서려는 연천의 팔을 취한이 잡았다.
“…의원은 무슨… 미안하오. 약속을 못 지켜서…….”
취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연천의 손에 죽기로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있었다.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곧 의원을 불러올 것이오.”
연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됐소…. 약속도 못 지킨 주제에 부탁 좀 하겠소. 이 아이를 좀 맡아주시오. 밥도 잘하고, 바느질도 잘하는 착한 아이요. 사람 정이 그리운 아이니, 옆에만 있게 해주시오.”
취한의 말에 연천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소리예요. 얼른 일어나야지!”
허성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허성아… 내가 너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내가 네 할아버지를…….”
“됐어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일어나기나 해요!”
허성이 취한의 말을 막았다.
“내가 잘못했다. 내 잘못이야…….”
취한의 작은 목소리가 점점 꺼져갔다.
“으으흐흥… 죽지 마요…….”
허성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저분을 따르거라, 아주 훌륭한 분의 제자야… 잘…….”
취한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스승님! 스승니임! 으아아!!”
허성이 소리를 지르며 취한을 흔들어댔지만, 취한의 몸은 그의 손길에 따라 흔들릴 뿐이었다.
“후우….”
연천은 낮게 숨을 내쉬며 눈을 꼭 감았다.
금월대사를 알아본 자는 저자 한가운데에서 금월대사를 잡아 세웠었다.
보는 이들이 많은 곳에서 금월대사가 맞다 아니다 실랑이를 했으니 입 빠른 중원에서 그 소문은 멀리 퍼졌을 것이다.
혈영천마를 죽인 자이니 마교에서도 표면적으로는 그를 쫓을 것이고, 소림에서는 어찌할지 알 수 없으나 일단은 그를 찾긴 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고 서둘렀어야 했는데…….’
연천은 어젯밤 그를 데려가지 않고 제자와의 시간을 준 것을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