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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28화 (128/230)

128화

허성의 시선을 느낀 취한이 걸걸하게 말했다.

“내 오랜 벗의 제자이시다. 인사해라!”

취한의 말에도 허성은 연천을 향한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고얀 놈! 인사하라니깐!!”

취한이 허성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안…녕하십니까.”

허성이 마지못해 연천에게 인사하는 시늉을 했지만, 여전히 연천에게서 불안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저… 인사했으면 가서 술상이나 봐오너라.”

취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허성에게 말했다.

“…….”

허성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연천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놈아!! 내가 같은 말을 몇 번씩 해야 알아먹는 게야? 이리도 스승의 얼굴에 먹칠해야 되겠느냐?”

취한의 호통에 허성은 연천과 스승을 불안하게 번갈아 보다 부엌으로 사라졌다.

“거, 미안하오. 제자 놈이 착하기는 한데 말을 잘 안 들어.”

취한이 열린 문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

연천은 무거운 얼굴로 제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취한을 쏘아보았다.

서둘러 간소한 술상을 차려온 허성은 상을 내려놓더니, 연천과 스승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 앉는 게야?”

취한이 자신 옆에 앉은 허성을 큰소리로 꾸짖었다.

“…….”

허성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스승, 취한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검을 차고 신도 벗지 않고 스승의 방에 든 사내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건만 스승은 본인과 그 사내, 연천을 싸잡아 어른이라고 일컫고 있었다.

하긴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써대는 스승이니, 이 정도는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든 저렇든 허성은 스승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스승의 객이라는 사내가 스승에게 뿜어내는 감정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기에.

“가서 자! 내일도 새벽부터 일하러 간다면서! 어서 가!”

취한은 허성의 마음도 모르고 그를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싫어요. 나도 여기 있을래요.”

허성이 버티며 말했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이놈아! 스승이 손님하고 얘기 좀 하겠다는데 제자 놈이 그 옆에 버티고 앉아서 안 나가는 건 무슨 법도냐? 내가 네놈을 그렇게 가르쳤냐! 당장 일어나서 나가지 못해!!”

취한이 과하게 소리를 지르며 허성을 나무랐다.

술 냄새 나는 그의 입에서 찝찝한 액체가 튀었다.

“…….”

여전히 자리에 버티고 있는 허성은 취한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여 가서 자!!”

취한이 제자에게 악을 써댔다.

허성은 마지못해 주섬주섬 일어나 연천과 스승을 번갈아 보다 방을 나갔다.

“문 앞에 있지 말고 네 방으로 가아!!”

취한이 방문을 나서는 허성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 질렀다.

허성은 대꾸 없이 방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아휴우… 내 제자 놈이 저리도 스승 말을 안 듣는다오.”

취한은 허성이 차려온 술상에서 주전자에 담긴 술을 따라 들이켰다.

“…….”

연천은 취한이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그…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더라… 아! 내가 저놈 손에 죽고 싶다고 했었지, 낄낄낄….”

낄낄거리는 취한의 입술 옆으로 허연 술이 흘렀다.

“…….”

연천은 심란한 얼굴로 취한을 보았다.

‘정말 이자가 소림의 장로였다던 금월대사가 맞다고? 그 금월대사가?’

“저 보쇼, 저리 모자란 놈이니 어찌 스승을 해하겠소. 저놈은 포기하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잘 왔소. 혹시 나를 죽이고 나면 저 제자 놈도 없앨게요?”

취한이 물었다.

“그럴지도.”

연천은 짧게 답했다.

눈앞의 사내를 죽이는 게 진짜 스승님의 복수를 하는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저놈이랑 나는 원수지간이요. 그러니… 저놈은 살려주시오.”

취한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하!”

연천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주정뱅이의 말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충일이 금월대사가 확실하다고 했으니 없애야 하는지 생각했다.

그러기 전에 일단은 그날의 진실을 알아야 했다.

금월대사를 보며 생각하는 연천은 속이 답답했다.

“내 말을 못 믿나 본데… 정말이오. 내가 저놈의 원수라니깐, 그러니 저놈은 살려주시오.”

취한이 웃지도 않고, 술을 들이켜지도 않고, 연천을 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깐, 그게 십… 몇 년쯤 전이던가… 그땐 내가 나름 정파에 소속되어 바른 도리라는 것을 따르며 살던 때지……. 생각해보면 화산의 수일검을 만나면서 모든 게 이상해졌어… 그 수일검 때문에…….”

“…….”

연천은 그날 일에 대해 입을 여는 금월대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았소… 그게 내 문파 내에서도 그리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나 보오. 사형제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더군… 그게 수일검이 나를 찾아온 이유인지도 모르겠소. 아마 수일검도 자신의 문파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였을게요.”

취한의 목소리가 더욱 아릿해졌다.

“그 사람… 자네 스승 말일세. 대단한 사람이더구만, 마교의 교주만 아니었다면 내 무인으로서 존경할뻔했어. 예리하고 가벼운 몸놀림과 빠른 상황판단, 강한 정신력… 그 검강과 검기는 내가 몇 번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네. 자네도 그걸 그대로 배웠다면 대단하겠구먼.”

“…….”

연천은 스승님에 대해 말하는 금월대사를 노려보았다.

“하나, 그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정파의 제자로서 마교 교주를 없애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 사람이 그대의 스승이니, 그대가 내게 복수를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

“…….”

금월대사는 연천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날 우리는 엄청난 수로 덤볐음에도 자네 스승 하나를 없애지 못했소. 이제는 정말 끝이라 생각한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렸지, 온 산을 헤집어도 결국 찾지 못했어. 우리는 그자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지…….”

“…….”

연천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금월대사가 말한 스승님이 사라진 그 순간이, 숙부님이 스승님을 구해 당산으로 든 그때였을 것이라고.

“난 그자가 죽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살아 있기를 바랐어. 그자의 그 칼춤을 다시 보고 싶어서… 내가 이리 정신을 빼고 산다니깐…….”

금월대사의 아련한 눈빛이 젖어 드는듯싶더니, 얼굴이 고통스럽게 어그러졌다.

이내, 아픔에 찬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그는 절대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 날의 이야기를 연천에게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힘이 들어도 꼭 해야 했다.

갑자기 사라진 혈영천마의 자취를 쫓던 일행은 당산의 진법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혈영천마가 다급히 당산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그 몸으로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리라 생각했다.

상관량이 혈영천마가 만독불침이라고 했지만, 중독되고 단전이 파괴당한 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목숨줄이 끊어지기 바로 직전이었으니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이리 생각한 상관량과 수일검, 태청검과 금월대사는 몇 남지 않은 제자들을 데리고 그들의 전장으로 돌아갔다.

혈영천마와 싸우던 곳,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곳으로 말이다.

“이제 어찌해야겠소?”

금월대사가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물었다.

스스로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의 확률로 혈영천마가 살아 있다고 해도 그를 쫓아가서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

혈영천마의 떨어진 팔을 꼭 끌어안고 있는 수일검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뒤끝이 말할 수 없이 찝찝하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혹시라도 혈영천마가 살아 있다고 해도 자신은 그의 팔 하나를 벤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이지 않겠는가.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었다.

“혈영천마가 혈교의 시회마라대법으로 악마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상관량의 단호한 말에 수일검도, 태청검도, 금월대사도 그에게 시선을 향했다.

“시회마라대법으로 인성이 지워진 사람들은 그저 살육만을 행하며, 갓 도륙한 시신을 먹고 삽니다. 그것들이 이미 한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마을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 싹을 잘라야 합니다.”

상관량의 과단한 표정과 목소리는 그가 말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당신도 같은 마교도이니 그것들을 마교로 영입하든지, 당신이 알아서 하면 되지.”

수일검이 그런 불결한 것들과 엮이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 말이나 마교쪽 말을 듣는 이들이면 이러지 않지요. 대법을 시술을 받게 되면 겉으로 보기엔 사람 같아 보이나, 이미 인성을 잃고 어미 새 따르듯 혈영천마만을 받들게 되지요. 혈영천마가 죽은 것을 알면 목숨을 걸고 우리를 노릴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공격하는 것뿐입니다.”

상관량이 딱 잘라서 말했다.

“으흠…….”

수일검과 태청검, 금월대사는 서로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악마 무리라…….’

혈영천마가 사악한 술법으로 키운 것들이 자신들에게 복수하려 든다면, 자신과 자신들이 속한 문파, 주변 인가에까지 해를 끼칠지도 몰랐다.

아직 혈영천마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으니, 기습해서라도 최대한 수를 줄이는 게 나았다.

세 사람은 상관량의 말에 동의하며 그 마을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금월대사는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작은 마을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저 농사나 짓는 마을인 척하며, 여기서 그런 사악한 악마들을 키워내다니…….’

혈영천마의 무위를 보고 잠시나마 그에게 경외심이 일었던 스스로가 한탄스러웠다.

금월대사는 자신들을 이끈 상관량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혈영천마를 없애겠다는 뜻이 같아 이번 한 번은 같이 했지만, 이 일만 끝나면 다시는 절대로 저놈과 마주칠 일 따위 없으리라.’

상관량은 마을 사람들이 보이자마자, 앞으로 달려나갔다.

금월대사도 눈에 보이는 사내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최대한 많이 없애고,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사내의 명치를 향해 내공을 실은 장법을 쏘았다.

혈영천마와 마교, 살육만 한다는 악마에 대한 혐오감이 더해져 강하게 힘이 실린 장법을 맞은 사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금월대사는 그의 앞을 막는 이들 몇을 더 없애고, 눈앞에 보이는 집 마당에 서 있는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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