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금월대사】
보은상회의 깃발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마차에 앉은 연천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굳은 얼굴은 기대감과 긴장감, 의심이 뒤섞여 조바심하고 있었다.
‘설마…….’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쑥불쑥 이는 기대감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며칠 전, 모충일이 다급하게 연천의 방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금월대사를 찾았습니다.”
“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껏 수일검을 어찌할지만 고민했지, 금월대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소림의 깊은 산 암자에서 두문불출하는 이를 어찌 찾았다는 것인지….
“그것이… 중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모충일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월대사를 알아본 이는 소림의 속가제자인데, 알은체하자 자신은 금월대사가 아니라며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그럼 금월대사가 아닌 것 아닙니까? 그가 왜 속가제자에게서 도망을 치겠습니까?”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소림에서는 금월대사가 소림 밖에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소림승들이 은밀히 금월대사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정보원 중 하나가 뒤를 밟아 금월대사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하아… 제가 가겠습니다.”
묵직한 한숨을 내뱉은 연천이 말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금월대사의 얼굴을 압니다.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모충일의 말에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허리까지 내려오는 더벅머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서로 엉겨 붙고, 허옇게 더께가 앉아 있었다.
봉두남발이 된 머리카락은 빡빡 밀지 않고서는 절대 해결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 꼴이 어떤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낮에 마신 주독이 미처 다 빠지기도 전에 비틀비틀 부엌으로 들어가, 술동이의 술을 퍼마셨다.
“크어~ 좋다!”
입가로 줄줄 흐른 술이 앞섶을 적셨지만, 사내는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손에 든 조롱박으로 술동이의 술을 떠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몇 번을 반복하더니, 아예 술동이 옆에 주저앉아 술동이를 끌어안고 퍼마셨다.
“아! 깜짝이야! 뭐 하십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매서운 목소리가 사내에게 날아들었다.
사내는 얼굴을 다 가린 머리카락을 대충 넘기고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자신의 눈앞에 선 젊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사내, 허성은 화가 난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이놈아! 스승님이 약주 한잔하겠다는데 그리 소리를 지르는 게야!”
사내는 어눌한 발음으로 젊은 사내를 꾸짖고 다시 술을 퍼서 들이마셨다.
이 사내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그가 항상 술에 취해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은 그를 ‘술에 취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취한(醉漢)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것이 그의 이름처럼 되어 있었다.
“저녁 드셔야죠! 그만 드시고 들어가세요!”
허성은 말을 하면서 취한을 부엌 바닥에서 일으켜, 비틀대는 그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저… 저… 고얀…….”
취한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허성이 방문을 닫아버렸다.
“에효…….”
크게 한숨을 내쉰 허성은 새로 받아온 술동이를 취한이 퍼마시던 동이 옆으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 장에서 사 온 재료로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을에 힘쓰는 일이 있으면 허성은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일을 해주고 그것으로 스승과 둘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아랫마을 곽 영감댁에서 꽤 넉넉한 삯을 받았기에 술도 한 동이 더 들여놓았다.
술이 떨어지면 손을 부들부들 떨어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술을 찾아 헤매는 것을 알기에 돈이 생길 때마다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스승님! 스승님!”
허성은 방바닥에 너부러져 잠이 든 취한을 깨웠다.
“어…음…….”
취한이 술 냄새가 풍기는 입을 웅얼거리며 제자를 바라보았다.
“저녁 드세요.”
허성이 삐딱한 얼굴로 스승에게 말했다.
“…….”
취한은 부스스 일어나서 방 한편에 차려진 작은 상을 쳐다보았다.
고깃국에 간소한 찬 두어 가지와 술이 담긴 작은 동이가 상 옆에 놓여 있었다.
“으흐흐흐.”
취한이 술을 보고 흐뭇한 얼굴로 상으로 주섬주섬 기어가 앉았다.
“으흠….”
허성은 스승이 숟가락을 들어 고깃국을 뜨는 것을 보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취한은 국 몇 숟가락을 뜨더니 곧장 술로 손이 갔다.
“아! 식사는 좀 하고 드세요!”
허성이 퉁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같이 먹으면 되지.”
취한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밥을 떠서 입으로 쑤셔 넣었다.
허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다른 말은 붙이지 않았다.
* * *
연천은 작은 잔에 담긴 술을 비웠다.
모충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연천이 입을 열었다.
“그런 자가 금월대사라니…….”
연천의 목소리에는 짜증마저 담겨있었다.
“제가 금월대사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많이 늙고 상하고 머리도 많이 나기는 했지만, 금월대사가 확실합니다.”
모충일의 말에 연천은 답답함이 올라왔다.
스승님이 발작을 하며 자신의 과거를 꺼낼 때마다 연천은 스승님과 함께 아팠다.
스승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고 싶었다.
무림으로 나와 스승님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면서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고 그분을 해한 그 악한 놈들에게 복수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한데 그 원수라는 놈들의 꼴이 왜 하나같이 이 모양이라는 말인가.
금월대사 놈은 수일검보다 더 꼴사납게 살고 있었다.
죽여도 복수를 한 것 같지도 않고, 속도 전혀 시원하지 않을 꼴이지 않은가?
스승님의 원수라고 죽인들, 자기가 왜 죽는지 알기는 알까?
아니,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죽는 것을 깨닫기나 할까?
‘술독에 빠져서 정신을 놓고 사는 저런 놈에게 무슨 복수를 해야 하는 건지…….’
“으흠…….”
연천은 거칠게 한숨을 내뱉고 술잔을 비웠다.
금월대사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모충일과 함께 금월대사라는 자를 며칠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잠시도 제정신이지 않았다.
술이 깨기도 전에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잠이 들고 또 깨기 전에 술을 마셨다.
모충일이 같이 와서 금월대사가 맞다고 하지 않았다면, 연천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고 돌아갔을 것이다.
소림의 장로였으며 영웅삼존 중에 하나로, 폐관 수련에 들어 소림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던 그가 왜 이런 인적도 적은 산골동네에서 술독에 빠져서 살고 있는 건지….
“후우…….”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연천이 검 끝으로 취한의 얼굴을 툭툭 쳤다.
술에 취해 잠이 든 취한은 일어나지 못했다.
연천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의 머리맡, 주전자에 담긴 물을 취한의 얼굴에 콸콸 쏟아부었다.
“어푸푸푸…….”
취한이 얼굴을 부르르 떨더니 눈을 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연천을 발견했다.
“하아암…….”
취한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하품을 길게 하더니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연천은 취한을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금월대사요?”
“금월? 크크큭.”
취한은 연천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실실 웃었다.
“…….”
연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이리 늦으셨소? 내 기다리다 목 빠져 죽을 뻔했구려, 허허허…….”
취한이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지만, 발음은 또렷했다.
“금월대사가 맞소?”
“이름이 무어 중요하오? 나를 죽이러 왔소?”
“그렇소, 내가 누군지 아시오?”
연천은 술 냄새를 풍기며 죽음이라는 말조차 경박하게 하는, 취한을 경멸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찌 알겠소? 말을 안 해주는데…….”
취한의 목소리는 낭창했다.
“나는 혈영천마 주진관의 제자 백연천이오!”
연천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그 사람이 제자가 있었구려, 상관량의 말로는 그런 거 없다던데. 제자가 있었구먼, 제자가… 크~ 제자도 참 잘 골랐네.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무공도 대단하겠지… 허허허.”
취한은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었다.
“내가 당신을 죽이겠다는데 두렵지 않소?”
“목 빠지게 기다렸다니깐, 껄껄껄…….”
답하는 취한은 기분 좋은 듯 계속 웃었다.
“…….”
연천은 얼굴을 찌푸리고 취한을 노려보았다.
“스승님! 안 주무시고 뭐 하십니까?”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연천도 취한도 입을 다물었다.
취한의 다 쓰러져가는 집 밖에 몸을 숨기고 있던 모충일이 바짝 긴장을 한 채, 자세를 다잡았다.
“이놈아! 잔다 자! 내 걱정 말고 너나 자거라! 내일도 곽 영감댁에 일 간다면서?”
취한이 밖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예~예~ 주무세요!”
퉁명한 목소리를 끝으로 조용했다.
취한이 연천을 쳐다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놈이 내 제자요. 남의 집 심부름이나 다니면서 스승 술 사다 바치느라 고생이 많지.”
연천이 제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에 껄끄러운 얼굴이었다.
“…….”
연천이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취한은 제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쳐다보며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저놈 손에 죽고 싶었는데…….”
“…….”
취한의 말에 연천이 그를 쏘아보았다.
지독한 취기로 인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하지만 취한의 눈동자는 제자리에 반듯하게 박혀 있었고, 그 눈으로 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벌컥―!
작정한 듯 문이 급하게 열렸다.
연천과 취한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천은 문 앞에 선 취한의 제자 허성과 그 너머 그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모충일을 보았다.
연천이 모충일에게 작게 고갯짓했다.
괜찮으니 가보라고.
잠시 망설이던 모충일의 신영이 사라졌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이놈아! 오밤중에 스승님 방에 들어오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취한이 어눌한 말투로 허성을 꾸짖었다.
“…….”
허성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연천을 쳐다보았다.
깜깜한 방에 불도 켜지 않고, 신도 신은 채 스승을 마주하고 있는 사내를 말이다.
사내가 검을 뽑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손에 들린 검에 시선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