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계속 제자리인 대화였다.
“으흠…….”
연천이 길게 침음을 흘렸다.
모충일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자를 죽이면 그날의 진실을 알아내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자가 살아 있다고 한들 스승님의 억울함을 풀 수가 있을까?’
혈영천마를 죽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자였다.
십수 년이 지난 일에 증인이라 할 만한 자도 없었다.
영웅삼존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 남아있는 자는 수일검 운호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태청검은 죽었고, 금월대사는 이후 깊은 산속 암자로 들어가 폐관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외부에서는 그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날 같이 있었다던 세 문파의 제자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몇이 있긴 하였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일을 알고 있는 자는 수일검 운호 하나였다.
연천은 운호를 없애버리고, 보은장과 무명촌을 떠나고 싶었다.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은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조금 더 천천히 생각을 해보고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의도 연천을 만류했다.
“가주님,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르면 그르치게 됩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모충일의 말에 연천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천은 버티고 기다리는 지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운호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더는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십수 년 동안 같은 방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바꾸어야 했다.
* * *
“교준 대협.”
걸화가 기분 좋게 웃으며 교준을 불렀다.
오랫동안 살수로 훈련받은 그의 감각이, 그녀를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까이하면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함과 그녀의 미소를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교준의 내부에서 충돌해대고 있었다.
걸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준에게 다가갔다.
“대협!”
걸화가 활짝 웃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교준은 저렇게 웃는 걸화가 좋았다.
새하얀 얼굴에 볼이 약간 붉어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 가지런한 치아가 다 드러난 저 미소가 말이다.
교준의 깊은 곳, 한편에서 다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얼른 그녀에게서 도망치라고.
걸화가 저렇게 예쁘게 웃을 때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곤 했으니.
“교준 대협! 얼굴이 까칠한 것이 많이 힘들어 보여요. 스승님을 모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항상 가까이서 보는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걸화가 교준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
교준이 어색하게 웃는 시늉을 했다.
“대협이 얼마나 스승님을 위해 애쓰는지 아니깐, 대협을 너무 돕고 싶어요.”
걸화가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걸화는 교준을 아니,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네…….”
“제가 대협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걸화가 뭔가 대단한 말을 꺼내려는 듯 잔뜩 뜸을 들이며 말했다.
“뭐… 뭘… 괜찮습니다.”
“제가 돕고 싶다니깐요! 사람의 도움을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데…….”
걸화가 새치름하게 교준을 쳐다보았다.
“…….”
교준이 슬그머니 걸화의 시선을 피했다.
“대협! 대협은 영단을 드시어 보셨어요?”
걸화가 교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교준이 반보쯤 뒤로 물러났다.
“네, 먹어 보았지요.”
걸화를 경계하며 답했다.
“어떠셨습니까?”
걸화가 호기심 어린, 큰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교준이 좋아하는 걸화의 표정 중 하나였다.
뒷걸음질을 멈추고, 걸화를 마주 보는 교준이었다.
결국, 걸화를 보고 싶어 하는 쪽이 승리를 한 모양이었다.
“뭐… 확실히 내공도 늘고, 제가 먹은 것은 내공이 깨끗해지기도 했답니다.”
답을 하는 교준은 걸화가 저런 것을 왜 물어보는지 궁금했다.
“우와~ 그런 영단은 너무 귀한 것이라 구하기도 어렵다면서요?”
걸화의 말투는 누가 들어도 가식적이었다.
“그렇지요.”
걸화의 서론이 길어지자 교준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럼 다른 이를 위해 영단을 구해 준다면 그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겠네요?”
“당연하지요. 영단은 귀한 만큼 값도 비싼 것이니까요.”
“제가 아주 아주 좋은 영단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것을 대협을 위해 드리겠습니다.”
걸화가 큰 인심을 쓴다는 얼굴로 말했다.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준 교준을 위한 마음은 컸지만, 고생해서 만든 영단을 주면서 약간의 생색 정도는 내고 싶었다.
“네에? 영단을요? 그것을 왜 제게?”
“그거야 대협이 저와 스승님께 소중한 사람이니 그렇지요.”
걸화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스승님을 따라 산속을 힘겹게 오를 때 자신을 도운 것도 교준이고, 산적에게 쫓겨 절벽 밑에 있을 때 그녀를 구한 것도 그였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교준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걸화의 예쁜 미소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걸화가 화려한 금빛의 보자기에 싼 물건을 내어 보이더니,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상자의 뚜껑까지 열어 교준에게 내밀었다.
교준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지난번에 걸화가 준 환단을 먹고 고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공을 쓸 때마다 아랫배가 묵직해지며, 뒷간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그 환단을 생각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걸화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었다.
“어서 드세요.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걸화가 교준을 재촉했다.
“뭘… 넣어서 만든 것입니까?”
교준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거야… 비밀이지요. 그런 것을 어찌 함부로 발설하겠습니까?”
“소저가 혼자서, 직접 만든 것이지요?”
교준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요.”
걸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교준을 쳐다보았다.
좋은 재료를 넣어서 힘들게 만든 영단에 당장 달려들어도 모자랄 판에 저리 뭉그적거리니 말이다.
“하. 하. 저는 뭐… 괜찮을 것 같은데…….”
교준이 어색한 얼굴로 거절했다.
걸화가 상자의 뚜껑을 꽝 소리가 나게 닫으며 고개를 팩 돌렸다.
“됐습니다! 드시지 마세요. 저는 대협을 생각해서 드리는 것인데 싫으면 됐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약초를 준비하고… 좋은 물을 떠서, 몇 날 며칠을 달인 것인데 저리 거절하다니.
지난번에 준 환단의 부작용에 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걸화는 교준에게 너무 섭섭했다.
“아니오, 아니오. 내가 안 먹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저 괜찮을 것 같다고…….”
교준이 급하게 걸화를 달랬다.
걸화가 쌜쭉한 얼굴로 교준을 쳐다보았다.
“주시오, 어서 주시오.”
교준이 걸화의 손에 든 상자를 달라고 재촉했다.
“됐어요!”
“줬다 뺏는 것이 어디 있소. 주시오, 어서 주시오.”
교준이 거의 빼앗다시피 상자를 받아내더니, 걸화가 뭐라고 하기 전에 상자 속의 영단을 서둘러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은근한 풀 향이 나는 환단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새치름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던 걸화가 눈을 크게 뜨고 환단을 삼키는 교준을 쳐다보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도 멈춘 채, 교준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환단을 삼킨 교준은 걸화를 한번 보고 앉아 눈을 감았다.
운기하여 영단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운기조식에 빠져든 교준은 선천지기가 아프도록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교준이 깨끗한 눈을 천천히 떴다.
“어때요?”
걸화가 교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헤헤헤… 좋아요…….”
교준이 뭐 하나 부족한 사람처럼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었다.
“에엥? …영단의 효과가 어때요?”
걸화가 떠름한 얼굴로 교준을 보며 물었다.
“영단… 소저! 영단 만들지 마세요. 나도 어쩌다 보니 먹긴 했는데 안 먹고 싶었어요. 보은장에 아픈 사람들이 아픈 것 티 안 내려고 조심하고 있어요. 소저한테 들킬까 봐요.”
교준이 따박따박 바른말을 해댔다.
“뭐… 뭐…요? 나는 자기들을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데… 이씨…….”
교준의 말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걸화는 씩씩거렸다. 그러다 헤실헤실 웃고 있는 교준을 쳐다봤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교준은 암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때요?”
물어보는 걸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좋습니다. 소저가 옆에 있으니 더없이 좋습니다.”
교준의 답에 걸화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 교준은… 그래도 이상했다.
교준은 저리 밝게 웃는 사람이 아니니.
걸화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난 이제 죽었다.’
‘스승님이 허락 없이 한 번만 더 처방하면 쫓아낸다고 했는데. 설마 진짜 쫓아내지는 않으시겠지?’
‘교준 대협을 데리고 어디로 도망갈까?’
‘대체 저게 왜 저렇게 되는 거야? 선천지기가 맑아지고 기운이 모여야 되는데…….’
‘싹싹 빌면 용서해 주실까? 환자를 치료하지 말랬지, 영단을 먹이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에잇!’
그때, 의약당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입구로 고개를 돌린 걸화는 숨이 턱 막혔다.
“교준아!”
신의가 교준을 부르며, 의약당을 들어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걸화는 황급히 눈에 보이는 덤불 사이로 몸을 숨겼다.
“교준아! 은랑대와 전랑대의 전력은 어느 정도이냐?”
급하게 질문은 하는 신의의 얼굴은 어두웠다.
화산을 방문한 후, 연천은 유난히 힘들어했다.
자신들이 힘들 때마다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주던 연천이 흔들리니, 마을과 보은상회 전체가 기우뚱거리는 기분이었다.
은랑대와 전랑대는 마교에서 모충일과 함께 나온 이들이 만든 살수대였다.
일단은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을 파악해서 다시 의논해 볼 심산이었다.
“은랑대, 전랑대 각각 50 정도이기는 하나 은랑대의 절반 정도는 아직 훈련이 덜 된 녀석들이고, 전랑대는 훈련이 끝난 녀석들 중에서도 쓸 만한 녀석들은 몇 안 됩니다.”
심각한 신의에게 대답을 하는 교준의 목소리는 낭창했다.
“아니, 은랑대와 전랑대의 전력이 그리 형편이 없단 말이더냐? 무력단주의 말을 듣자 하니 전원을 당장 실전에 배치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던데…….”
신의가 실망한 얼굴로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