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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24화 (124/230)

124화

【영단!?】

연천은 평소보다 오랫동안 검을 휘둘렀다.

몸이 개운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운호의 얼굴과 그가 자랑스럽게 내밀던 목내이가 된 스승님의 팔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열하던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걸화의 손길도 생각이 났다.

연천은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화를 눕혔던 침상은 비어있었다.

연천은 의약당으로 향했다.

* * *

교준은 연천을 따라 화산에 갔다가 어젯밤에 도착했다.

화산에 다녀와서 가주의 상태가 좋지 못해 걱정이었다.

화산에서의 일을 캐묻던 신의 또한 비감에 빠졌다.

마음이 좋지 못한 교준은 우울하게 의약당 마당에 앉아있었다.

“교준 대협! 대협은 가주님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지요? 대체 무엇 때문에 저런 겁니까?”

의약당으로 들어오던 걸화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저는 모르는데요.”

교준이 어색하게 거짓말을 했다.

“정말요? 정말 몰라요?”

걸화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네…….”

교준이 걸화의 눈을 피하며 답했다.

“으흠…….”

걸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교준이 뭔가를 안다고 해도 가르쳐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귀찮게 매달려서 묻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연천과 신의, 교준이 없는 동안 걸화가 정성을 들인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

방에 들어갔다 나온, 걸화는 표정을 바꾸었다.

자신과 스승님을 위해 고생하는 교준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번 기회에 잘 보여서 무공도 좀 배우면 더 좋고….

사발에 담은 물을 쟁반에 받쳐 들고 교준에게 다가갔다.

“대협! 제가 얼마나 대협을 목 빠지게 기다린 줄 아세요?”

“저를요?”

교준의 얼굴빛이 붉어졌다.

“그럼요.”

“네… 뭐…….”

교준이 쑥스러운 얼굴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대협! 대협은 무인이니, 내공을 쌓는 데 관심이 많으시지요?”

“그거야, 그렇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협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걸화가 황톳빛의 콩알만 한 환단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무엇이긴요. 제가 고생하는 대협을 위해 준비한 것이지요. 이것을 먹으면 원래보다 더 빠르게 축기할 수 있습니다.”

“영단입니까?”

“에이… 이 정도 가지고 영단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요. 진짜 영단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세요.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걸화가 활짝 웃으며 환단을 내밀었다.

“…….”

교준은 뭐라 대답을 하지 못하고, 걸화가 내민 황토색 환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물도 떠 왔으니, 환단만 먹기 불편하시면 같이 드세요.”

교준이 환단을 받지 않고 뭉그적거리자, 걸화가 환단을 교준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교준은 천천히 손을 뻗어 걸화의 손바닥에 놓인 환단을 집어 들었다.

걸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교준과 환단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환단을 섭취하려는 교준을 보면서 말이다.

교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걸화의 시선을 느끼며, 손에 든 환단을 내려다보았다.

걸화의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보고는 환단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청명함은 없지만 그렇다고 불쾌하거나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교준은 눈앞에서 자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걸화를 한번 보고 환단을 꿀꺽 삼켰다.

멀리서 걸화와 교준을 지켜보던 연천이 발길을 돌렸다.

수련 후 가볍던 몸이 다시 묵직해졌다.

가슴에 커다란 바윗덩이가 박힌 것처럼 답답했다.

걸화가 동그란 눈을 말똥거리며 교준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교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는데요.”

“에이… 내공을 운공 해봐요. 그래야 정확히 알죠.”

걸화의 말에 교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내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교준은 단전을 가득 채운 내공을 몸속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기운은 평소보다 강하고 거세게 흐르며, 맑은 대자연의 기운을 강하게 당겨 끌어안았다.

대자연의 크고 깨끗한 기운이 녹아들어 커다란 파도처럼 몸속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맹렬하게 흐르는 커다란 기운에 기분이 좋았다.

걸화가 준 환단이 효과가 있었다.

엄청난 기운이 세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태양의 빛과 열기가 자신만을 내리쬐고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가벼워지며,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커다란 흐름을 느끼던, 교준은 순간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내공과는 다른 기운이 단전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내공이 강하게 흐르자, 밑으로 흐르는 기운 또한 강하고 세차게 아래쪽으로 향했다.

교준이 다급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걸화가 말릴 사이도 없이 서둘러 뛰었다.

“어디 가세요? 어떤지 말은 해주고 가야지요!!”

걸화가 멀리 사라지는 교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교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이… 어디로 간 거야?”

걸화는 교준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툴툴거렸다.

그날은 해가 지도록 아무도 교준을 보지 못했다.

다 늦은 저녁, 교준은 핼쑥해진 얼굴로 뒷간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 나왔다.

* * *

“드시지요.”

신의가 연천에게 탕약을 바쳤다.

그의 태도는 공손했고, 얼굴은 연천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다.

신의는 진심으로 혈영천마의 제자인 연천을 섬기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신의뿐이 아니었다.

모충일도, 화칙도, 곽림도, 형란도, 교준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연천은 무명촌에 들어온 이후, 그들이 바라는 혈영천마의 제자로, 보은상회 가주로 살아가고 있었다.

백연천이 아닌, 그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묵직한 얼굴의 연천이 탕약을 천천히 들이켰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신의가 엉망으로 부은 얼굴로 말했다.

교준에게 화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신의는 밤새 눈물을 흘린 탓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신의 옆에 있는 모충일의 얼굴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이제 괜찮습니다.”

연천이 사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연천이 아직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들에게 하대하는 것이었다.

물론 마을의 어르신들에게도 꼬박꼬박 예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만류하던 모충일도 이제는 그냥 두었다.

이미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는 연천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교준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찌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밤새 땅을 치며 오열을 한 신의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제게 정파에서 신뢰할 수 있는 가주가 되라고 하셨지요? 그리 못하겠습니다.”

연천이 딱딱하게 말했다.

“아니… 그 무슨…….”

모충일이 놀란 얼굴로 연천을 바라보았다.

무명촌으로 들어온 연천은 지금껏 자신의 역할을 잘해주고 있었다.

그는 듬직하고 진중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찌 저리도 모난 곳 하나 없이 모든 것을 갖춘 분을 고르셨는지, 그분의 안목에 경탄했다.

모충일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림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했고, 조용히 내어놓는 의견은 믿음이 갔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았고, 주변을 격려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수련했고, 잘 단련된 몸가짐은 반듯했다.

모충일은 작은 의구심도 없이 그를 공경했다.

그런 연천이 처음으로 자신의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화산 놈을 잡아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아야겠습니다.”

낮은 연천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

“…….”

“그놈과 같은 세상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놈을 절대! 가만둘 수가 없습니다.”

연천의 말에 모충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모충일은 연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혈영천마가 사라진 직후, 자신의 마음이 딱 저러했으니.

마을 사람들이 없었으면, 수일검 따위 자신이 먼저 없애버렸으리라.

모충일의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원수 놈들을 살려놓은 것에 대한 후회… 그분께 죄송한 마음… 온몸이 바스라지게 이는 죄책감, 그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까지…….

눌러놓았던 감정이 모충일을 휘저으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모충일이 눈을 꼭 감았다.

“화산부터 해결할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모충일은 겨우 입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 말에 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천과 신의, 모충일의 얼굴은 어두웠다.

세 사람은 며칠째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은상회로 그자를 불러내겠습니다. 그때 처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연천이 말했다.

보은상회는 이미 중원에 신뢰할 만한 상회였고, 이름 있는 문파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상회를 이용해서 운호 하나 정도 불러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자 하나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산적의 소행으로 만들 수도 있고, 현 마교의 소행으로 만들 수 있기는 하나, 지금 그자를 없애는 것이 바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모충일이 말했다.

그의 그늘진 얼굴은 무거웠다.

운호 하나 없애려 했다면, 진즉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충일은 무엇을 위해 수일검 운호를 없애지 않고 기다렸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슬펐다.

그분의 오명을 벗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자신이었다.

상회를 키우고 첩자를 두고, 그분의 제자를 이곳에 모신 것도 자신이었다.

이미 십수 년이 지난 일이었다.

처음 그리 마음을 정하고 움직였을 때는, 곧 그분의 누명을 벗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분을 모신 모충일은 세상 사람들이 해대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어딘가 숨겨진 진실이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것을 꺼내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답답했다.

꽁꽁 숨겨진 그 진실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자신을 믿고 그분의 오명을 벗기겠다고 따르는 마을 사람들과 연천에게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휘청대고 있었다.

모충일이야 말로 모든 것을 다 내팽개치고 수일검을 찢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모충일… 자신이었다.

모두를 다독여, 진실로 나아가야 했다.

지금 멈출 수는 없었다.

지난 세월이 이곳에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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