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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23화 (123/230)

123화

“…….”

연천은 운호가 들고 있는 상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잘 보시오.”

운호가 한참을 뜸을 들이다, 묵직한 상자의 뚜껑을 과하게 천천히 열었다.

경극이라도 하듯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상자 안에 내용물을 덮고 있던 무명천을 걷었다.

순간, 연천의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그놈의 팔이오. 혈영천마 그놈 말이오. 내가 베었지. 소림의 금월대사나 무당의 태청검이 나와 함께 천마를 해치운 영웅삼존이라고 불리기는 하나, 사실 그곳에서 천마 놈을 제대로 벤 것은 바로 나 수일검이요. 이것이 그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운호가 나뭇가지처럼 거칠게 말라비틀어져, 목내이가 되어버린 팔 한 짝이 든 나무 상자를 자랑스럽게 내어 보이며 말했다.

연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어허! 사제! 가주께서 불편하신 모양이네, 어서 치우시게!”

장문인이 운호에게 말했다.

“장문 사형은 가만히 계시오! 세상 사람들도 알 것은 알아야지요. 겸손이 과하면 믿지 못한다고 하였소! 어찌 그리 이 사제의 업적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막기만 하시오? 사형이 나를 샘하여 그런 것은 아니오?”

운호가 장문인에게 쏘아붙였다.

“흐음… 사제, 어찌 내가 사제의 노고를 몰라 그러겠나? 가주께서 불편해하시니 그것은 그만 넣어두는 것이 좋겠다 한 것이지.”

장문인이 침음을 흘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쳇!”

운호가 불쾌한 얼굴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교준은 연천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핏기가 싹 가신 허연 얼굴을 하고,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꼭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가주님!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이틀 뒤에 중요한 표물이 당도합니다. 그때까지는 상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벌써 시간을 많이 지체하였습니다.”

교준이 침착한 목소리로, 있지도 않은 표물을 만들어내어 연천에게 말했다.

연천은 답이 없었다.

운호에게 향해 가는 자신의 손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자신의 속에서 이는 다른 마음들이 싸워대는 중이었다.

십수 년 동안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밝힌단 말인가?

크게 벌리고 웃는, 운호의 입을 찢어버리면 그만이지.

모충일이 말한 적이 있었다.

수일검과 태청검, 금월대사가 모두 죽은 후라도 그들이 무림의 영웅이 아니라는 것만 밝히면 자신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고.

모충일의 뒤로, 신의의 얼굴도 나타났다.

어떻게 해서든 보은장에 남아서 자신을 보살피려는 그가.

기름 낀 운호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화칙이 떠올랐다.

밤낮없이 상회 일로 바쁜 그의 모습이.

그가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연천이 다른 문파에 뿌려대고 있었다.

운호가 숨 쉬고 있는 꼴을 쳐다보는 것이 역겨웠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혈영천마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떠받드는 이들이…….

눈앞에서 웃고 있는 저자를 죽여 버리고 싶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믿는, 그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그동안 그 많은 이들이 고생해서 이루어놓은 것들을 연천이 한순간에 망치게 될 것이다.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자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하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었다.

연천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대답 없는 연천 대신,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바쁘신 분을 잡아두었군요. 이리 화산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말씀드린 아이들을 보내겠습니다.”

장문인은 술기운이 한껏 오른 운호가 보은상회 가주에게 무슨 실수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해서, 어서 연천을 보내고 싶었다.

교준이 조심히 연천을 잡아 일으켰다.

“허어! 이리 아쉬울 때가 다음번에는 시간이 많을 때 오시어 깊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운호의 붉어진 얼굴이 번들거렸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교준이 입구까지 배웅을 나온 장문인과 장로들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고 연천을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서둘러 화산을 떠났다.

그리고, 급히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는 허연 낯빛을 한 연천이 땀을 흘려댔다.

그의 고통에 찬 신음이 마차 밖으로 흘렀다.

“으어어어억…….”

교준이 걱정 어린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았다.

급하게 질주하는 마차는 사흘 밤낮을 달려 보은장에 도착했다.

교준은 연천을 부축해서 그의 전각으로 향하며 급하게 지시를 했다.

“신의께 알리시게.”

교준은 연천을 그의 방에 눕혔다.

잠시 후, 신의와 걸화가 급하게 들어왔다.

신의가 서둘러 연천의 맥을 짚었다.

“몸속의 모든 기운이 들끓고 있구나. 일단 응급처치부터 해야겠다. 의약당에 가서 약을 챙겨올 터이니 너는 이곳에서 가주님을 돌보거라.”

신의가 걸화에게 말하고 연천의 방을 나섰다.

신의가 나간 문으로 형란이 들어왔다.

“나가시오! 진료 중인 것이 보이지 않소!!”

걸화가 신경질적으로 형란에게 쏘아붙였다.

형란이 걸화의 기세에 눌려 문 앞에 서 있었다.

“치료가 끝나면 부를 테니 가시오! 근처에 있지도 마시오! 방해되니!!”

걸화가 과하게 화를 내었다.

걸화의 말에 형란이 고개를 숙이고 전각 밖으로 나갔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형란인 것 같아, 그녀를 볼 때마다 심사가 뒤틀렸다.

그날 영친왕의 정원에서 형란을 찾은 것은 걸화였다.

성을 나온 이후, 매일같이 형란을 만난 것을 후회했다. 수풀 아래에서 그녀를 끄집어낸 자신을 원망했다.

연천은 땀을 흘리며 신음했다.

연천이 홀로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 걸화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그를 보는 걸화도 아팠다.

걸화는 연천의 장포와 버선을 벗기고 흐른 땀을 닦았다.

잠시 후, 신의가 들어와 작은 환단을 연천의 입속 깊이 밀어 넣었다.

연천의 신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이것은 임시방편이다. 나는 가서 가주님께 드릴 약을 지어야 하니 네가 가주님 곁을 지키거라.”

“네, 스승님.”

신의가 전각 밖으로 나갔다.

걸화는 의식 없는 연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연천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걸화였다.

걸화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연천의 뺨을 쓰다듬으려 했다.

“으어어억… 으윽… 우어억…….”

몸을 일으킨 연천이 구역질을 해댔다.

걸화는 연천이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구토를 할 수 있도록 그릇을 받쳐주었다.

연천은 헛구역질만 반복할 뿐이었다.

“으어허…어허헉… 스승님…….”

구역질을 하던 연천이 흐느꼈다.

“으어어어… 으어… 흑…….”

연천이 몸을 떨며 목 놓아 울었다.

몸을 떠는 연천의 입에서 신음인지 비명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억…으어어억…….”

걸화가 천천히 연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아플 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연천의 얼굴과 눈에서 흐른 액체의 방울이 걸화의 어깨를 적셨다.

걸화는 연천의 등을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연천이 잠들지 못할 때, 스승님이 그에게 해주었다던 그것을 오래도록 반복했다.

연천의 숨소리가 점차 편해지고 있었다.

걸화는 축 늘어진 연천을 조심스럽게 눕히고,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살살 닦았다.

연천은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얕은 그의 숨소리가 걸화를 안심시켜 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요한 연천의 방문이 열리며 신의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탕약이 들려있었다.

“어떠시냐?”

신의가 물었다.

“…스승님을 부르며 오열하시다 잠이 들었습니다.”

걸화의 말에 신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래, 알았다.”

신의는 연천의 등에 베개를 괴어 상체를 높이고, 가지고 온 약을 천천히 입으로 흘려 넣었다.

걸화가 입 옆으로 흐르는 약을 닦았다.

신의가 연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주님을 부탁하마, 나는 교준이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

“네, 스승님.”

신의가 어두운 얼굴로 연천의 방을 나갔다.

걸화는 잠든 연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연천은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사방이 시커먼 어둠뿐이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으하하하하!”

새까만 공간 어디선가 기름 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천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돌리려 했지만, 몸은 의지와 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칠흑 같은 야음이 연천의 전신을 꼭 붙들고 있는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까만 암흑 사이에서 붉고 기름진 운호의 낯이 눈에 들어왔다.

운호는 번쩍이는 검을 가지고, 연천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연천은 운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팔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은 어딘가에 묶인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운호의 검이 연천의 머리 높이에서 빛을 발하더니, 그대로 연천의 팔을 그어 내렸다.

연천이 검에 베인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니, 목내이 같이 비쩍 마른 것이 붙어 있었다.

“으하하하하!”

운호의 자신감에 찬 웃음소리가 시끄럽게 쏟아졌다.

숨이 막혔다.

운호의 비린 웃음소리가 가슴을 꽉 눌러 내리는 것 같았다.

연천은 가슴이 답답해 몸을 비틀었다.

운호의 웃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어둠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댔다.

미간을 구기며 몸부림을 치자, 저 멀리 작은 빛줄기가 쏟아졌다.

연천은 그곳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었다.

어느 순간, 천천히 빛이 열리더니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있던 연천이 눈을 떴다.

해가 뜬지 좀 되었는지, 밝은 빛이 창호지를 뚫고 방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연천은 자신의 가슴에 상체를 걸치고 코를 고는 걸화를 내려다보았다.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아, 나름 자신을 간호하다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연천은 걸화가 깨지 않게 조심히 일어나, 그녀를 자신의 침상에 눕혔다.

잠이 든 걸화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꼬질꼬질하던 얼굴은 겨우 2년 사이에 맑고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인의 모습을 하고 검고 긴 속눈썹이 감은 두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우렁차게 코 고는 소리만은 여전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코끝을 톡톡 두들겼다.

“으음…….”

걸화가 입을 우물거렸다.

연천의 손가락이 걸화의 입술 위에서 멈추었다.

가만히 걸화를 내려다보던 연천은 검을 가지고 방을 빠져나와, 자신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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