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역시 대인배이십니다. 이미 중원의 많은 문파에서 보은상회에 제자들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화산에서도 지원하고자 하는데 가주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연천의 말에 장문인이 쉽게, 본론을 꺼냈다.
“영웅이 계신 화산에서 지원을 해주신다니 보은상회의 앞날에 빛이 비치는 듯하여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연천이 거침없는 목소리로 운호를 추켜세웠다.
말을 마친 연천이 장문인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운호를 쳐다보았다.
“하하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운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조만간 뛰어난 아이들을 골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장문인이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천이 운호를 보며, 장문인에게 짧게 답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저희가 식당에 식사를 준비해놓았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장문인의 말에 연천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대답하는 연천의 가슴은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식사를 하면서 수일검 운호와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연천 일행은 장문인과 화산의 제자들이 안내하는 식당으로 들었다.
식당에는 이미 보은상회 가주를 위한 연회준비가 되어있었다.
길게 늘어선 탁자에는 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화려한 자태로 올라와 있었다.
연천은 새삼 보은상회 가주라는 자신의 위치가 중원에서 어떤지 깨닫는 중이었다.
장문인과 연천, 운호와 몇 명의 장로들이 상석으로 보이는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장문인이 차분하고 겸손하게 말했다.
“모두 맛이 좋아 보입니다. 잘 먹겠습니다.”
연천은 너무 깍듯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예의 없지도 않게 대답했다.
상석에 앉은 이들이 식사를 시작하자, 다른 탁자에 자리한 화산의 제자들도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훌륭하게 차려진 음식을 앞에 두고 기분 좋게 대화하는 소리가 웅성웅성 식당 안을 채웠다.
연천은 점잔을 빼고 밥을 먹는 운호를 바라보며 젓가락질을 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상회에 아주 귀한 원설주가 들어왔습니다. 영웅이신 수일검께 대접하고 싶어 가지고 왔는데 제가 한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하하하, 제가 애주가인 것을 가주께서 어찌 아셨소이까?”
운호는 자신을 영웅이라 치켜세우고, 거기다 귀한 술까지 가지고 왔다는 보은상회 가주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러셨습니까? 이거 참 잘 되었군요. 서역에서만 나는 열매로 만든 술이온데 맛이 아주 그만입니다.”
연천의 말에 교준이 빠르게 움직여 작은 호리병 몇 개를 그들이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연천은 운호에게 예를 갖추어 술을 따라주었고, 운호는 흡족한 얼굴로 잔에 든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으흠… 어찌 이리 맛이 좋은지… 아주 훌륭한 술이구려.”
운호는 쌉싸름하면서 달콤한 과일 향이 남은 입을 쩝쩝대며 말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연천이 다시 운호에게 술을 따랐다.
장문인이 불안한 얼굴로 운호와 연천을 쳐다보았다.
운호가 술을 아주 좋아하고, 술버릇이 고약하다는 정보는 입수해 놓은 상태였다.
연천은 운호를 칭찬하면서, 도수가 높고 향과 목 넘김이 좋은 술을 계속해서 권하고 있었다.
연천이 준비한, 취기가 빨리 오르는 술로 인해 운호의 얼굴은 금세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산에 와서 영웅과 식사까지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영웅담을 청해도 될는지요?”
“으하하하! 되지 암, 되고말고. 내 오랜만에 이리 말이 잘 통하는 이를 만나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구만. 으하하하!”
술기운으로 인해 운호의 목소리는 높았고, 얼굴은 벌겋게 번들거렸다.
“사제, 아직 대낮이네. 이제 그만 드시게.”
장문인이 운호를 말렸다.
“에이… 낮이면 어떻고, 밤이면 또 어떻수? 암튼…….”
운호가 불쾌한 낯으로 장문인에게 쏘아붙였다.
장문인은 연천을 의식해서 운호의 말을 조용히 넘겼다.
대신 연천이 장문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림의 영웅이신 수일검을 뵙고 너무 마음이 들떠서 그만…….”
“됐소, 됐소. 가주께서 왜 사과를 하시는 것이오. 세상은 나를 영웅이다 뭐다 하는데 이 화산에서는 내 노고를 알아주는 이 하나가 없소! 장문인이고 사형제들이고 그저 내 입을 틀어막지 못해서 안달이오.”
운호가 연천의 말을 막으며 투덜댔다.
장문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운호를 쳐다보았다.
듣기 좋은 말도 하루 이틀이었다.
화산에 있는 이들은 지난 십수 년간 운호의 똑같은 영웅담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듣고 또 들었다.
거기다 그 영웅담이라는 게 무공에 견식을 넓혀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뿐이었으니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운호가 섭섭한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다른 이들도 아니 장문인 자신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징글징글한 이야기였다.
운호는 자신을 영웅이라 칭하는 보은상회 가주와 그가 가지고 온 원설주가 아주 만족스러워서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사제! 이제 그만 하시게.”
운호의 술버릇을 아는 장문인은 낮은 목소리로 운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말렸다.
자꾸 자신을 말리는 장문인이 마음에 들지 않은 운호의 입꼬리 뒤틀렸다.
“장문 사형도 그렇소!! 다들 누구 덕분에 영웅의 문파 소리를 듣고 사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어찌 그리 내 공로를 덮으려고만 하시오!”
운호는 장문인뿐 아니라 자신의 영웅담을 막는 화산의 모든 인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미 다 아는 이야기고 여러 번 들은 것은 안다.
‘그래도, 몇 번 더 들으면 어때서?’
나쁜 얘기도 아니고 천마를 없앤 대단한 이야기인데 말이다.
‘그 일로 화산이 영웅의 문파라 칭송받는 걸 생각하면, 밤낮없이 그 이야기만 떠들어도 모자라겠구만… 배은망덕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사제… 사제가 과음하는 것이 걱정되어 그러지 내가 어찌 사제의 공을 몰라 그러겠나. 오늘은 그만하시는 게 좋겠네.”
운호의 버럭거리는 소리에도 장문인은 좋은 낯으로 그를 달랬다.
“그만하긴 뭘 그만한다는 말이오! 가주께서 가시고 나면 나를 또 푸대접할 게 아니오! 나는 무림의 영웅이라는 말이오! 영웅! 여기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을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가주를 보시오. 무림의 다른 이들은 내 얼굴 한번 보는 것을 이리도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을 아셔야지!”
연천은 침을 튀겨 가며 언성을 높이는 운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님을 해하고, 무림의 영웅이라 불리는 자였다.
어떤 사람인지 상상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었다.
연천의 상상 속 수일검은 묵직한 무인이었다.
스승님 못지않게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정파에 소속된 자의 사명감을 가지고 마교의 수장을 쳐낸 그런 자였다.
연천에게는 원수이지만, 무인 된 자로서 자신의 소신에 따라 마교 수장을 밴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연천도 자신의 신념대로 스승님의 원수를 처단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한데, 십수 년이 지난 일에 대한 자만심만으로 똘똘 뭉친 이 사내는 원수라고 쳐주려 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무인다운 기백이나 세월이 만들어 준 겸양, 의로운 모습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한심하고, 별 볼 일 없는 놈이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되지도 않은 놈이 스승님을 해했다는 것인지….’
수일검을 보면 볼수록, 그가 입을 열면 열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날 일에 대해 의문만 쌓여갔다.
연천은 알아야 했다.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하하… 수일검께서 하시는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오늘 수일검을 뵌 것은 제게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어서 영웅의 영웅담을 듣고 싶습니다.”
연천이 운호를 두둔하며 말했다.
“아하하하하, 역시 가주와는 말이 통합니다. 가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백 마디 말보다 더 확실하고 대단한 것을 보여드리리다.”
연천의 말에 한껏 들뜬 운호의 얼굴은 얼큰하게 술이 올라있었다.
“사제! 되었네, 그만하시게.”
장문인이 운호를 저지했다.
“아이… 장문 사형은 뭘 그리 말리기만 하십니까? 내가 그것을 못 보여 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가주도 그렇고 세상 사람들도 알 것은 알아야지요!”
장문인에게 쏘아붙이듯 말한 운호는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제자를 찾았다.
“이봐라, 청명아! 가서 그 상자를 가지고 오너라.”
운호가 불그레한 낯으로 그의 제자에게 말했다.
제자 청명이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장문인의 눈치를 보았다.
“어허! 스승이 가지고 오라는데 누구 눈치를 살피는 게야!”
운호가 제자를 나무랐다.
청명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장문인은 손님도 와계시는데, 고집스럽게 제자를 재촉하는 운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청명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운호의 제자 청명이 식당 밖으로 나갔다.
장문인이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주께 미안합니다. 저 사제가 가주 덕분에 기분이 좋아 오늘 좀 과한 것 같소이다.”
“괜찮습…….”
운호가 연천의 말을 뚝 자르며 끼어들었다.
“과하긴 무엇이 과하오? 가주! 내 오늘 가주께 평생 잊지 못할 것을 보여드리리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은상회의 가주이고, 앞으로 우리와 가족이 될 것이니 특별히 보여주는 것이오. 장문 사형이 이것을 내보이는 것을 싫어해서 다른 이에게는 보여 준 적도 거의 없소.”
운호의 말에 장문인이 낮게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
연천은 붉어진 얼굴로 침을 튀겨 가며 말하는 운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천마를 없앤 그 날, 무당의 태청검과 소림의 금월대사하고, 뭐 세 문파의 제자들도 좀 있긴 했소. 하지만 진짜 혈영천마를 해치운 것은 바로 나! 이 수일검이라는 말이오. 내가 그 증좌를 보여주겠소!”
운호가 자신의 앞가슴을 세게 치며, 식당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
운호를 보는 연천의 뱃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내 자랑인데 장문 사형은 어찌 그리 말리기만 하는지 모르겠소. 어! 저기 오는구먼. 청명아! 어서, 어서 그 상자를 이리 다오.”
운호가 묵직한 상자를 품에 안고 오는 제자를 재촉했다.
청명이 가까이 오자 운호가 빼앗듯이 상자를 받아 품에 안았다.
“이 안에 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내가 그 악독한 천마를 없앴다는 증좌이외다. 가주! 어디 가서 소문내지 마시오. 이것을 구경하겠다고 사람들이 화산으로 밀어닥치면 내가 피곤해서 말이오. 아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