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수일검】
‘아잇… 어쩌지?’
걸화는 교준까지 들어와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끼며, 계속 통곡만 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하도 바닥을 쳐댔더니 손바닥도 아팠다.
이미 아홉 번 절을 했지만, 까먹은 척하고 다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신의는 또 절을 하는 걸화를 보며, 마음이 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신의는 기다렸다.
걸화가 적당히 끝내기를.
걸화는 계속 절을 했다.
신의가 말려주기를 바라며.
걸화가 얼마나 절을 해댔는지 모른다.
아무리 기다려도 걸화의 절이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이 보이지가 않자, 신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 진정하거라, 무릇 의원은 어떤 일에도 감정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느니라. 굳건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네에…….”
걸화가 이때다 싶어 그만 절을 멈추었다.
다리가 뻣뻣해져 왔다.
‘아… 다리야……. 빨리 좀 말려주시지… 아고…….’
신의가 입을 열었다.
“너는 앞으로 의원이 될 것이다. 의원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야.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환자가 돈이 있건 없건, 어디에 있건 가려서는 아니 된다.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환자만을 위해 살아야 하느니라.”
신의가 제자를 들이며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었다.
의원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의의 제자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할까 봐.
“네. 신의… 아니, 스승님.”
걸화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도 곡을 하고, 절을 해댔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 * *
그날 오후.
“교준아! 채비하거라.”
신의가 말했다.
“네.”
교준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짧게 대답했다.
“스승님! 어디 가세요?”
걸화가 출타를 할 준비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물었다.
“상회 분점으로 갈 것이야.”
“그래요? 저도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걸화가 서둘러 자신의 방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너는 가지 않는다.”
“왜요?”
“너는 시간이 있을 때 의서를 읽고 약재에 대해 공부하거라. 모양과 이름, 효능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하나 향을 맡고 맛을 음미해 보아라. 가루를 내어놓아도, 즙을 내어도 어떤 변화를 주어도 그것이 어떤 약재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신의가 묵직하게 말했다.
신의가 보은상회로 가는 것은 의원으로서 가는 것이 아니었다.
혈영천마를 추종하는 자로서 가는 것이었다.
걸화를 데려갈 수 없었다.
“네… 형란 소저도 여기 있던데 가주님 시중들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걸화가 싹싹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신의의 눈가에 주름이 잡히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가주님을 생각해서 같이 가려고 한 것이구먼…….’
걸화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상회에도 시녀는 많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걸화가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가주님도 이리로 오실 것이다. 의약당에 소홀함이 없도록 채비하여 놓거라.”
“네…….”
걸화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신의는 교준과 함께 연천이 있는 보은상회의 분점으로 떠났다.
걸화는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 * *
걸화는 신의의 방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신의의 방, 책꽂이 아래에는 수십 권의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걸화는 책을 꼼꼼히 읽으며, 필요한 내용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심각한 얼굴로 서책을 읽어 내리고, 일부분을 옮겨 적기를 반복했다.
며칠 뒤엔 적어 내린 종이를 들고서 약재고를 뒤져댔다.
약재 하나를 들고 오랫동안 살펴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살짝 떼어 맛을 보기도 했다.
그다음 날은 산을 탔다.
연천의 약을 위해 약수를 떠 오던 산은 보은상회에 소속된 곳이라, 깊고 넓은 산에는 산 짐승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걸화는 꼬질꼬질한 얼굴로 산을 헤집었다.
배가 고프면 싸가지고 간 만두와 말린 고기로 대충 허기를 때웠다.
작은 산짐승이 천지로 지나다녔지만, 꾹 참았다.
바닥에만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열심히 캐내었다.
산을 내려오면서 약수도 떠 왔다.
의약당으로 돌아온 걸화는 약재들의 무게를 세심하게 쟀다.
진지한 얼굴로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약재 하나하나를 약수에 깨끗이 씻어 달이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지키고 서서 약을 저으며 고았다.
걸화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 * *
복건의 보은상회 분점으로 내려온 연천은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화산에서 보은상회 가주를 초대했기에, 내일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무림의 문파들은 하나같이 폐쇄적이었다.
겨우 첩자를 넣어도 정보를 캐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번에 연천이 가는 일이 잘 된다면, 화산과 더 돈독해질 수 있었다.
화산에서 보은상회와 연천을 믿는다면, 첩자를 넣는 것도 정보를 캐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다.
속내 시커먼 화산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다리던 일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화산에 가면 장로인 수일검 운호를 만나게 될 것이다.
무림의 영웅이자, 스승님을 해한 그자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태연하게 잘할 수 있을지….
책임감이란 것이 무겁게 연천을 눌렀다.
“뭘 이리 다 오셨습니까?”
연천이 무명촌의 촌장인 모충일과 보은상회의 총관 화칙, 신의 황임을 한 명씩 돌아보며 말했다.
화산에 가는 연천이 걱정되어 온 것이었다.
“내일 출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모충일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천은 편안하게 말했다.
“화산입니다. 천마께 해를 가한 그 화산입니다.”
화칙의 얼굴도 묵직했다.
“알고 있습니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이리 초대까지 해주니 잘 되었지요. 혈영천마의 제자가 아닌 보은상회의 가주로 가는 것이니 걱정들 마십시오.”
연천의 말에도 모충일과 화칙, 신의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연천은 그들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은 연천이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의연하게 잘해 내고 싶었다.
보은상회의 크고 화려한 마차에는 푸른 깃발이 펄럭였다.
다리가 길고 근육이 잘 잡힌 여섯 마리의 말은 커다란 마차를 가볍게 끌며 앞으로 나아갔고, 주위를 에워싼 호위들은 마차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연천이 마차의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말을 탄 호위들이 눈에 들어왔다.
털이 매끄러운 말을 탄 교준이 마차 옆에 붙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살수로 살아온 그의 반듯한 이목구비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걸화를 보며 부끄러운 듯 웃던 사내와 전혀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흐음…….”
연천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화산이 자리 잡은 섬서에는 매화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새하얀 꽃잎을 뒤집어쓴 화산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연천은 마차 밖으로 흩날리는 꽃잎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릿한 매화향이 폐부로 스며들었다.
향기를 머금은 꽃잎이 흩날리는 사이, 때 낀 걸화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것이 매화의 향이로구나…….’
걸화가 짱돌로 산적을 괴롭히던 그 날의 향기와 같았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 그날도 이맘때쯤이었나보다.
연천은 머리를 흔들어 생각들을 떨쳐냈다.
창에 난 장막을 거칠게 내리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보은상회의 커다란 마차가 멈추었다.
높은 산에서 부는 바람이 보은상회의 푸른 깃발을 거세게 흔들어댔다.
정문 앞에는 화산의 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연천이 마차에서 내리자, 한 무리의 하얀 무복을 입은 자들 앞으로, 나이가 지긋한 사내가 나와 인사했다.
“가주님,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화산의 장문인 운은이라고 합니다.”
백발이 성성한 그의 인상은 푸근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은상회의 백연천입니다.”
연천도 화산의 장문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장로 운호라고 합니다.”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사내가 인사했다.
연천의 얼굴이 그에게 박혔다.
“수일검 운호… 맞습니까?”
연천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하하하, 세상에는 내 이름보다 수일검이라는 별호가 더 유명하긴 하지요. 내가 그 수일검이 맞으외다.”
수일검 운호가 거만하게 배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혀 웃었다.
“영웅을 이리 뵙다니 영광입니다.”
연천의 말과 다르게 그의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니 내가 말리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어찌 영웅이 되려고 한 일이겠소? 정파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을! 하하하하.”
운호의 크게 벌린 입안에 목젖이 떨렸다.
연천의 눈은 그의 얼굴 깊숙이 박혀, 운호 뒤에 인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화산의 다른 제자들과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눈만은 운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연천을 장문인의 방으로 안내했다.
연천은 매화 꽃잎이 동동 뜬 맑은 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간 가주께서 서역에서 돌아오시어 많은 문파를 지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지원이라니요? 그저 그 문파에서 훌륭한 무인들을 보은상회로 보내어 주시기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한 것뿐입니다.”
연천이 겸손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인 몇에 그리 큰 비용을요?”
장문인이 대꾸했다.
화산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에서도 중원에 자리 잡은 여러 상회로, 표국으로 표사나 무인을 지원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에 따른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았다.
보은상회에서 지불하는 금액은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 있었다.
그랬기에, 여러 문파에서 보은상회로 제자들을 보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젊은 가주는 인심이 후했기에, 가까이 지내려는 곳이 줄을 이었다.
“그저 무인 몇이 아닌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을 수련한 자들이지요. 문파의 그런 귀한 제자가 우리 상회에 와서 한솥밥을 먹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 상회와 그 문파가 한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가족과 같은 문파에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겠습니까?”
연천의 막힘없는 목소리는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