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걸화가 가지고 나온 비도를 교준에게 보였다.
“쯧쯧… 이리 관리를 못하셔야 되겠습니까?”
교준이 비도를 보고 한 말이었다.
“뭐가 잘못됐어요? 매일 닦았는데.”
걸화가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이리 가까이 와보십시오.”
걸화가 교준 가까이 다가갔다.
교준이 뺨을 붉히며 비도를 앞으로 들었다.
“여기 보입니까? 비도의 날이 날렵하지 못하고 울퉁불퉁 한 것이요.”
교준이 손가락으로 비도의 날을 가리키며 말했다.
걸화가 얼굴을 교준에게 더욱 가까이하고 교준이 보는 방향으로 비도를 쳐다보았다.
교준의 말대로 비도의 날이 반듯하지 못했다.
“아… 정말 그러네요.”
“이것도 보십시오.”
교준이 또 다른 비도를 자신의 얼굴 앞에 들어 올렸다.
걸화가 교준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여 교준과 같은 방향으로 비도를 보려고 애를 썼다.
“이것은 이가 나간 것이 보입니까?”
걸화가 교준이 가리킨 쪽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아! 보인다, 보여! 맞네.”
걸화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쳤다.
“무엇들 하는 게냐?”
묵직하면서 불쾌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걸화와 교준이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신의와 연천이 서 있었다.
걸화와 교준을 보는 연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교준이 일어서서 연천에게 인사를 했다.
“교준아! 가주께서 보름 뒤, 화산에 가실 때 너를 데려가실 것이다. 그리 알고 채비하거라.”
신의의 말에 걸화가 연천을 쏘아보았다.
‘교준 대협은 왜? 주변에 그리도 사내가 많더구만, 왜 교준 대협을?’
“교준 대협이 가면, 저도 같이 갈래요!”
걸화가 교준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연천의 속에 불이 확 번지는 것처럼 화가 일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였다.
다들 자신의 말이라면 껌뻑 넘어갈 듯 따르는데, 제멋대로인 걸화를 보니 화가 나는 것인가?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어서 긴장을 한 탓인가?
걸화가 여인인 것을 속여서?
그것도 아니면… 교준이와 걸화가 각별해 보여서?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불쾌한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눈이 매섭게 올라갔다.
걸화도 연천을 쏘아 보았다.
날 선 눈으로 걸화를 직시하던 연천은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의약당을 벗어났다.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낼 명분도 없고, 속에서 이는 못마땅함의 원인을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신의는 연천과 걸화를 번갈아 보다 연천을 쫓아갔다.
교준은 멀어지는 연천과 신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걸화는 걸화대로 성질이 났다.
자신이 여인인 것이 들통났으니, 이제 예전의 백연천을 되찾기는 글렀다.
한데, 자기 앞에서 대놓고 교준 대협을 데리고 가려 하다니!!
“이씨…….”
걸화가 죄 없는 교준을 흘겨보았다.
연천이 자신에게 보냈던 다정한 눈빛과 따뜻한 말을 교준에게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쿵쾅거리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의약당 마당에 홀로 남은 교준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날 밤, 연천은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이 무슨 어리석은 생각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걸아가 사라진 나흘 내내 속으로 빌었다.
살아만 돌아와 달라고.
그리고, 다짐했다.
나타나기만 하면 무공도 가르쳐주고, 예전처럼 돌보아주겠다고.
한데… 돌아온 배걸아가 여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찌 대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교준과 각별해 보이는데 왜 그리 화가 나는 것인지.
함께 할 수 없다며 밀어낸 것은 연천, 자신이었다.
‘그리 밀어낸 것은 그 아이가 잘 살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던가? 사내를 만날 수도 있는 게지……. 하지만 하필 그것이 교준이란 말이냐? 그래, 교준이… 좋은 아이지…….’
연천은 어수선한 감정이 들끓어,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다음날, 연천은 복건에 있는 보은상회의 분점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새벽에 눈을 뜬 걸화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 맞다. 약수 뜨러는 당분간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지.’
신의가 다친 걸화를 생각해 다 나을 때까지 배려해 주었다.
한데 걸화의 몸이 알아서 일어나졌다.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걸화는 저벅저벅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응?’
걸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떠 온 약수로 약을 달이고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걸화가 깜짝 놀라 신의의 방으로 달려갔다.
“신의님! 신의님! 늦었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약을 달여야지요. 약수는 떠 왔습니까?”
걸화가 요란스럽게 신의를 깨웠다.
신의는 자다가 깨어 요란을 떨어대는 걸화를 쳐다보았다.
“가주님은 상회로 가셨다. 탕약은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 탕약은 꾸준히 먹어야 한다면서요? 안 먹으면 효과가 줄어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의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리 기특한지고… 후기지수 모임이 있을 때부터 이미 드시지 않고 계셨다. 재료도 떨어져 길어야 하루 이틀 양밖에 남지 않았어. 하루 이틀 더 드시면 좋았겠지만, 이번에는 그걸로 그만 드시는 것으로 하자.”
“안 돼요. 제가 상회로 가서 남은 것이라도 달여서 드릴게요.”
‘아잇… 상회에 가서 뭘 하려고… 내가 가서 지켜봐야 하는데…….’
‘저 아이를 들이기를 잘하였구나, 잘하였어.’
신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신의는 걸화의 이런 면이 좋았다.
힘들고 귀찮아도 환자를 위해 노력했다.
연천을 살뜰히 보살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보은장의 식솔들에게 엉뚱한 약을 먹인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보은장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를 치료해 주어 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환자를 고치겠다는 의원의 사명 하나로 그리한 것이다.
그것이 신의가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었기에, 걸화가 좋게만 보였다.
“몸은 좀 어떠하냐?”
신의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구나. 탕약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그만 나가보아라.”
신의의 두 눈이 활처럼 휘어져서는 걸화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신의님.”
걸화는 이를 꽉 깨물고 신의에게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 쯧!’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걸아야!”
신의가 자신의 방을 나서는 걸화를 불렀다.
걸화가 여인인 것을 모두 알게 되었지만, 신의는 여전히 그녀를 걸아라고 불렀다.
그녀가 개방 방주의 여식, 배걸화인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네! 신의님!”
걸화가 몸을 돌려 기대에 찬 얼굴로 신의를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어 보은상회 분점으로 가는 것을 허락할지도 모르니.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너라.”
신의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묵직했다.
‘마음을 정한지는 좀 되었으니, 더 미룰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구나.’
“네!”
걸화의 대답은 흥에 겨웠다.
그녀는 신의의 심각한 목소리에, 자신을 연천이 있는 보은상회로 보내 중요한 일을 시키거나 심부름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다시 빗었다.
옷도 갈아입고 신의의 방으로 들었다.
신의가 반듯하게 앉아, 걸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걸화가 기대에 찬 얼굴로 신의 앞에 앉았다.
“걸아야! 오늘부터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거라.”
신의가 엄숙하게 말했다.
신의에게는 이미 네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중원 곳곳에서 의술을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계자는 없었다.
걸화 하나만, 딱 그 아이 하나만 더 가르쳐보고 결정을 하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네에?”
신의가 자신을 보은상회로 보내주지는 않을까 하고 기대하던 걸화에게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너는 오늘부터 내 제자다.”
신의의 얼굴은 엄중했다.
걸화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던 걸화가 천천히 일어났다.
서책에서 무림 영웅이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장면을 본 것이 떠올랐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아홉 번 절을 하던 모습이 말이다.
‘울어야 하나?’
걸화가 눈을 찔끔거렸다.
눈물이 나올 턱이 없었다.
슬그머니 손등을 꼬집으며, 천천히 절을 했다.
입술을 깨물고, 슬픈 생각을 떠올려도 보아도 이슬 비슷한 것도 비치지 않았다.
아홉 번의 절을 끝내어도 눈물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걸화는 어정쩡하게 얼굴을 구기고 신의 앞에 앉았다.
“얼굴이 왜 그런 것이냐?”
신의가 걸화를 보며 물었다.
신의의 제자가 되었는데 기뻐서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저리 표정을 구기니 말이다.
“자꾸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만…….”
걸화가 눈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으흑… 으으으윽… 아이고… 눈물이 나라… 으으으응… 아이고… 자꾸 눈물이…….”
걸화는 나오는 것도 없는 눈을 비비며, 흐느껴댔다.
신의가 흐뭇하게 걸화를 바라보았다.
신의의 제자가 되어 감격에 겨워 보이는 제자를 말이다.
“으으응… 으응…….”
걸화가 입으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신의의 눈치를 보았다.
신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걸화를 보고 있었다.
‘더 울어야 되나?’
“으으아앙… 아아앙… 으아아아… 눈물이… 으아아… 아이고… 아이고오오.”
신의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고 걸화는 더 크게 소리 내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아주 곡소리를 내며 바닥을 두들겨댔다.
신의의 제자가 되면서 눈물을 흘린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저리 바닥을 치며 오열을 해대는 제자는 지금껏 없었다.
‘역시… 섬세한 만큼 감정도 풍부하구나… 저것을 말려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벌컥―
“신의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교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크게 통곡을 해대는 소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들어온 것이었다.
교준의 눈에, 앉아서 걸화를 보고 있는 신의와 그 앞에서 바닥을 치며 울고 있는 걸화가 들어왔다.
교준은 걸화를 말리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걸화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자신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의도 교준에게 나가라고 말하지 않기에, 구석에 멀뚱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