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신의와 교준은 눈앞의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걸화는 손에 잡히는 음식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고, 들어간 음식은 곧장 사라졌다.
신의와 교준은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몸은 아프지 않은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차마 걸화를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끄어어어억―”
긴 트림을 끝으로 걸화의 식사가 끝났다.
뽈록 나온 배를 슬슬 문지르는 걸화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신의는 잠자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소저! 괜찮아요? 팔에 상처가 깊어 보이는데…….”
걸화가 걱정된 교준이 먼저 물었다.
“아! 맞다! 맞아요. 나 아파요. 여기 봐요, 여기. 여기도, 여기도 긁혔어요. 아파요.”
걸화는 자신이 다친 것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팔과 다리 어깨, 목에 긁힌 상처까지 골고루 보여주었다.
새하얀 걸화의 몸 곳곳에 진한 갈색의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그것을 본 교준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곧 터져버릴 듯 시뻘겋게 변했다.
“일단 씻고 상처를 치료하자꾸나. 이야기는 그 후에 들어도 늦지 않을 듯하다.”
상처를 본 신의의 말에 걸화가 일어났다.
* * *
“가주님, 부르셨습니까?”
연천의 방에 들어온 신의가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물었다.
“네, 차 한잔하시지요.”
연천의 말에, 형란이 차를 내어와 연천과 신의 앞에 내어놓고 밖으로 나갔다.
형란이 나가자, 연천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좀 어떻습니까?”
연천이 걸화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습니다. 긁힌 상처가 깊기는 하나 시일이 지나면 좋아질 겁니다.”
연천이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다.
“그 아이는 어디서 만나 데려오셨습니까?”
신의를 부른 이유가 이것이었다.
배걸아라는 아이가, 그 아이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배걸아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여인인 것도 알지 못했을 줄이야…….’
“개방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개방 방주의 막내 여식입니다.”
“여식이라… 여식… 여식이었군요……. 그 아이, 이름은 무엇입니까?”
연천이 혼잣말처럼 되뇌다, 이어 물었다.
“배걸화라고 합니다.”
연천이 생각에 잠겨 턱을 문질렀다.
가족이다 아우다… 생각했던 아이였는데, 이제 보니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흐음… 그 아이를 데려오신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음… 그러니깐…….”
신의가 그날 일을 연천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개방에 영단을 주러 갔다가 뒤통수가 깨진 그날 일을 말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신의의 이야기를 듣던 연천은 기가 찼다.
“허! 신의의 뒤통수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떻게 신의의 머리를 깰 생각까지 한 것인지….
“그때 깨진 곳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습니다.”
신의가 뒤통수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
말문이 막혔다.
신의의 머리를 깬 걸화의 행동도 기가 막혔고, 그런 걸화를 가르쳐보겠다 데려온 신의에게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차에 약초와 꽃잎을 얼마나 절묘하게 섞어 놓았던지 수면제가 아니라 독이 들어있어도 몰랐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 아이에게 물어보니 느낌대로 넣었다더군요. 약초에 대해 느끼는 감각이 뛰어나고, 기감 또한 발달해 있어 맥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깊습니다. 가르쳐보고 싶어 데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그렇습니까? 순순히 따라온다고 했나 봅니다.”
연천이 아는 배걸아는 관심이 없는 일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무리 신의에게 의술을 배우는 일이라도 싫으면 절대 하지 않을 아이였다.
“내 머리를 깬 것이 미안한 것도 있지만 그 아이가 자신의 큰 오라비에게 줄 영약을 훔쳐 먹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미안하여 자기가 영단을 만들어 갚겠다고 하더이다. 걱정될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아이지요.”
“영단을 훔쳐…….”
아이가 제멋대로인 면이 있긴 했지만, 최소한의 하지 말아야 할 일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체 연천이 보지 못한 그 2년 사이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배걸아라는 아이가 더욱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영단입니다. 그날 그것을 가져다주러 개방에 들른 것이지요. 그 아이는 자기대로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누구 복수를 위해 영친왕을 죽이려 했다 하더이다.”
연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며, 미간에 내 천자가 새겨졌다.
“무공이라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느는 것이겠습니까? 그 아이는 영단만 먹으면 무공이 확 늘어서 영친왕의 목을 벨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 머리를 깨고 영단을 훔쳐 달아났던 것이지요.”
“하아… 그렇군요…….”
연천이 미지근하게 반응하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가슴이 아프게 저려왔다.
걸화가 영친왕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자신 때문일 것이다.
‘그리 사라졌으니, 영친왕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연천이 그리 생각하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자신을 찾지 않기를, 형이라는 사람과 잘 살기를 바랐었다.
한데, 그런 일을 꾸몄다니…….
연천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은 척했더니 영친왕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덤비고, 겨우 떼어놨더니 신의와 함께 왔다.
모르는 척했더니 여장을 하고 후기지수 모임에 쫓아왔다.
“흐음…….”
연천이 침음을 흘렸다.
‘그래, 배걸아라는 아이가 그랬지……. 이제는 배걸화라고 불러야 하나…….’
“그 아이는 왜 그리 궁금하십니까?”
신의가 물었다.
“그저 궁금했습니다……. 그럼 영단 덕분에 그 아이의 내공이 많이 증가하였겠군요.”
“아닙니다. 그 영단은 개방의 첫째의 상태에 맞추어 만든 것입니다. 그저 먹는다고 효과가 나타나기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첫째에 비해 내력도 부족하니 영단 효력의 일부도 흡수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저 아까운 영단 하나를 버렸지요…….”
“그것이 그리됩니까?”
“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요.”
“…….”
연천이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향을 맡고 차를 넘겼다.
그저 차를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천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얽혔다.
그런 연천을 보고 신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산에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보름 뒤입니다.”
조심스러운 신의와 다르게 연천은 편하게 대꾸했다.
“조심하십시오.”
신의가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그저 보은상회의 가주로 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천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작게 웃어주었다.
“교준이를 데리고 가십시오.”
신의는 교준이라면 연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말했다.
“교준이를요?”
연천이 처음 무명촌으로 와서 막 가주가 되었을 때, 모충일이 살수대를 보여주었다.
그중 호위를 고르라고 말이다.
그때, 연천이 고른 사람이 교준이었다.
1년 동안 연천을 제일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연천이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교준이기도 했다.
신의는 연천이 오고, 1년을 보은장에서 연천만을 보살폈다.
신의가 무명촌에 있는 것을 어찌 알고 와달라고 부탁하는 곳도 많았건만, 연천 옆에서만 버텼다.
그는 만인의 신의가 아니던가.
환자를 돌보러 가야 했다.
그런데도 신의는 무명촌에서 뭉그적대며 중원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고 있지 않으면 연천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듯이, 연천의 주변을 떠나지 못했다.
연천은 자신 때문에 신의가 의원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그렇기에 신의를 잘 설득해서 무명촌 밖으로 내보냈다.
그때, 자신이 아끼던 교준을 호위로 내어준 것이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나이 지긋한 신의의 호위는 쉴 수 있었다.
연천의 머릿속에 걸화를 보고 미소 짓던 교준이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교준의 표정이었다.
연천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하겠습니다.”
“교준이를 불러올까요?”
“음… 바람도 쐴 겸 나가 보겠습니다. 교준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함께 가시지요. 의약당이 아니면 연무장에 있을 것입니다.”
* * *
걸화는 의약당 앞마당을 무료한 얼굴로 어슬렁거렸다.
팔이 아직 다 낫지 않았기에 뭔가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교준은 앞마당에서 말린 약재를 썰고 있었다.
교준이 호위이기는 했지만, 신의와 함께 다니다 보니 약재 정리나 의약당 일도 도왔다.
지금은 걸화가 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소저 나오셨어요?”
교준은 걸화에게 아는 체를 했지만,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네…….”
지루한 걸화가 교준에게 다가가 그 주위를 얼쩡거렸다.
“교준 대협! 대협은 왜 맨날 신의님 옆에 있어요?”
걸화의 목소리는 언제 죽다 살아왔냐는 듯 낭창했다.
걸화는 더 이상 남장을 하지 않았다.
이미 보은장과 보은상회의 전 식구들이 걸화가 여인인 것을 아는데, 남장을 하는 것도 우스웠다.
여인들이 입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팔과 다리는 깨끗한 천을 둘둘 말고 있었다.
“저는 신의님의 호위입니다.”
교준이 약재를 썰며, 덤덤하게 답했다.
“호위요? 아! 그래서 무공을 잘하는구나?”
무료하게 할 일을 찾던 걸화의 눈이 반짝였다.
“뭐…….”
“우와… 그러면 나 무공 좀 가르쳐주면 안 돼요? 난 내가 나름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형편없을지 몰랐어요.”
이번에 별 볼일 없이 산을 떠도는 놈들에게 쫓기며 느낀 것이었다.
“소저도 무공을 익힙니까?”
보은장에서는 모두 걸화를 의원이라고 불렀지만, 교준만 소저라고 불렀다.
처음 입에 붙은 호칭이 잘 바뀌지 않았다.
“음… 비도술 연습을 좀 하긴 했어요.”
어린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겸손한 답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가르쳐드리지요.”
신의가 보은장에 있으면 교준은 의약당 일을 돕거나 수련이나 할 뿐, 그다지 할 일도 없었다.
“정말이죠? 잠깐만요. 비도 좀 가지고 올게요.”
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걸화가 비도 다섯 개를 가지고 나왔다.
연천이 사준 열 개의 비도를 산적에게 쫓기면서 전부 날렸다.
그중 절반을 보은상회 무인들이 걸화를 찾는 중에 발견해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