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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18화 (118/230)

118화

팔과 다리에 힘을 주어도, 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팔과 다리가 절벽에 쓸리면서, 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걸화의 살갗이 벗겨지며 배어 나온 핏물이 절벽에 기이한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는 두려움에 아픈지도 몰랐다.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쿵―

끝이 없을 듯 흘러내리던 걸화는 엉덩이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히며 멈추었다.

“아야…….”

엉덩이를 슬슬 문질렀다.

절벽에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로 튀어나온 너럭바위가 박혀있었다.

걸화는 그곳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멈춘 것이었다.

기운 빠진 걸화가 털썩 드러누웠다.

다리가 바위 밖으로 삐져나와 허공에 흔들거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는 바람만 지나다닐 뿐이었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시야의 끝에 절벽의 꼭대기가 보였다.

절벽에는 걸화가 만든 핏자국이 일자로 쭉 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양쪽 손바닥 끝부터 겨드랑이까지 시뻘겋게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파…….”

겨드랑이를 벌려 몸에서 팔을 떼어냈지만, 찌르르한 통증이 밀려왔다.

걸화는 치맛자락을 찢어 양쪽 팔을 감쌌다.

쓸려나간 종아리와 허벅지도 옷자락으로 감았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굶어 죽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걸화는 있는 힘껏 손을 뻗고, 발뒤꿈치를 할 수 있는 만큼 들었다.

오른손에 돌멩이를 들어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절벽에 매달려 자라난 나무의 작은 뿌리 조각이 돌에 짓이겨 떨어져 나갔다.

털썩―

“아고, 배고파라.”

걸화는 한 뺨 정도 되는 나무뿌리의 껍질을 치아로 대충 벗겨내고 질겅질겅 씹었다.

씹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휴…….”

땅이 꺼질까 무섭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먹고 또 해보자.”

얼마 되지도 않는, 나무뿌리를 입안으로 쑤셔 넣고 손바닥을 탈탈 털었다.

“후!”

위를 바라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양쪽 손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은 걸화는 팔과 다리에 공력을 넣어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고 절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아!”

발을 디뎠던 돌부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양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숨을 내쉬고 다시 발 디딜 곳을 찾았다.

침착하게 절벽을 오르던 걸화의 숨소리가 어느 순간 심상치 않게 변했다.

“하아! 하아! 하아!”

그녀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꼭대기까지 한 장 정도 남은 지점에서 걸화의 몸이 힘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단단하게 옷으로 감싼 팔과 다리가 낭떠러지 절벽을 긁으며 먼지가 날렸다.

“으아아아악!!”

쿵―

주르륵 미끄러지던 몸뚱이가 너럭바위에 부딪히며 멈추었다.

“아잇…….”

짜증스럽게 바닥에 드러누웠다.

절벽 아래로 내려온 지 나흘째였다.

매일 절벽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미끄러져 내려오는 지점이 점차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 * *

모충일이 연천을 위해 꾸며 놓은 그의 전각은 아름다웠다.

앞마당의 담을 따라 늘어선 키 작은 나무에 탐스러운 열매가 조랑조랑 매달려 있고, 관목들은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다복하게 자리 잡은 꽃무리는 알싸한 향기를 흘려 색이 고운 나비를 끌어들였다.

연천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꽃에 홀린 나비를 따라 푸른 나무를 따라 걸었다.

보은장 전체를 작은 숲처럼 보기 좋게 꾸며놓아, 그런대로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연천에게는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연천은 자신의 전각 앞을 왔다 갔다… 초조하게 걸었다.

늘 입고 있는 비단 장포가 아닌 무복 차림이었다.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제발… 살아서 돌아만 오거라……. 내가 잘못하였다. 내가 다 잘못했어…….’

연천은 울컥울컥 넘어오는 감정을 짓씹으며, 안절부절못했다.

교준이 전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연천이 급히 다가갔다.

“어찌 되었느냐?”

교준이 무언가를 꺼내 연천에게 내밀었다.

연천의 미간에 깊이 파였다.

교준이 내민 것은 장에서 흔하게 구입할 수 있는 비도였다.

얼마나 마구 사용하였는지, 오래된 싸구려 비도의 날은 형편없이 상해 있었다.

날은 갈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닦아댔는지, 손때 묻은 비도가 반질반질했다.

연천은 그 비도의 주인이 걸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알만했다.

날을 갈아야 하는 것을 미처 가르쳐주지 못했다.

처음 연천이 알려준 대로 끊임없이 천으로만 닦아댔을 게다.

비도의 꼴이 딱 그랬다.

연천이 조심스럽게 비도를 받아 들었다.

“…어디서 찾았느냐?”

속에서 뭔가가 복받치는 연천의 질문은 느릿했다.

“태광산입니다. 번견을 풀었습니다.”

“나도 가겠다.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은 모두 태광산으로 오라일러라.”

보은상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표사와 무인의 숫자는 상당했다.

그들은 보은장에서부터 퍼져, 배걸아를 찾고 있었다.

신의에게 휴가를 얻은 걸아는 갑자기 하늘로 솟은 것처럼,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 만에 그 흔적이 태광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연천은 보은장에서 멀지 않은 태광산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안력을 높여 주위를 살피며, 산을 올랐다.

걸아는 기척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번견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급히 뛰어간 곳에는 찢어진 옷자락이 키 작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번견이 다시 달렸다.

연천도 뛰었다.

피 묻은 비도를 발견한 연천의 얼굴이 굳었다.

비도를 든 손이 흔들렸다.

번견은 잠시 제자리에서 킁킁거리더니 다시 내달렸다.

지금까지의 흔적이나 번견의 반응으로 보아서 방향은 위쪽이었다.

연천과 번견은 쉬지 않고 산 정상을 향해 달렸다. 한참을 뛰던 연천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앞이 탁 트여 멀리 자리 잡은 산자락과 작은 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절벽 아래에서 위로 바람이 치불었다.

연천의 영웅건 자락이 바람결에 요란하게 떨어댔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연천에게 생긴 유일한 가족이자 아우가 걸아였다.

매달리던 아이를 자신이 밀어냈다.

그 아이를 위해 그랬는데, 그 아이가 잘못되었다.

자신 때문에 그리되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서, 자신이 밀어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휘청거렸다.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아프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쿵―

연천이 고개를 들었다.

환청이라 하기엔 너무 확실한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절벽 아래를, 안력을 돋우어 내려다보았다.

절벽에서 네댓 장쯤 아래, 불룩 튀어나온 바위에 주저앉아있는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연천은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내공을 실은 발바닥이 절벽에 척척 붙어 평지를 걷는 것처럼 걷더니, 이내 튀어나온 바위에 도착했다.

워낙 좁은 곳이라 연천이 내려서자 자리가 꽉 찬 것 같았다.

주저앉아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어 연천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연천의 가슴팍에 온몸을 던졌다.

연천이 휘청대다 뒷발에 힘을 실었다.

바위 끝에 아슬아슬하게 멈춘 발밑으로 흙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이잉…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걸화가 연천의 가슴에 얼굴을 문질러댔다.

연천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먼지가 묻고 때가 탔지만 밝은색의 비단옷과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거뭇거뭇하게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는 하였지만, 그윽하게 한 눈 화장과 옆으로 번진 붉은 연지.

공도상회의 설화 소저였다.

그런데, 그 소저가 하는 짓은 딱 걸아였다.

‘설화 소저가 아닌가?’

설화 소저와 걸아를 절반쯤 섞어 놓은 얼굴이었다.

‘아니, 걸아의 얼굴인가?’

연천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걸화를 내려다보았다.

걸화가 고개를 들어 연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님… 아니 가주님 여기 피 났어요.”

걸화가 꼬질꼬질한 손가락으로 연천의 아랫입술을 가리켰다.

연천이 걸화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당신… 누구요?”

목소리가 떨렸다.

“형님? 아니… 가주님… 머리라도 다쳤어요? 아니! 또 나 버리고 가려고 이제 아예 모른 척하기로 한 거예요?”

걸화가 양손으로 연천을 꼭 붙들며 말을 이었다.

“안 돼요, 못 가요. 여기서 나 버리고 가면 절대 안 돼요. 나 진짜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이잉…….”

연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혼란한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절벽에서 작은 돌과 먼지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더니, 교준이 좁은 공간에 안착했다.

“소저! 괜찮아요?”

교준이 걸화에게 물었다.

“대협! 나 배고파 죽겠어요.”

걸화가 연천을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징징대는 소리를 해댔다.

설핏한 미소가 담긴 교준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걱정과 안도와 부끄러움…….

교준에게 향한 연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의 얼굴에 감정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연천이 처음 본 교준의 표정이었다.

“얼른 올라가세요.”

교준이 걸화에게 손을 내밀자, 걸화는 연천을 잡은 팔을 풀고 냉큼 교준의 손을 잡았다.

교준이 한 팔로 걸화의 허리를 둘렀다.

그리고, 두 다리와 한쪽 팔에 공력을 실어 절벽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절벽 아래의 작은 바위에 바람이 불었다.

연천의 영웅건 자락과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는 얼빠진 표정으로 걸화와 교준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거두지 못했다.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절벽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더니, 연천의 호위무사 곽림이 내려왔다.

“가주님, 그만 돌아가시지요. 교준이 의원을 찾아 보은상회로 향했습니다.”

연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호위를 바라보았다.

연천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곽림이 멍한 연천에게 급하게 다가갔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가주님!”

연천의 눈은 곽림에게 향해 있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곽림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한참 후, 연천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곽림에게 입을 열었다.

“가자.”

짧게 말을 내뱉은 연천은 성큼성큼 절벽 위로 올랐고, 곽림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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