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그 아이의 무엇이 그리 좋습니까?”
걸화가 슬며시 웃으며 물었다.
‘배걸아가 좋은 점을 떠올려 봐! 그럼 앞으로 잘해주고 싶을 거야!’
“음… 나를 백연천으로 보아주고,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하여 좋습니다.”
백연천같은 엉성한 답의 연속이었다.
‘뭔 소리래…….’
걸화가 연천을 쳐다보았다.
연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피식 웃고 있었다.
걸화가 질문을 바꾸었다.
“…전각 안에 가주님 주위에 있는 여인들 중에 마음이 가는 분이 있습니까? 듣자 하니 혼담도 오간다고 하던데….”
너무 주제넘는 질문에 연천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싶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연천이 씁쓸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돈 많은 보은상회 가주에게 잘 보이려는 여인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없어요? 정말 저들 중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 하나도 없어요?”
걸화가 터져 나오는 미소를 꾹꾹… 참아지지 않아 실실 웃으며 물었다.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다들 집안도 좋고 얼굴도 예쁜데?”
이건 얼떨결에 나온 진심이었다.
“글쎄요… 제가 바빠서 그런 것인지, 혼례를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여인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연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걸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 아이는 여전히 좋구요?”
“…….”
연천이 이번에도 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스승님의 일만 아니면 걸아와 자유롭게 무림행을 즐기고 싶었다.
그 엉뚱하고 재미있는 아이를 보며 마음 편히 웃고 싶었다.
그 모습에 잠시 생각을 하던 걸화가 뜨악한 얼굴로, 앞섶을 가렸다.
여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고, 배걸아만 좋다?
‘뭐야? 배걸아는 남자인데? 이 형님 설마 남색을 밝히는 것 아니야?’
‘아씨… 어쩐지 주변에 검을 차고 있는 사내놈들이 버글버글하더라.’
걸화는 보은상회 가주 주위를 지키는 호위들을 떠올리며 혼자 요상한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연천과 이야기를 마친 걸화는 마음이 급했다.
연천이 그날 보은장으로 향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말을 붙여오는 모용진과 공지엽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급하게 마차에 올라탔다.
서두르면 연천보다 먼저 보은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를 재촉하고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연천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연천과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둘만 다닐 때는 몰랐었다.
연천의 목소리가 그렇게 따뜻하고 다정했다는 것을….
걸화의 주변을 맴돌며 쓸데없는 말을 해대는 놈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연천에게 혼담을 넣는 가문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한데, 연천이 모두 다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핑계는 그럴듯했다.
서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큰 상회의 일을 아직 배우는 중이라 혼례를 생각할 틈이 없다고…….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걸화는 연천을 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여인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연천은 후기지수 모임에 흥미가 없었다.
정말 그 모임이 좋고, 그 여인들 중 누구라도 마음에 드는 이가 있었다면, 자신을 따라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지난번 모임에서도 느낀 것이었다.
이리 생각해도 저리 생각해도 결론이 하나로 모이고 있었다.
‘백연천은 사내를 좋아한다’라고.
걸화는 보은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서 내렸다.
‘그래. 배걸아한테 그렇게 잘해주더니, 지금은 사내놈들이 많다고 눈길도 안 주는 것 봐. 내가 여인인 것을 알면, 정말 상종도 안 하겠구만!’
생각에 빠진 걸화는 보따리를 덜렁덜렁 흔들며 걸었다.
걸화는 그저… 이전의 백연천을 되찾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잘못을 타일러주는 그 백연천을 말이다.
이번 모임에서 연천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큰 수확이기 했지만, 덕분에 연천이 자신을 더 멀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커졌다.
한참을 걷다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아…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마차에서 갈아입을걸…….”
걸화는 지금 여인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신의와 교준은 자신이 여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연천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사내를 좋아하는 백연천이 자신이 여인인 것을 알면 더 멀리할 것 같았기에.
어디서든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지우고 가고 싶었다.
걸화는 손에 든 옷 보퉁이를 내려다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을을 지나 인적이 많지 않은 소로였지만, 몸을 가려줄 만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걸화라지만 길거리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었다.
“에휴… 바보! 등신!”
예쁘게 차려입은 걸화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걸화는 소로 옆의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예쁜 비단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올이 나갔다.
“에이… 쯧.”
올이 나간 자락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두리번거리면 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커다란 바위와 키 높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면 그럭저럭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큰 바위 뒤에서 옷 보따리를 풀었다.
걸화가 보은장에서 늘 입고 다니는 사내들이 입는 경장이었다.
“잡아라!”
걸화는 지척에서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야? 뭘 잡아?’
옷을 툴툴 털던 걸화는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뭘 잡으라고 하는 것인지 곧 알 수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걸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들의 비릿한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이 반반한 것이 꽤 비싸게 팔리겠는데요.”
작고 마른 사내가 비굴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오늘 운이 좋군. 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고!”
반질반질한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덩치 큰 사내가 호탕하게 웃었다.
‘돈? 돈이 어떻게 걸어왔데? 설마… 나? 나한테 하는 말은 아닐 거야, 난 아니야…….’
걸화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주섬주섬 비도를 찾아 꺼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보은장 밖을 나가는 일이라 혹시나 하고 챙겼던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사내들이 조심스럽게 걸화에게 다가왔다.
걸화는 사냥을 당하고 있는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잡아!!”
그 한마디에 사내들이 걸화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이던가?
개방도들에게도 쉬이 잡히지 않던 배걸화였다.
곧바로 산 위쪽으로 냅다 달렸다.
신의를 따라다닌 후 워낙 산을 자주 탄 터라 산을 오르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사내들은 산에서 사는 녀석들이었다.
걸화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몸을 돌린 걸화가 비도를 날렸다.
비도는 정확하게 날아가서 앞서 달려오는 사내의 허벅지에 박혔다.
비도를 맞은 사내는 더 이상 걸화를 쫓지 못했다.
걸화는 다른 사내에게도 비도를 날리며, 거리를 벌렸다.
사내들은 처음처럼 무작정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댔다.
간간이 비도를 날리며 무조건 달렸다.
열 개의 비도는 금방 동이 났다.
어릴 적 개방에서 거지들에게 쫓기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잡히면 방에 갇혔고, 지금은 잡히면… 두려움이 온몸을 덮쳐왔다.
비도를 뽑아 던지고 상처를 대충 묶은 사내들이 다시 걸화를 쫓았다.
‘아씨… 심장이나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럼 죽는데? 그게 뭔 상관이야……. 그래도 어찌 사람을 죽여… 아잇… 쯧.’
걸화는 뒤를 돌아보며 계속 달렸다.
거추장스러운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쭉 찢겨나갔다.
차라리 그게 더 편했다.
어른 키 높이만 한 가지가 얼굴을 긁었고, 밝은 비단옷에 시커먼 때와 흙먼지가 들러붙었다.
“헉…헉…헉.”
걸화는 숨을 몰아쉬며, 쉬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숨이 끊어질 듯 차오르고, 당장 주저앉고 싶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무조건 위로만 달리던 걸화는 막다른 길 앞에서 멈추었다.
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부는 그곳은 바로 앞에 아무것도 없는 절벽이었다.
“이러다 놓치겠어! 빨리 뛰어!!”
멀지 않은 산 아래에서 털옷을 입은 사내들이 짐승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진짜 죽는 건가… 잡혀서 치욕을 당하느니 그게 나을 것 같은데… 아버지… 걸부 형… 걸윤아… 나 죽는다… 백연천 이 나쁜 놈…….’
걸화는 달려오는 사내들과 절벽을 번갈아 보았다.
어느 쪽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찔한 낭떠러지였다.
‘뛰어내리면 진짜 죽겠구나…….’
사내들은 쉬지 않고 올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잡힌다.
저 사내들이 여인 하나를 어떻게 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매로 눈물을 훔쳐낸 걸화의 얼굴은 비장했다.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크게 숨을 고르더니, 절벽 끝에서 다리부터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나는 무공을 배웠어, 나는 무공을 배웠어. 영단도 먹었어, 신의가 만든 영단을…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혼자 구시렁대면서 절벽 아래로 엉금엉금 기어 내려가 매달렸다.
절벽이 가파르지만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들이 많아서 잡고 내려갈 만했다.
반장쯤 내려왔을 때, 사내들이 절벽 끝에 다다른 소리가 들렸다.
걸화는 절벽을 꽉 끌어안고, 벽에 딱 붙었다.
“뛰어내렸나 본데요?”
사내들 중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위에서는 벽에 붙은 걸화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저리들!! 계집 하나를 못 잡아서!!”
“작정하고 절벽으로 뛰어드는 걸 어찌 잡겠습니까…….”
“에잇 오랜만에 돈 되는 것 좀 잡아보나 했더니!! 숨어 있을 수도 있으니깐 샅샅이 뒤져!!”
뒤이은 사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걸화는 팔과 다리에 내공을 실어 버텼다.
‘나는 무공을 연마했어. 무공을… 비도술… 엄청 열심히 했는데… 지금은 별로 쓸모가 없구나… 아잇…….’
걸화는 절벽에 머리를 박고 울먹이며 버텼다.
기어 올라갔다가 저들을 맞닥뜨릴지도 몰랐다.
“아… 팔 아파…….”
한 식경 가까이 버티던 걸화의 팔이 아파왔다.
그나마 영단을 먹어서 그 정도라도 버텼지, 아니면 벌써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팔과 다리에 내력을 넣었는데도 기운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젠 다시 올라가는 것은 고사하고 버티기도 힘들었다.
내공이 딸려 그저 힘으로 버텼다.
점차 한계가 오고 있었다.
‘아버지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