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배걸아? 배걸화?】
“가주님 약 달일 물 뜨러 가야지요!”
걸화의 말에 신의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신의는 배걸화라는 아이의 마음 씀씀이에 참으로 흡족했다.
모시는 분을 저리도 생각하고 아끼니 말이다.
걸화를 제자로 들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신의였다.
‘왜 저래? 암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니깐…….’
걸화가 신의를 떠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자기는 늦잠을 자서 약을 못 달일까 봐 놀라 달려왔는데, 혼자 여유롭게 웃으니 말이다.
“사나흘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만 들어가서 쉬거라.”
좀처럼 웃지 않는 신의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왜요?”
걸아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가주님이 후기지수 모임이 있어 가셨다.”
신의의 얼굴에는 여전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아… 진짜! 그럼 미리 말을 좀 하지!! 잠깐… 후기지수 모임?’
“후기지수 모임…? 그것은 어디서 합니까?”
걸화가 이전에 한 번 갔었던 그 모임을 기억해냈다.
연천 옆에 달라붙어 있던 여시 같은 여인들도.
“복건의 보은상회 분점에서 한단다.”
신의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걸화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정색을 하고 신의를 불렀다.
“신의님!!”
“……?”
신의가 의아한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가주님도 안 계신데… 제게도 며칠만 휴가를 주십시오.”
“뭐?”
“사흘 정도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가주님이 오시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너도 후기지수 모임에 가려고 그러느냐?”
“아―니요. 후기지수들 모임이라 하니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전에 알던 동무들이 모임을 갖는다 하여 저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마침 가주님도 안 계시고 하니 딱 사흘만 다녀오면 안 될까요?”
“…….”
신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주의 약을 챙기는 것이 걸화의 일 대부분이었다.
가주가 없으면 보은장 내에서 탈 난 이들이 가끔 찾아올 뿐, 그다지 할 일도 없었다.
걸화에게 며칠 시간을 주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리하여라.”
신의가 잔잔하게 웃었다.
“내일 아침에 나가도 돼요?”
“그래, 알겠다. 몸조심이 다녀오고 사고 치지 말거라. 함부로 약재를 주거나, 침을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신의가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제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걱정 마시어요.”
걸화가 민망한 얼굴로 대꾸했다.
“총관께 말씀드릴 터이니 상회의 마차를 타고 다녀오거라.”
“아니요! 아니요! 모임 장소가 멀지 않습니다. 마차 필요 없어요.”
걸화가 양손을 저어가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날, 걸화는 마을로 내려가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비단옷 한 벌과 화장 도구를 구입했다.
옷을 갈아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는 마차를 빌렸다.
그리고, 후기지수들의 모임이 있는 보은상회의 복건분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마부를 재촉했다.
꼬박 반나절을 달린 마차는 겨우 시간에 맞추어 보은상회 분점 앞에 멈추었다.
바로 후기지수 모임이 있는 그곳 말이다.
지난번처럼 등 떠밀려 온 것이 아니었다.
걸화가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보은장에서 연천은 걸화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저 주인과 그에 예속된 의원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걸화는 연천을 설득시키고 싶었다.
배걸아라는 아이를 밀어내지 말라고.
다시, 자신을 위로하고 언제나 자신의 편에 서주는 그 든든하고 편안한 백연천이 보고 싶었다.
연천이 배걸아와는 말을 섞지 않았지만, 어쩌면 공도상회 설화의 말은 들어줄지도 몰랐다.
걸화는 이전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마차에서 내려, 시녀를 따라서 모임이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 안에는 눈에 익은 후기지수들과 연천도 함께 있었다.
“공도상회의 설화 아가씨 드십니다.”
전각 앞에 서 있던 시종이 전각으로 들어서는 걸화를 안내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전각내의 후기지수들의 눈이 모두 걸화에게로 향했다.
걸화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시종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늦은 관계로 중심에 있는 연천에게서 제법 떨어진 구석 자리였다.
연천 주위에 앉은 여인들은 뭐가 즐거운지 박장대소했고, 제갈련이 연천의 팔을 주무르며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걸화는 연천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참… 너무 하지요? 제갈세가에서 보은상회에 혼담을 넣었다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불쾌할 법도 한데 뭐가 저리 좋은지….”
모용진이 걸화 옆으로 다가와 연천과 제갈련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뭐 련소저가 싫어서 거절한 것도 아니고, 아직 상회 일을 배우는 중이라 혼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거절한 것인데 불쾌할 것까지 있겠어?”
어느새 다가온 청운상회 소가주 공지엽이 말했다.
‘어휴… 저 거머리 같은 것들 오늘도 들러붙네…….’
걸화가 그렇게 생각하며 곱게 웃었다.
그리고, 연천을 향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저 옆에 있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지난번처럼 근처에라도 앉았으면, 자연스럽게 말이라도 걸어보는 건데 자리가 너무 멀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가까이 가서 말을 붙이기도 뭣했다.
모용진이 뭐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걸화가 곱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하도 쏘아봐서 그런 것인지, 걸화의 시선을 느낀 연천이 고개를 들어 걸화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화와 눈이 마주친 연천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에휴… 설득은 뭔 놈의 설득…….’
걸화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제갈련을 향해 웃음 짓는 연천을 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소저,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좋지 못합니다.”
모용진이 걸화를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걸화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모임에 온 것이 후회되었다.
‘이럴 거면 오지를 말 것을…….’
백연천과 상관없이 살 것이라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맹세해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차라리 눈에 안 보이면 낫지, 하루 세 번 꼬박꼬박 마주하면서도 연천은 걸화를 쳐다보지 않았다.
거기다, 옆에는 떡 하니 형란이 버티고 있으니… 울컥울컥 불쾌함이 치밀었다.
후기지수 모임에서 연천을 설득해 보겠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말이라도 한번 붙여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모임은 이미 중반 이상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걸화가 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용진에게 몇 마디 대꾸한 것이 고작이었다.
모용진은 걸화에게 뭔가 더 말을 붙이고 싶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에효…….”
한숨을 내쉰 걸화가 일어섰다.
모용진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걸화가 재빨리 입을 막았다.
“혼자! 잠시! 다녀올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어요!!”
짜증스러운 걸화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걸화는 터덜터덜 걸어서 지난번 모임에 나와 있었던 후원 바위에 걸터앉았다.
풀이 죽어 맥이 없었다.
연천에게 말을 걸 수 없다면, 전각 안에 들어가는 게 의미가 없었다.
귀찮은 모용진과 꼴 보기 싫은 제갈련이 있는 곳에 들어가기 싫었다.
고개를 외로 꼬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오늘도 이곳에 계시는군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 목소리.
백연천이었다.
걸화가 눈을 크게 뜨고 연천을 쳐다보았다.
걸화와 자리도 멀고, 신경도 쓰지 않기에 따라 나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한데, 백연천이 앞에 있었다.
자신만을 똑바로 바라보는 연천이 눈앞에 있었다.
“오늘도 나왔군요…….”
걸화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연천이 작게 미소 지었다.
“오늘은 같이 좀 걸을까요?”
연천이 바위에 앉아있는 걸화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걸화가 혼자 일어나, 엉덩이를 툴툴 털었다.
오늘은 연천의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이 여인, 저 여인이 잡아대는 그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연천이 웃으며 내민 손을 거두었다.
연천이 천천히 걸었다.
걸화도 연천의 옆에서 걸었다.
연천이 후원 밖의 다른 전각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아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워낙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 보여서…….”
따뜻하고 편안한 목소리였다.
“지난번에는 불편했는데 오늘은 좀 낫습니다.”
“불편하지 않은데 어찌 나와 계셨습니까?”
“음… 여전히 불편한 것도 있기는 합니다.”
걸화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고갯짓은 걸화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 같았다.
걸화의 마음속에 비워졌던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연천은 제갈련이나 후기지수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내당의 뜰로 향했다.
걸화도 기분 좋게 연천을 따랐다.
내당 마당에는 작은 연못 옆에 아담한 정자가 놓여 있었다.
연천과 걸화는 정자로 올라갔다.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바람결에 부딪히는 나뭇잎에서 시원하고 청명한 향이 퍼졌다.
연천이 걸화를 보고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이 아름답고 여유로운 풍경 속에 그렇게도 같이 있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 있는 걸화의 마음은… 급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다.
“지난번 말씀하신 저를 닮은 아이는 만나셨습니까?”
걸화가 슬그머니 이야기의 운을 떼었다.
‘만났지! 만나서 완전 무시하고 있잖아!’
“어찌 그 아이를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걸화는 옆에서 들리는 연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좋았다.
“그립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운 사람들은 만나게 되는 법이지요.”
‘캬~ 멋있다.’
걸화는 자신이 한 말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연천의 얼굴은 묵직했다.
“…네, 만났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이야기해 주셨습니까?”
‘안 했지, 말도 안 섞는데…….’
“흐음… 아니요. 바보 같은 모습만 보였습니다.”
연천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 가주님이 어디가 바보 같다고…….”
‘상석에 꼿꼿이 앉아서 이것저것 지시만 잘하더구만, 바보 같기는.’
연천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이상하게 그 아이 앞에서는 늘 그럽니다.”
“그리웠던 만큼 잘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걸화가 제일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게…….”
연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아이는 참 좋겠습니다. 저리 많은 이들이 가주님께 잘 보이고 싶어 애를 쓰는데 가주님이 그리워하는 아이니….”
걸화는 정말 연천이 돌보아주던 그 배걸아가 부러웠다.
그리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두 보은상회의 가주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지요.”
“가주님이 보은상회의 가주가 아닙니까?”
“가주이기는 하나… 저는 백연천입니다. 그저… 백연천이지요…….”
오랜만에 듣는 진짜 백연천다운 모자란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