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아프면 안 되지】
걸화는 의약당내의 약재고에서 신의진서를 펼쳐놓고 약재를 하나씩 꺼내어 서책과 비교해보고 있었다.
신의가 흐뭇한 얼굴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의욕이 과하게 넘치고 엉뚱한 면이 있어 내심 걱정을 하기는 했으나, 저리 열심히 해주니 가르치는 자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걸화는 두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약재를 찾아보고, 종이를 꺼내어 뭔가를 쓰기도 했다.
신의는 그런 걸화가 대견스러웠다.
“걸아야!”
“네, 신의님”
“내가 내어준 두 권의 책은 다 읽었느냐?”
신의가 알면서 물어보았다.
“네, 벌써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음… 다른 서책은 필요하지 않느냐?”
“있으면 읽어보고 싶습니다.”
걸화의 말에 신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에 있는 서책을 마음대로 가져다 읽어도 좋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큰소리로 대답한 걸화가 아주 기쁜 얼굴로 웃었다.
“신의님… 서책 좀 가지고 가겠습니다.”
신의는 방으로 들어와서 책장의 책을 뽑아가는 걸화를 바라보았다.
걸화는 여전히 열심이었다.
신의의 제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의서에 빠지는 것은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으나, 잠도 자지 않고 서책만 읽는 것인지 근래에는 혈색이 좋지 못했다.
걸화의 건강이 염려되는 한편으로 흡족한 마음이 일었다.
“신의님… 서책 좀 가지고 가겠습니다…….”
신의는 걸화가 불쑥불쑥 방으로 들어와 서책을 뽑아가는 것이 좀 불편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저리 열의를 가지고 의서를 읽어대는데…….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깜깜한 밤, 잠들었던 신의는 부스럭대는 기척에 깨어났다.
눈앞에 허연 것이 어른거리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려왔다.
“신의님… 서책 좀 가지고 가겠습니다…….”
책장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허연 것이 책 한 권을 뽑아가지고 조용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어휴우…….”
잠이 깬 신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신의는 걸화를 방으로 불렀다.
걸화는 허연 얼굴에 눈이 퀭해서 신의 앞에 앉았다.
신의가 잔잔하게 웃었다.
자신이 처음 의술을 배울 때가 생각났다.
글도 잘 모르던, 그에게 의서에 쓰인 내용은 새로운 세계였다.
지금의 걸화만큼이나 정신을 놓고 서책에 파묻혔던 기억이 났다.
“걸아야… 의서는 좀 읽어보았느냐?”
신의는 걸화가 의서에 푹 빠져 있는 것을 알면서 물었다.
“네, 아주 재미있습니다.”
눈 밑이 시커먼 걸화가 웃었다.
“그래… 내 방에 있는 서책을 한 번에 여러 권 가지고 가서 읽어도 좋다.”
신의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걸화가 환하게 웃었다.
흰자위에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신의는 걸화의 피곤한 얼굴을 모른 척했다.
걸화의 저 열정이 마음에 들었기에.
저 대단한 열의가, 그녀를 대단한 의원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지금 미친 듯이 읽어대는 의서가 의원이 되는 걸화에게 단단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신의라는 이름에 가까워지게 도와줄 것이다.
연천과 모충일, 신의는 각 문파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대부분의 문파와 보은상회가 손을 잡고 있었다.
한데, 아직 화산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지,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연천이 보은상회의 가주가 되고 확실히 일에 진척이 있었지만, 아직도 화산의 수일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는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에 속이 답답했다.
생각에 잠겨, 방으로 들어온 그는 달라진 방의 풍경에 눈을 껌뻑였다.
신의의 방 한쪽 벽면은 빽빽하게 의서가 꽂힌 책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서책들 중 절반이 사라진 것이다.
누구 짓인지 알만했다.
“으흠…….”
신의는 침음을 흘렸다.
열의가 과해도 너무 과했다.
* * *
걸화는 오랜만에 기척을 숨기고 조용히 기다렸다.
개방 생각이 났다.
개방에서는 이리 숨어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거지를 괴롭히거나, 괴롭힐 거지를 찾기 위해 숨어 있거나…….
유모에게 잡혀있지 않을 때는 그 두 가지가 걸화의 생활 대부분이었다.
걸화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그리 살지 않을 것이니.
걸화는 시녀와 시종들의 처소인 보은장 외곽의 전각 주변에 숨어 있었다.
그들은 전각 앞에서도, 마당에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어댔다.
“옹충아! 너 마당 쓸러 안 가냐?”
누군가 크게 외쳤다.
“갈 거야! 요즘 아침마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잠깐 누운 거야.”
“아프면 신의님께 말씀드려! 중원으로 나가시면 언제 돌아오실지 몰라. 계실 때 치료받아.”
“그래야 되겠어, 점점 더 아프다. 어휴우.”
걸화가 고개를 빼꼼히 빼고 내다보았다.
비를 챙겨 들고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는 옹충의 뒷모습이 보였다.
옹충은 마당을 청소하는 시종이었다.
의약당 마당도 그가 정리했기에, 걸화와도 안면이 꽤 있었다.
걸화는 슬그머니 구석에서 나와 옹충의 뒤를 따랐다.
“옹충아!”
걸화가 옹충을 불러세웠다.
“의원님! 안녕하세요?”
옹충이 걸화에게 싹싹하게 인사했다.
걸화는 아직 의술을 배우는 중이지만, 의원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많았다.
“나야 안녕하지. 한데… 옹충이 네가 안녕하지 못한 듯싶구나, 혹여 허리가 아프지는 않느냐?”
걸화가 다 안다는 얼굴로 물었다.
“의원님이 제가 아픈 것을 어찌 아십니까?”
옹충이 놀랍다는 얼굴로 걸화에게 물었다.
“어? 어… 내가 누구냐? 의원 아니야? 의원은 환자의 안색만 보고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채야 하는 게지.”
순간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우와. 정말 대단하십니다.”
옹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치료해 줄 터이니, 의약당으로 가자. 아픈데도 계속 참으면 병이 더 깊어진다. 어서어서.”
걸화가 옹충을 재촉했다.
“지금요? 저 마당 쓸러 가야 하는데…….”
옹충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몸이 먼저이지! 그깟 마당이야 오늘 못 쓸면 내일 쓸면 어떠냐! 가자, 얼른! 얼른!”
걸화가 옹충의 등을 떠밀었다.
신의는 의약당에 없었다.
마을 촌장과 함께 연천의 전각에 들었다.
며칠에 한 번씩 세 사람이 함께 전각에 들면 한나절은 그곳에 있었다.
걸화는 의약당으로 끌고(?) 온 옹충의 맥을 짚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옹충아! 아침마다 허리가 아프지 않더냐?”
걸화는 숨어서 들은 이야기로, 아는 척하며 물었다.
“맞습니다. 이곳이 묵직하고 뻐근한 것이 저녁이 되면 더욱 심할 때도 있습니다.”
옹충이 등 아래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 말고 있거라. 내가 먹으면 바로 낫는 탕약을 달여 줄 터이니 너는 휴신각에서 쉬고 있어라.”
걸화가 옹충을 환자들이 쉬도록 만들어 놓은 전각에 있으라고 일렀다.
“감사합니다.”
옹충이 웃으며 답하고, 휴신각으로 향했다.
탕기에 부채질을 하는 걸화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땀이 흐르고 팔도 아팠지만, 그래도 좋았다. 자신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걸화는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하며, 자신이 처방한 탕약에 정성을 다했다.
한참 후, 걸화는 심혈을 기울인 탕약을 휴신각에서 쉬고 있는 옹충에게 내밀었다.
“의원님, 고맙습니다.”
옹충이 씨익 웃으며, 의심도 망설임도 없이 탕약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걸화는 숨소리도 낮추고, 옹충이 약을 들이켜는 것만 바라보았다.
“어때?”
걸화는 옹충이 사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물었다.
“아직 약이 뱃속에 도착도 안 했겠습니다.”
옹충이 그리 말하고 웃었다.
그리고, 눈을 끔뻑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정말이지?”
걸화가 눈을 반짝였다.
“뭐… 그런 것 같기도 하다고요.”
“그렇지? 이제 허리 안 아프지?”
“헤헤… 지금은 마당 쓸러 가야 하니, 있다 와서 어떤지 말씀드릴게요.”
옹충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그래. 꼭 와서 얘기해 줘야 한다.”
“네.”
송충이 꾸벅 인사하고 의약당을 나섰다.
걸화는 너무 뿌듯하고,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한 건 더 해볼까?”
보은장 외곽의 전각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걸화의 눈에 딱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마음속으로 점찍어 놓은 시녀였다.
걸화가 시녀의 뒤를 쫓으며, 그녀를 불렀다.
“은의 소저! 은의 소저!”
“신의님의 제자 분 아니시어요?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은의가 걸화를 보고 물었다.
걸화는 아직 신의의 제자가 아니지만, 신의가 데리고 다니며 의술을 가르치니 주위에서는 신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그리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걸화가 씨익 웃었다.
“아픈 환자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리 찾아왔어요. 요즘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붉은 반점이 생겨서 걱정이지요?”
“어찌 아셨습니까?”
은의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요.”
걸화가 웃으며 답했다.
그랬다. 몰래 숨어서 엿듣는 걸화 만의 수가 있었다.
“제가 소저를 위해 약을 지어줄 터이니 의약당으로 가지시오. 얼굴의 반점쯤은 금세 사라질 것입니다.”
걸화의 말에 얼굴 전체에 울긋불긋 반점이 난 은의가 웃었다.
은의는 걸화가 내민 시커먼 탕약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이것만 먹으면 피부가 뽀얗게 될 수 있습니까?”
“그렇다니깐, 걱정 말고 쭉 들이켜요. 쭈욱.”
“나도 형란 소저처럼 그리 피부가 고와졌으면 좋겠습니다.”
형란이라는 말에 입술이 비틀리는 걸화였다.
‘그 비루먹은 개뼈다귀가 여기서 왜 나와? 쯧…….’
“그럼, 그럼. 그러니 얼른 마셔요.”
걸화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망설이는 은의를 재촉했다.
은의가 눈을 꼭 감고 탕약을 꿀떡꿀떡 들이켰다.
걸화는 탕약을 마신 은의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았다.
입가에 약이 묻은 것을 제외하면 은의의 얼굴은 약을 마시기 전과 같았다.
이건 걸화 아니고 신의라도 마찬가지였다.
약을 들이키자마자 약효가 나타날 수는 없었다.
“뭐… 곧 좋아질 겁니다. 안 나으면 내일 또 와요. 약을 다시 드릴 테니…….”
걸화가 은의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곧 약효가 나타나 좋아질 거라고.
“고맙습니다.”
은의는 걸화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이 소속된 전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