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절을 하는 걸화를 향한 사내의 시선은 따갑도록 강렬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걸화는 섬뜩하도록 집요한 눈빛에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보았다.
걸화와 눈이 마주친 사내의 환한 이마에 잘 손질된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내를 보는 걸화의 눈동자도 크게 흔들렸다.
“이 아이를, 어디서 데려왔습니까?”
사내가 걸화에게 향한 눈빛을 걷어 들이지 않은 채, 신의에게 물었다.
“개방에서 데리고 왔습니다.”
사내의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탓인지, 신의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걸화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도 무거운 얼굴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잠시 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사내가 시선을 고정한 채, 신의에게 말했다.
“…네, 그러시지요.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신의는 사내의 말에,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신의가 나간 넓은 방 안은 조용했다.
무거운 적막감이 감도는 가운데 사내와 걸화의 시선이 강하게 얽혀 있었다.
입을 먼저 연 것은 걸화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사내였다.
“걸아야…….”
“…….”
사내의 그 한마디에 걸화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그 사이… 많이 컸구나.”
몇 달 전 객잔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걸화는 삐쩍 말라 있었다.
겨우 몇 달 사이인데 살 오른 뽀얀 얼굴이 보기 좋았다.
지난 2년간 겨우 목숨만 연명하며 하루하루 말라가던 걸화는, 연천을 만난 이후 자신의 삶에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자며 의술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에는 제법 그녀의 나이에 걸맞게 성장하고 있었다.
걸화의 나이가 이제 열여덟이었다.
아이의 때를 벗고 여인이 되는 나이였고, 여인으로서도 그 아름다움에 물이 오를 시기였다.
걸화는 활짝 핀 목련처럼 환하고, 깨끗하게 맑았다.
남장으로도 그 아름다움이 미처 다 가려지지 못했다.
지나가던 사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번 더 돌아보게 할 묘한 매력이 흘렀다.
“씨이…….”
걸화는 눈앞의 사내, 보은상회 가주 백연천을 노려보며 씩씩댔다.
걸화가 매달려도 연천이 같이 할 수 없다며 밀어내기에, 연천 옆에 있을 곳이 없는 줄 알았다. 옆에 있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리 쉽게 곁에 있을 수 있는데, 백연천은 자신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 했다.
그건, 그가 더 이상 배걸아와 함께 하기 싫다는 의미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고,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막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의께 의술을 배우다니… 잘 되었다.”
연천은 어제 만난 아우에게 축하 인사를 하듯 말했다.
“그게 지금!! 씨이…….”
걸화가 씩씩거렸다.
속을 가득 채운 감정이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맴돌았다.
걸화의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형님은!! 진짜 나쁜 놈이야!!”
“흐음…….”
연천이 깊은 침음을 흘렸다.
걸화가 젖은 눈으로 연천을 노려보고는, 문이 부서지도록 세게 닫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성질은 여전하구나…….”
연천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다 생각에 잠겼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겐가?’
연천은 보은상회의 가주로 있었다.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고, 복수를 하고 그분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2년이 넘게 가주로 있는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헷갈렸다.
‘이 일에 실패하면 나는 어찌 되나? 죽으려나? 최소한 온갖 불명예를 끌어안고 살아야겠지. 무림 살인귀의 제자에 정파의 영웅들을 해하려 했다고…….’
‘성공한다면? 마교의 천마가 되겠지. 그러면 그때는 걸아와도 호형호제하며 가까이 지낼 수 있을까? 아니야, 개방… 정파의 아이가 마교 천마의 아우로? 하!’
수만 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게 옳았다.
연천이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걸화는 땅이 부서질 듯 쿵쿵거리며 자신을 안내해주는 시종을 따라 신의의 처소로 향했다.
화가 나고 분했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연천도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연천은 더 이상 배걸아라는 아이가 필요 없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런 사람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억울하고, 아팠던 것이 원통했다.
‘그래!! 나도 백연천 같은 인간 필요 없어! 이제 나랑 백연천은 영영 남이야!!’
걸화가 혼자 씩씩대며 자신의 방으로 들었다.
깜깜한 새벽, 신의가 걸화를 깨웠다.
걸화는 마지못해 일어나 신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교준은 벌써 채비를 하고 걸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의와 교준은 가타부타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걸화도 허둥지둥 남은 말에 올라타고 그들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도 말 타는 게 재밌었는데, 이젠 말이라면 징글징글했다.
말을 달려 가파른 산등성이에 멈추었을 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산에 환장한 인간들!! 해도 안 떴는데 또 산을 타겠다고!!’
치미는 말을 삼킨 채, 그들을 따라 또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며칠 산을 탔더니, 길 없는 산을 오르는 것에도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반 시진을 가파른 산을 오른 신의가 발을 멈추었다.
조그마한 옹달샘이 있는 곳이었다.
교준이 등에 멨던 작은 단지를 내리고, 신의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샘물을 퍼서 단지에 부었다.
단지의 뚜껑을 닫고 끈으로 단단히 묶어 다시 교준의 등에 메었다.
산을 내려 가는 두 사람의 뒤를 터덜터덜 따라가면서, 신의의 가르침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싶었다.
‘걸부 형의 영단만 아니면, 그것만 아니면 진짜… 으아아악~’
걸화가 신의를 따르기로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신의께 죄송했다.
그랬기에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그리고, 개방에 있기 싫었다.
연천을 생각하며 비도를 던지는 것도 지긋지긋했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멀쩡하게 살아서 자기 혼자 잘 살겠다는 사람을 뭘 생각하겠는가?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나니깐… 바빠지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영단을 만들고 싶었다.
걸부 형에게 신의가 만든 것보다 더 좋은 영단을 만들어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짜증 나고 힘들어도 신의 옆에서 버티며 의술을 배워야 했다.
다시 말을 달려 의약당에 도착하자, 교준은 단지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신의는 깊은 산에서 뜯어왔던 식물과 몇 가지 약재를 탕약기에 넣고 이른 새벽에 떠온 샘물을 부었다.
그리고 약재를 달이기 시작했다.
슬슬 부채질해 가면서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약을 달였다.
깨끗한 면포에 꼭 쥐어짠 탕약은 겨우 한 사발이 나왔다.
신의는 약사발을 나무 쟁반에 받치고 작은 감초 한 조각을 같이 올린 후, 그 위에 깨끗한 천을 덮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을 쏟는 신의였다.
“따라 오거라.”
신의가 걸화에게 명하고, 쟁반을 들고 앞장섰다.
신의가 정성으로 달인 탕약을 들고 간 곳은 연천의 전각이었다.
걸화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미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연천에게 배걸아가 필요 없다면, 자신도 백연천을 모른 척하리라 다짐했다.
그랬는데 연천의 전각이 가까워지자, 심장이 빠르게 박동해댔다.
자신의 결심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이 짜증스러웠다.
“가주님, 들겠습니다.”
신의가 가볍게 말하고 연천의 방으로 들었다.
넓은 연천의 전각에는 연천 말고 한 여인이 같이 있었다.
그녀가 연천에게 장포를 입히고 있었다.
걸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연천의 장포 옷깃을 손으로 잡아 빳빳하게 세우는 여인을 노려보았다.
걸화의 입술이 심하게 뒤틀렸다.
연천의 어깨와 가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러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그 여인은 영친왕의 성에서 만났던 시녀, 형란이었다.
걸화는 형란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쏘아보았다.
연천과 자신을 헤어지게 만든 원천이자, 화근이 바로 그녀였으니 걸화가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걸화가 노려보든지 말든지 연천의 옷을 다 입힌 형란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것을 보고 신의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던 탕약입니다. 하루 세 번 올릴 것입니다.”
형란이 소리도 없이 조용히 걸어와, 신의가 들고 있던 탕약을 받아들었다.
다시 연천에게 다가가 약사발을 들어 올리자, 연천이 받아마셨다.
형란이 가늘고 고운 손으로 감초를 들어 연천의 입으로 쏙 넣어주었다.
그리고, 묻은 것도 없는 연천의 입술을 손수건으로 꼭꼭 눌러 닦았다.
걸화의 뱃속에 무언가가 베베 꼬이는 것 같았다.
‘자기는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연천은 걸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형란이 쟁반을 신의에게 돌려주자, 신의는 조심스레 연천의 전각을 나왔다.
걸화가 신의를 따르며 찢어질 듯한 눈으로 연천과 형란을 노려보았다.
형란이 연천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연천은 가볍게 눈을 감고 있었다.
걸화의 속에서 짜증과 화가 치밀었다.
상관없는 사람이 뭔 짓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어야 하는데,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골이 났다.
콧구멍이 커지며 세고 강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전각을 빠져나왔다.
걸화가 전각을 나가자, 연천이 천천히 눈을 떴다.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연천이 형란에 말했다.
“하던 것은 마저 하고 가겠습니다.”
“내가 하면 되니 그만 되었다.”
“네…….”
형란이 아쉬운 표정으로 빗을 내려놓고 전각을 나갔다.
“흐음…….”
연천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걸화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신의와 교준과 함께 산을 타, 물을 길어왔다.
떠온 물로 약을 달이고 하루에 세 번 연천에게 올리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걸화는 신의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화가 나서 뒤로 나자빠질 것 같았다.
연천의 방에 들어갈 때마다 형란이 그의 옷매무새를 챙기고, 얼굴을 닦아주고 침상까지 챙겨주었다.
거기다 연천은 걸화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지가 하면 되지! 씨……!!”
자꾸만 성질이 났다.
* * *
신의진서, 신의예서
신의가 걸화에게 준 기본서였다.
걸화는 신의진서를 펼쳤다.
약재의 모양과 효능이 쓰인 책이었다.
신의예서를 펼쳤다.
같이 사용하면 상극인 약재와 함께 사용하면 효능이 배로 좋아지는 약재의 조합들이 쓰여 있었다.
“호호…….”
걸화가 흥미로운 눈으로 천천히 신의진서를 읽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