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나도 필요 없어!】
“왜… 그 사람들을 도와요?”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신의를 찾는 자들이 중원 전체에 널려있었다.
신의의 말 한마디면 중원 끝에서 환자를 들쳐 업고 달려올 자들도 있었다.
신의가 손만 내밀면 돈을 수레 가득 싣고 올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이들만 골라 보아도 바쁠 터인데 왜 힘들고, 불편하고, 남는 것도 없는 일을 자처하는지 궁금했다.
“사람이 제 뿌리를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게야.”
가볍게 눈을 뜬 신의의 답이었다.
“뿌리요? 무슨… 뿌리요?”
걸화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답을 해도 속 시원히 하지 않고, 꼭 저리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저곳이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네에?”
걸화가 깜짝 놀랐다.
“놀랐느냐? 신의가 다리 밑의 거지 출신이라.”
“네… 놀랐어요.”
“솔직하구나.”
“…의술이 그냥 뚝딱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의원이 거지에게 의술을 가르치겠어요. 당연히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이니 놀랐지요.”
걸화 나름대로 신의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명이 아닌 사실이었다.
“네 말이 맞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저곳에 있었을 게다.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고…….”
신의가 마차에 난 창밖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
“…….”
“저분들을 마을 같은 곳에서 살게 도와주면 안 돼요? 신의면 돈도 많으실 거 아니에요.”
걸화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거지들이 어디 저들뿐이냐? 세상 거지들을 내가 어찌 다 돕겠느냐? 그들도 그들대로 잘살고 있다.”
신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
걸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신의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걸화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간지러워…….”
신의가 고개를 돌려 걸화를 보았다.
걸화는 긁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다 근질거렸다.
손톱을 세워 피부가 벌게지도록 긁어댔다.
“벼룩이 옮았나 보구나.”
신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에?”
걸화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신의를 쳐다보았다.
“오늘은 객잔에서 묵자구나. 약촛물에 목욕을 하면 금방 나을 테니, 그런 표정 하지 않아도 된다.”
신의가 예사롭게 말했다.
걸화는 뜨악한 표정이 되어, 양손으로 몸 앞뒤를 쉬지 않고 긁어댔다.
객잔에서 이틀을 묵으며 걸화는 세 번이나 약촛물에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천상이 방주가 된 뒤로 개방도들 사이에는 거의 없어져 버려, 걸화로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겨우 몸에 벼룩이 인 것도 가렵고, 소름 돋고 참기 힘들었다.
“휴우…….”
깨끗한 몸을 한 걸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한심스럽고,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서글펐다.
그들을 돌봐주는 신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는 걸화였다.
* * *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 멈춰 마차를 팔아치우고, 신의와 교준은 식당을 찾아 들어가서 배를 든든히 채웠다.
걸화에게는 가타부타 설명해 주지 않았기에 눈치껏 따라다니며 음식을 욱여넣었다.
식사를 마친 신의와 교준은 혹시나 했던 걸화의 예상대로 가파른 산길로 들어섰다.
신의를 따라나설 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약초를 알아가고, 의술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산을 무지하게 타야 될지도 모른다고.
신의는 힘든 기색 없이, 길도 없는 비탈진 숲을 여유롭게 걸었다.
“헥…헥…….”
걸화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힘들지요? 바랑을 이리 주시지요.”
교준이 힘들어하는 걸화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걸화가 대꾸했다.
“이리 주세요.”
교준이 거의 힘으로 걸화의 바랑을 빼앗아 자신의 한쪽 어깨에 메었다.
이미 메고 있는 약재 가방도 무거워 보이건만, 걸화의 바랑까지 매고 신의의 뒤를 따르는 교준의 걸음은 가벼웠다.
작은 오솔길조차 끊어진 험한 산을 오르는 것은 계속되었다.
걸화가 미끄러질 때마다 교준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거절할 형편도 되지 않는 걸화는 교준이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산의 중턱에도 이르지 못했는데 해가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다.
“오늘은 저기서 묵고 가자꾸나.”
신의의 손끝을 따라가니 저 멀리 작은 동굴이 보였다.
걸화는 묵묵히 신의와 교준을 따랐다.
동굴에 들어서자 교준은 가방을 내려놓고 나뭇잎과 가지를 주워 와 서둘러 불을 피웠다.
기운 없이 앉아서 교준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걸화는 앉은 채로 꾸뻑꾸뻑 졸았다.
요 며칠이 참으로 힘든 걸화였다.
익숙한 냄새에 눈을 떠보니 교준이 불가에서 꿩고기를 굽고 있었다.
“후…….”
동굴 밖은 이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이 내려 앉아있었다.
걸화는 멍한 얼굴로 새까만 공간을 향해 눈만 껌뻑거렸다.
“식사하시지요.”
교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신의는 벌써 고기를 뜯고 있었다.
걸화도 주섬주섬 다가가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신의 일행은 다음날도 길 없는 산을 올랐다.
밤이 되면 적당히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교준이 구해온 것을 먹고 쪽잠을 잤다.
나흘째 산을 타던 걸화는 정말 신의가 길을 알고 가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며칠째 길도 없는 산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신의는 여전히 평평한 꽃길을 나들이라도 온 듯 여유롭게 부채를 흔들며 걸었고, 걸화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그를 따랐다.
교준이 내내 걸화의 옆을 지키며,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그녀의 등을 밀어주기도 했다.
걸화는 그저 그들이 이끄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닷새째에 들어선 곳은 기분 나쁠 정도로 어둡고 축축한 골짜기였다.
한낮인데도 햇볕조차 들지 않는 곳의 공기는 습하고 차가웠다.
걸화는 자신을 눌러 내리는 불쾌한 음기에 진저리를 쳤다.
“허허… 저것이 이리도 잘 자라주었구나, 그분의 홍복이다. 허허허허…….”
신의가 어두운 골짜기 내에서도 시커먼 바위 옆의 습지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자꾸나.”
신의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신의는 익숙하게 오두막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천을 가지고 나와서 너른 바위 위에 펼쳤다.
절벽처럼 높이 솟은 바위를 뒤덮고 있는 이끼를 뜯어, 펼쳐놓은 천 위에 넓게 올렸다.
그러더니, 껌껌한 바위 옆구리에서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검은 식물을 조심스럽게 뜯어 이끼 위에 내려놓았다.
“세상만사는 음과 양이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느니라. 양의 기운이 강할수록 더욱 강한 음기를 찾는 법이지.”
신의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작업에 신중을 기했다.
검은 식물 위에 다시 이끼를 뜯어 덮더니 천을 조심스럽게 싸매었다.
허리를 편 신의가 손에 든 것을 들고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걸화는 찝찌름한 표정으로 신의를 따랐다.
습하고 축축한 이곳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걸화의 바람대로 신의는 다음날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을 오를 때의 여유로운 모습과 다르게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닷새를 오른 산을 이틀 만에 내려왔다.
“말을 탈 줄 아느냐?”
신의가 걸화에게 물었다.
“네.”
걸화가 답했다.
말 타는 것을 좋아하는 걸화는 신나게 바람을 맞으며, 말을 달릴 생각에 내심 기대했다.
“잘 되었다. 말이 마차보다 빠르니… 너는 어서 가서 빠른 말을 구해오너라.”
신의가 교준을 재촉했다.
세 사람은 교준이 구해온 말을 타고 달렸다.
신의와 교준은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걸화는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말을 달려야 했다.
잠깐씩 눈을 붙이고 배를 채운 그들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말이 복건 방향으로 향하자, 걸화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걸화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 백연천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야 했다.
아직도 문뜩문뜩 떠오르는 백연천이라는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걸화는 이를 악물고 박차를 가해 달렸다.
며칠을 달린 말은 커다랗고 화려한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말에서 내린 걸화는 속이 울렁거렸다.
신의는 망설임 없이 커다란 대문 안으로 들었고, 교준과 걸화가 뒤따랐다.
문 앞에 선 두 명의 위사가 신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신의는 거침없이 걸어, 넓고 잘 꾸며놓은 마당을 통해 집안 깊이 들어가며 걸화에게 말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것이다. 내가 모시는 분을 뵐 게야. 그분께 절대 소홀함 없이 없어야 한다.”
신의의 엄숙한 말에 걸화가 짧게 대답했다.
“네…….”
몇 개의 전각을 지나자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전각이 나타났다.
“계시는가?”
신의가 전각 앞에 선 무인에게 물었다.
“네.”
무인, 곽림이 신의에게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알려주시게.”
신의의 말에 전각으로 들었던 무인이 나와 신의에게 말했다.
“드시지요.”
“너는 들어가거라, 걸아는 따라오고. 인사를 드려야지.”
신의가 교준을 두고, 걸화를 데리고 전각 내로 들어갔다.
전각의 내부는 밖만큼이나 컸다.
큼직한 방안은 귀한 자기와 여러 가지 색으로 수를 놓은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방의 제일 안쪽, 크고 화려하게 꾸민 의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신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사내에게 인사를 했다.
뒤를 따르던 걸화도 신의를 따라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가주님, 다녀왔습니다.”
신의가 말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저 아이는 누구입니까?”
고개 숙인 걸화의 뒤통수에 사내의 시선이 지나간 것이 느껴졌다.
사내의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따뜻하고 듣기 좋았다.
“밖에서 만난 아이인데 쓸 만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를 들이신 겁니까?”
사내가 물었다.
걸화는 부드럽고 정감 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아니오나, 그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갔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네, 생각보다 수확이 좋습니다. 이것이 다 가주님의 홍복입니다. 정성껏 달여 올릴 터이니 챙겨 드시면 틀림없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걸아야, 가주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리거라.”
신의의 말에 걸화가 일어나 절을 올렸다.
신의는 걸화를 내내 걸아라고 불렀다.
걸아가 남장을 하며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한 것도 있지만, 배걸화라는 이름을 듣고 개방의 여식인 것을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제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가 개방의 여식인 것을 굳이 남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배걸아라고 합니다.”
고개 숙인 걸화는 자신의 정수리에 사내의 시선이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사내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그 시선 또한 온화했었다.
헌데, 갑자기 사내의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걸화가 기감이 발달해서 그런 것인지, 사내의 감정 기복이 워낙 커서 그런 것인지 걸화가 보지 않고도 느낄 만큼 갑작스럽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