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살아온 여인 하나가 걸화 덕분에 집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환한 얼굴로 말이다.
화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걸화는 저 얼굴을 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가는 기쁨에 찬 얼굴,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표정… 아주 위험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가진 사람은 누구도, 무엇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영단을 훔쳐 달아날 때의 얼굴이 꼭 저랬을 것이다.
“저는 아버님께 몸이 다 나았다고 말씀드리러 갈 것입니다. 의녀님은 조금 더 쉬시어요.”
화영이 예쁘게 웃으며 일어섰다.
“저, 저기 소저! 소저! 잠깐만! 잠깐만 앉아보세요.”
걸화가 다급하게 화영을 잡아 세웠다.
절대 화영을 혼자 원남으로 보낼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화영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걸화가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잠깐 상상만 한 것으로도 몸이 떨리게 무서웠다.
“…….”
걸화의 속을 모르는 화영은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는 환한 그녀의 미소가 걸화를 두렵게 했다.
걸화는 화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제가 사람을 기막히게 잘 찾아주는 이를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부탁해서 최대한 빨리 유운이란 분을 찾아서 이리로 모셔오라고 할게요. 여기서 만나세요.”
“…….”
화영이 미심쩍은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걸화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소저가 여기서 원남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못해도 달포는 걸릴 겁니다. 원남에서 또 그분을 찾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제가 말한 사람한테 맡기면 그분을 찾아서 여기로 데리고 오는데 달포면 충분할 겁니다.”
“…….”
화영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실력이 엄청나요. 제가 지금 서찰을 보내면, 금방 일을 시작할 거예요. 저랑 아주 친분이 있거든요. 저를 한번 믿어보세요. 맡겨보고 안 되면 그때 소저가 나서도 되잖아요.”
걸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제발 내 말대로 해요. 쫌!!’
곰곰이 생각하던 화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될까요? 의녀님과 그분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
“아휴!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랑 아주 친한 사람이라니깐요. 제가 바로 서찰을 보낼게요. 소저는 아무 걱정 마시고, 백가장에서 꼼!짝! 말고 그분을 기다리셔야 해요. 길이 엇갈리면 안 되잖아요.”
말을 하는 걸화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의녀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여 비용이 든다면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소저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아―무 걱정 마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하하하!”
걸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화영이 방을 나가고 걸화는 종이와 붓을 찾아 서찰을 써 내려갔다.
걸윤이 보아라!
내가 너에게 급하게 부탁이 있다.
청사파에 철령검 유운이라는 사람이 지금 원남에 있다는데, 그 사람을 찾아서 백가장의 백화영 소저에게 좀 데려다줘라.
꼭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무시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다.
내가 한다면 하는 거 알고 있지?
서찰을 받으면 당장 찾으러 가라.
그럼 이만.
―배걸화 씀
걸화는 부탁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해대고 있었다.
서찰을 가까운 개방 분타에 특급으로 맡기고, 비틀거리며 백가장으로 돌아왔다.
* * *
신의는 교준을 시켜 커다란 마차에 곡식과 먹을 것을 잔뜩 싣고, 약재까지 꼭꼭 밀어 넣고는 채비를 마쳤다.
화영이 떠날 준비를 마친 걸화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은 걸화를 향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건강하십시오”
입을 열어 작별 인사를 한 것은 걸화였다.
“조심히 가시어요.”
화영은 아쉬웠지만, 간단하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와 신의가 있는 앞에서 시시콜콜 감사의 말을 해댈 수는 없었으니.
두 여인은 속에 꼭꼭 담아둔 말을 마음으로 할 뿐,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걸화는 걸윤이 하루빨리 유운을 찾아내어 데리고 오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걸화는 가주에게 인사를 하고, 신의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사람이 탈 자리도 없이 미어터지게 짐이 실린 마차에 몸을 구겨 넣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묵직한 마차는 느릿하게 앞으로 향했다.
반나절이 지났다.
발아래의 곡식 가마니 때문에 반나절 내내 다리를 구부리고 있던 걸화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마차에서 나와 마부석에 있는 교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지개를 켜고 다리를 쭉 뻗으니 살 것 같았다.
“바람이 찬데 들어가 있으시지요.”
교준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 안에 더 있다가 갑갑증이 나서 죽겠어요.”
걸화의 말에 교준이 웃었다.
“그리 웃지 마세요. 사내가 그리 얼빠진 것처럼 웃는 것 보기 좋지 않습니다.”
걸화의 말에 교준이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윗옷을 벗어 걸화에게 걸쳐주었다.
“이런 것도…….”
걸화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고마워요.”
교준이 다시 헤실헤실 웃었다.
걸화가 얼굴을 구겼다.
마차는 느릿느릿 며칠을 달려 넓고 큰 다리 옆에 멈추었다.
“으그그그그…….”
신의가 마차에서 내려 팔, 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걸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잘 때와 끼니때, 멈춘 것을 빼고는 열흘이 넘게 마차를 타고 왔음에도 신의는 마차 안에서 거의 내리지도 않았다.
‘진짜 독하다…….’
걸화가 속으로 생각하고,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 팔을 하늘로 쭉 늘어트렸다.
어디선가 쬐끄만 거지 아이들이 우르르 나타나 신의에게 달려들었다.
“신의다! 신의가 왔어!”
허연 얼굴에, 구김 없는 밝은색 장포를 입은 신의에게 거적도 걸치지 않은 아이들이 매달렸다.
신의는 아이들이 달려들 때마다 휘청거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신의와 다니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힌 신의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걸화였다.
곧이어 어른 거지들도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매번 이리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른 거지들이 신의에게 인사했다.
신의는 대꾸 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들어가시지요.”
신의 일행은 인사한 거지를 따라 다리 밑으로 향했고, 몇몇 거지들은 마차에서 곡식과 약재를 내렸다.
걸화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다리 밑에는 허옇게 버짐이 핀 아이가 발가벗고 뛰어다녔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이는 배만 유난히 불뚝 나와 있었다.
코 묻고 때가 켜켜이 낀 아이에게 파리 떼가 집요하게 들러붙었다.
곳곳에 쳐놓은, 움막은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잡동사니를 쌓아 만든 움막을 바라보는 걸화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앞장서던 거지는 그나마 상태가 나아 보이는 움막으로 신의 일행을 안내했다.
일행은 걸화의 키보다도 작은 움막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움막 입구의 거적을 들어주던 거지 구풍이 마지막으로 거적을 내리고 안으로 들어와 앉자, 움막 안은 껌껌해졌다.
군데군데 난 구멍으로 작은 빛줄기가 쬐어 들었다.
어두운 공간,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빛이 화살처럼 걸화와 신의의 몸에 박혔다.
뻣뻣한 짚을 얽어 놓은 꺼끌한 바닥에 무언가가 따끔따끔 엉덩이를 찔러왔다.
걸화는 움찔움찔 자세를 바꾸었지만 편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한쪽 구석에는 때 낀 바가지와 몽당숟가락, 너덜너덜한 천을 이어놓은 뭉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걸화는 괴괴한 냄새가 진동하는 움막에서 낮게 숨을 쉬었다.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답답한 속에 자꾸 숨이 찼다.
“좀 어떠한가?”
신의가 느긋하게 물었다.
“덕분에 저희야 이리 편하게 살고 있습지요.”
거지 구풍의 얼굴은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편안한 낯빛이었다.
걸화는 기가 막혔다.
‘이게 편하게 사는 거라고? 그럼 이 세상에 편하지 않은 것은 대체 뭔데?’
“어디 아픈 사람은 없는가?”
신의의 낮은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뭔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던, 그 꼬장꼬장한 영감의 모습이 아니었다.
걸화는 신의도, 지금 엉덩이를 깔고 있는 이곳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저희야 병도 도망가는 사람들 아닙니까? 지난번에 주고 가신 금창약이 요긴하게 잘 쓰였습니다. 단지… 두수께서 병세가 나빠지시어 걱정입니다.”
자신들은 편히 살고 있다며 미소를 보이던 구풍의 얼굴이 설핏 어두워졌다.
“그래……. 연세가 있으시어 쉽지는 않을 게야, 어디 한번 보세.”
말을 마친 신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일행은 두어 개의 움막을 지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조그마한 움막으로 향했다.
구풍이 거적을 들어 올리자, 움막 안에서 역한 냄새가 훅 끼쳤다.
신의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히 걸어가던 걸화는 덮치듯 밀려오는 탁한 공기에 움막 입구에서 숨을 멈추었다.
그와 함께 걸음도 멈췄다.
작고 어둡고, 냄새나는 이곳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불쾌한 그 공간으로 발걸음이 나아가지 않았다.
구풍이 입구 거적을 잡고 걸화를 기다렸다.
걸화는 낮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움막 안에는, 머리와 수염이 허연 사내가 낡을 대로 낡아 너덜너덜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사내가 누운 자리 옆으로, 한 사람 서 있기도 비좁았다.
신의는 때가 켜켜이 껴서 찝찝한 이불 한 편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누운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죽은 듯이 미동도 없었다.
낮은 움막에 구부정하게 서 있던 걸화도 신의를 따라 그의 옆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신의는 나뭇가지처럼 삐쩍 마른 사내의 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
사내의 손목을 내린 신의가 걸화에게 눈짓했다. 맥을 짚어보라고.
걸화는 메마르고 핏기도 없어, 잘못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처럼 여윈 사내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파리하고 거친 손은 섬뜩하도록 차가웠다.
걸화가 사내의 맥을 짚었다.
대맥이 너무 가늘고 약해서 그 기운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다른 맥은 아예 느껴지지도 않았다.
온 신경을 손가락에 집중했지만, 미세한 대맥의 작은 흐름… 그뿐이었다.
걸화가 조심스럽게 사내의 손목을 내려놓고,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신의에게 입을 열었다.
“대맥이 아주 미세하고 약하게 흐릅니다. 그뿐, 다른 흐름은 잡지 못하였습니다.”
“맞네, 며칠을 넘기지 못하실 게야…….”
신의의 낮은 목소리는 덤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