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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9화 (109/230)

109화

걸화와 두 여인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지막으로 소리 난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악하고 잔인하기로 이름난 청사파의 소굴이었다.

화영을 뒤흔들던 수많은 감정들 중 두려움만이 남아, 그녀를 눌러 내렸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소리가 나던 쪽의 나뭇가지가 눈에 뜨이게 들썩거리자,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세 명의 여인은 숨죽이고 움직이는 나뭇가지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뭇가지가 들썩인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교준이었다.

“으허…….”

걸화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숨조차 멈추었던 몸에 그제야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교준의 한쪽 손에는 눈탱이가 시퍼렇고 코피를 흘리는 사내 하나가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교준은 그녀들의 앞까지 사내를 끌고 왔다.

“청사파 사람이랍니다. 찾는다는 이에 대해 물어보시지요.”

교준이 단정한 목소리로 얼굴이 쥐어터진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에 잡힌 사내의 몰골과 그의 목소리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지금의 상황이 비현실적이게만 느껴졌다.

거칠게 호흡하던 화영이 마음을 정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주먹을 꼭 쥔 화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유운이라는 분입니다.”

화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교준의 눈치를 살폈다.

교준은 표정 없이, 눈만 돌려 사내를 흘겨보았다.

“…처, 철령검 유운 형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내가 터져서 피가 배어 나온 입술로 말했다.

“맞습니다, 그분입니다. 그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내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만으로 화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형님은 왜 찾는 게요?”

사내의 물음에 교준이 눈에 뜨이게 사내를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움찔하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은 청사파를 나가셨소.”

사내의 목소리는 유난히 힘이 없었다.

“…….”

예상하지 못한 사내의 말에 화영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혹시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릅니까?”

걸화가 물었다.

“원남 어딘가에서 형님을 봤다는 소문만 들었소. 형님이 청사파를 나가셔서 윗분들의 심기가 좋지 않소.”

힘 빠진 사내가 윗사람들에게 들키면 좋지 않은 꼴을 볼 수도 있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물어볼 것 다 물어봤으면 어서 내려가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

화영은 오늘 당연히 그 사람을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만나서 무슨 얘기든 할 줄 알았는데, 상황이 그녀의 예상을 빗나가자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성련도.

“…….”

걸화도.

세 여인의 계획에 이런 일은 없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소저들, 볼일을 다 보았으면 내려갑시다. 여기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교준이 잡고 있던 사내를 놓고, 여인들을 산 아래로 이끌었다.

교준에게 잡혀있던 사내, 방철은 당장 달려가 패거리를 이끌고 올 생각도 하지 않고 교준과 화영 일행이 사라지는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일행은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산 초입에 있던 순찰당주 방철에게 유운의 소식을 알아낸 것이라, 산을 내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화영의 얼굴은 어두웠다.

오랫동안 아팠던 화영은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유운을 찾아가겠다 마음먹었다.

마음을 먹고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집에서 천초산으로 오는 내내, 그분을 보고 싶은 마음과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는 죄책감이 싸워댔다.

산을 오르면서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자신이 모질게 끊어냈던 그에 대한 미안함이 뒤범벅되어 속이 불편했다.

혹여 이번에는 그분이 자신을 밀어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한껏 긴장했던 화영은 힘이 쭉 빠졌다.

마차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넋을 놓은 화영은 도저히 말을 붙여볼 상태가 아니었다.

걸화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준이 신의님께 오늘 일을 이르고, 화영의 몸이 더 나빠지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이다.

화영의 건강도 문제였고, 신의와 백가장주가 자신을 어찌 벌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후회했다.

‘괜히 남의 일에 오지랖을 부려가지고… 지 앞가림도 못 하면서…….’

생각 끝에 연천이 떠올랐다.

불안한 마음에, 불편한 감정까지 더해져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일행은 점심도 거르고, 넋이 반쯤 나간 화영을 데리고 서둘러 백가장에 도착했다.

걸화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백가장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애간장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제발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빌었다.

그리고, 다시는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차에 내려 백가장으로 들어서던 걸화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흐억…….”

백가장의 앞마당 평상에, 백가장주와 신의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죽었다… 나는 이제 죽었어, 아… 무섭다…….’

걸화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화영 일행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신의와 가주가 찻잔을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아… 미치겠다. 그냥 지금 도망갈까? 아이씨… 그러게 가만히 있지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는… 어쩌지? 어쩌지?’

걸화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구나.”

가주가 자신의 딸 화영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님! 소녀가 오랜만에 나갔더니 몸이 곤하여 일찍 돌아왔습니다.”

화영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하였다, 표정이 좋구나.”

가주가 흐뭇한 얼굴로 딸을 보았다.

“별일은 없었느냐?”

신의가 교준에게 물었다.

쪼그라들던 걸화의 심장이 폭발할 것 같았다.

“…화영 소저가 조금 피곤해하였으나, 다들 즐겁게 보내다 왔습니다.”

융통성이라고는 개뿔도 없어 보이는 교준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걸화가 고개를 획 돌려 교준을 쳐다보았다.

신의를 향한 교준의 얼굴은 공손했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단정했다.

걸화도 깜빡 속을 만큼 태연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걸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의녀님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가주의 말에 걸화가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화영도 교준도 말없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기에 걸화는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했다.

‘우와… 진짜 심장이 닳아서 없어지는 줄 알았네…….’

걸화는 심장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자신의 방에서 뻗어버렸다.

다음 날 아침, 걸화는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 어제 너무 신경을 썼더니 안 아픈 데가 없어… 배고파……. 밥도 안 먹고 잤구나…….’

비적비적 걸어가 대충 얼굴을 닦고 아침을 해결한 걸화는 다시 방에 드러누워 버렸다.

약을 달여야 하는데… 몸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의녀님! 의녀님 계시어요?”

걸화의 방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오?”

방문을 열던, 걸화는 다시 문을 닫아버리고 싶었다.

문밖에는 화영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서 있었다.

연지를 바른 볼은 생기 있는 살구색을 띠었다.

“들어오세요.”

산송장 같은 몰골의 걸화가 화영을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의녀님! 어제 많이 힘드셨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고운 얼굴의 화영은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인 것을요.”

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나, 어제는 맘고생에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의녀님! 저 결심했습니다. 그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화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네에? 그럼 원남으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깜짝 놀란 걸화의 목소리가 높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때린 것도 아닌데, 꼭 맞은 것처럼 아파왔다.

화영이 원남에 청사파 사내를 찾으러 가면서 허락을 받고 갈 리는 없었다.

몰래 집을 나가겠다는 소리였다.

뒷골도 쑤셔왔다.

집 안에서 곱게만 자란 화영이 혼자서 가기엔 너무 멀고 위험한 길이었다.

원남으로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불안하고 걱정되고 말리고 싶었다.

‘내가 무림행을 가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새삼 개방에 있는 아버지가 떠올랐다.

머리는 쉬지 않고 지끈거렸다.

“하아…….”

걸화가 침음을 흘렸다.

“원남이라면,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찾아가 볼 것입니다.”

화영이 덧붙였다.

“…….”

걸화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화영이 연모하는 사내와 잘 되길 너무 바랐다.

하지만, 혼자 원남으로 가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뭔가가 두들겨대는 것처럼 아파오는 머리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의녀님께 제 결심을 제일 먼저 말하고 싶었습니다. 의녀님이 아니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화영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저 때문에요?”

환한 화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걸화의 표정은 불안했다.

“의녀님이 오시기 전에는 다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녀님이 되돌릴 수 있으니, 되돌리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의녀님 말씀대로 되돌려 보려고 합니다.”

화영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랬어요……?”

걸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그러셨어요. 의녀님은 가문도 아버지도 다 버리고 그분을 따라가려 하셨다면서요.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허걱…….”

걸화의 가슴에 무언가가 날아와 세게 꽂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사람들이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걸화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아주 불편하고, 거북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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