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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8화 (108/230)

108화

화영의 방문 앞에서 숨을 내쉰, 걸화가 얼굴을 풀었다.

조심스레 인기척을 하고 화영의 방문을 열었다.

다행히 소천은 가고 없었다.

오랜만에 다녀간 소천 때문인지, 평소보다 기운을 많이 차린 화영은 누워있지 않고 침상에 앉아있었다.

“소저! 친우분이 오셔서 그런지 더 좋아 보입니다.”

걸화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화영에게 다가갔다.

걸화는 평소처럼 수저로 약을 떠먹이지 않고 화영에게 약사발을 내밀었다.

화영은 사발을 받아서 진한 갈색의 탕약을 쭉 마시고 빈 사발을 다시 걸화에게 내밀었다.

걸화가 익숙하게 약사발을 챙겼다.

“의녀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화영이 또렷한 목소리로 걸화를 향해 말했다.

걸화가 화영을 돌아보았다.

“저… 되돌리고 싶습니다. 그분을 찾아가서 다시 되돌리고 싶습니다.”

화영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에?”

눈을 똥그랗게 뜬 걸화의 목소리는 높았다.

“의녀님 덕분에 이리 마음먹었습니다. 도와주세요.”

화영의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흠…….”

걸화가 사발을 내려놓고 침상에 걸터앉자, 화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걸화의 손을 통해 그녀에게 용기를 얻으려는 것 같았다.

어둑하던 사위가 깜깜해질 때까지 걸화는 화영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 * *

걸화는 약재를 정리하며 힐끔힐끔 신의를 쳐다보았다.

신의는 눈을 내리감고 노래를 흥얼거리듯, 뭔가를 되뇌는 듯, 혼자 중얼거리며 부채질을 해대고 있었다.

할 일을 마친 걸화가 신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갔다.

“신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걸화가 샐샐 웃으며, 고운 목소리로 신의를 불렀다.

“…….”

신의가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떴다.

잘 정리된 약재를 보며, 흐뭇한 얼굴로 걸화를 바라보았다.

“신의님! 저… 화영 소저와 함께 바람 좀 쐬고 오면 아니 되겠습니까? 소저가 몸이 많이 좋아졌는데 방에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하여…….”

걸화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걸화의 말을 들으며 신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래에 몸이 많이 좋아지긴 했더구나.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너무 무리하지 않게 다녀오거라.”

“네에―”

‘됐다!!’

걸화가 씨익 웃었다.

“교준아!!”

신의가 밖에 선 교준을 불렀다.

신의의 부름에 교준이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

“교준이를 데리고 가거라.”

신의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느긋하게 말했다.

“네에? 저… 저… 화영 소저를 호위해 주는 분이 계시다고 합니다. 그분과 같이 갈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걸화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교준이도 함께 가거라.”

신의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과단했다.

“네…….”

신의의 말에 뭐라 더 붙이지 못한 걸화가 마지못해 대답하면서, 어찌하면 교준을 떼어놓을지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음 날, 교준과 걸화는 신의께 인사를 하고 그들의 거처에서 나왔다.

교준은 곧장 백가장 정문으로 향했다.

“교준 대협!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해요.”

걸화가 웃으며 말했다.

걸화가 웃는 모습에 교준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책 없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평온한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걸화가 남장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걸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교준을 이끌었다.

교준은 긴장한 얼굴로 걸화를 따랐다.

“교준 대협!”

걸화가 교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할 말을 바로 꺼내지 않고 잔뜩 뜸을 들였다.

“…….”

교준은 걸화의 동글한 입술을 쳐다보며 무슨 말이 나올지 기대했다.

마른침을 삼키는 교준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걸화는 막상 교준을 불렀으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따라오지 말라고 한들, 순순히 따를 리가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 생각했지만, 교준을 떼어놓을 만한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협! 신의님을 모신다고 힘들지요?”

교준은 걸화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 별것 아닌 말에 교준은 생각이 많아졌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나를 걱정해주는 것인가? 뭔가 내게 부탁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하루 교준 대협의 휴가라고 생각하고 푹 쉬는 건 어때요? 나와 화영 소저는… 우리는 또 여인들끼리 할 이야기도 있고…….”

걸화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

교준이 걸화의 환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걸화는 가지런한 치아가 다 드러나게 입을 벌려 웃었다.

뽀얀 볼에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그렇게 한다고 대답해요! 빨리!!’

멍하게 걸화를 보던 교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신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저는 소저와 함께 가야 합니다.”

교준이 정신을 차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걸화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교준은 걸화를 못 본 척 백가장의 정문으로 향했다.

걸화는 교준의 뒤통수에 대고 구시렁대며 그 뒤를 따랐다.

정문에는 백가장의 마차가 있었다.

마차에는 화영과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 성련이 있었다.

성련은 화영이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그녀의 호위이자 친우이자 친동기 같은 사이라고 했다.

믿을 수 있는 여인이라고 하여, 오늘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걸화는 무려 교준을 달고 나타났다.

화영과 성련은 교준에게 떨떠름하게 목 인사를 하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성련은 마차를 몰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교준을 믿지 못해 그러는 것이었다.

걸화는 고민했다.

교준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못 가게 말릴 것이다.

그렇다고 화영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것이다.

다른 날로 시일을 미루는 것은 쉽지 않을 게다.

화영의 건강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크게 용기를 낸 일이었다.

다시 마음먹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걸화는 표정 없는 교준을 빤히 쳐다보다 결심을 했다.

일단 저질러보기로.

그게 배걸화다웠다.

어차피, 화영이 청사파 사내를 데리고 오면 다 알게 될 일이었다.

뒷일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팠다.

“이분은 괜찮으니 출발하셔도 돼요.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걸화가 어색하게 거짓말을 했다.

화영이 찝찝한 눈으로 교준을 쳐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련이 고삐를 잡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성련이 마차를 몰았다.

“저도 밖에 있겠습니다.”

화영이 자꾸 힐끔거리는 통에 불편한 교준이 마차를 모는 성련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의녀님! 저분은 신의님과 함께 온 분이 아닙니까? 정말 믿을 수 있는 분입니까?”

화영이 목소리를 낮추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못 믿죠. 우리가 하는 일을 신의님께 다 일러바칠지도 몰라요…….’

걸화는 화영에게 미안해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걱정 마세요. 교준 대협은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계획대로 하세요. 대협을 믿기 힘들면 저를 믿으세요.”

화영이 많이 고민하고 오늘을 계획한 것을 알기에 걸화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일이 잘못되었다가 화영이 다시 드러누울 수도 있었다.

화영이 아픈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걸화는 세상의 잣대에 헤어진 두 남녀가 자신과 연천인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자신이 연천과 같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두 사람을 꼭 이어주고 싶었다.

혹여 일이 잘못되어 들키기라도 하면, 자신이 화영을 꼬드겼다고 싹싹 빌 생각이었다.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다.

화영이 불안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걸화가 조용히 화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마차는 백가장에서 멀지 않은 천초산 아래에서 멈추었다.

성련과 화영, 걸화가 마차에서 내렸다.

교준만이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살폈다.

“소저! 소저들… 여기는 꽃놀이를 할 만한 산이 아닙니다. 산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나 이곳은 안 됩니다.”

“먼저 올라가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걸화가 화영과 성련에게 말했다.

화영과 성련은 걸화를 보고 마음을 굳힌 듯 산으로 향했다.

“아니! 소저들! 멈추시오! 이 산은 위험한 산입니다. 이 산에는 청사파라는 악랄한 사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자들이 여인들을 잡아다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교준이 산을 오르려는 두 여인에게 소리쳤다.

“대협! 조용히 해요!”

걸화의 입에서 나온, 낮은 목소리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어서 가세요.”

걸화가 화영과 성련을 재촉했다.

화영이 불안한 얼굴로 교준을 쳐다보았다.

저 사내가 믿지 못할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이곳까지 와버렸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늦었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화영은 교준을 흘깃 보고는 산을 올랐다.

성련이 화영을 따랐다.

교준은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화영과 성련을 따라야 하는데, 걸화가 굳은 얼굴로 자신 앞을 막고 있었기에.

“대협! 우리는 지금 청사파를 찾아가는 거예요. 청사파에 찾을 사람이 있으니 대협은 잠자코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대협이 신의님께 오늘 일을 일러도 어쩔 수 없지만, 정말 환자인 화영 소저를 위한다면 신의님과 백가장주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마음이 급한 걸화가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 표정만은 단호했다.

말을 끝낸 걸화는 화영과 성련을 따라 산을 올랐다.

교준이 혼란한 심정으로 걸화를 따랐다.

교준은 산을 타며 주위를 살폈다.

작은 소리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앞장서는 화영의 얼굴은 복잡했다.

사악하다는 청사파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긴장감과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그가 거절할까 봐 이는 두려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화영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감정들이 뒤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세 여인을 따르던 교준이 갑자기 여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갑작스런 교준의 움직임에 성련도 몸을 낮추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걸화와 화영은 그 자리에 붙박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곧이어, 걸화와 화영, 성련 앞을 막고 있던 교준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으억…….”

“악!”

퍽―

“아아악!”

“침입… 윽…….”

마지막 신음과 함께 사위가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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