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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7화 (107/230)

107화

“의녀님은 정말 용기 있는 분이군요…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저는 가문을 저버릴 용기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너무 후회됩니다. 이제 와서 이리 후회해 보았자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을요.”

화영이 쓸쓸하게 말했다.

“왜 되돌릴 수 없습니까? 그분을 찾아가서 되돌리면 되지 않습니까? 되돌리십시오.”

걸화의 말에 화영의 눈이 맑은 광채로 반짝거렸다.

덜컥―

갑자기 화영의 방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앞에 화려한 들꽃 다발을 든 여인이 서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색을 맞춘 의복과 머리 장식, 화장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갖춘 모습이었다.

그녀는 남궁세가의 여식이자, 화영의 친우인 남궁소천이었다.

남궁소천은 문 앞에서 멈춘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걸화와 화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불쾌함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소천아! 어서 와!”

화영이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는 소천을 불렀다.

소천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방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걸화를 잔뜩 경계하면서 말이다.

“소천아! 신의님과 함께 오신 의녀님이야, 인사해.”

화영이 가까이 온 소천에게 걸화를 소개했다.

그리고 걸화에게도 말했다.

“의녀님! 제 친우인 남궁소천이라고 해요. 며칠에 한 번씩 찾아와요.”

“어머! 죄송해요. 의녀님이셨군요. 저는 웬 사내가 화영의 방에 있기에 그 청사파 사내인 줄 알고 오해했어요. 죄송합니다.”

소천이 굳은 얼굴을 풀고 걸화에게 사과했다.

“청사파?”

걸화가 되묻자, 소천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멋…….”

화영이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은 가장 친한 친우인 소천과 자신의 호위이자 자매처럼 자란 성련뿐이었다.

백가장에 소속되어 아버지의 명을 받는 성련은 이 일에 대해 말을 아꼈고, 소천은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눈앞의 의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사파의 사내를 염모했다가 문파 때문에 사내에게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느끼는 아픔을 똑같이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이 이리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이 의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함께 아파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일었었다.

의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지 말지 꽤나 망설였지만, 이왕 이리된 것 자신의 속내를 다 터놓기로 마음먹는 화영이었다.

“소천아! 의녀님께는 이야기해도 괜찮아, 의녀님! 제가 염모하는 분이 청사파에 소속된 분입니다.”

화영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화영의 말에 걸화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파 중에 사악하지 않다고 소문난 곳은 없지만, 청사파는 특히나 악독하고 흉악스럽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곳의 사내를 염모하게 되었다니, 화영이 입을 딱 다물고 시름시름 앓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염모하는 분은 무슨! 내가 몇 번을 말해? 정신 차려! 그리 철없이 굴다가 남은 네 인생은 물론이고 너로 인해 백가장까지 손가락질받게 된다고!!”

소천이 화영에게 쏘아붙이는 것을 들으며, 걸화는 걸윤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연천을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걸윤이 저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나로 인해 아버지와 개방의 모든 식구들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걸화의 기분이 씁쓸했다.

“화영아! 정신 차려, 혼례는 소꿉장난이 아니야. 신랑감은 고르고 골라서 정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을 해?”

소천이 화영을 달래듯 말했다.

“…….”

화영은 말이 없었다.

“으흠…….”

소천은 그런 화영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다가 높이 치뜨자, 깨끗한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소천은 저 철없는 친우를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었다.

말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멀뚱히 있던 걸화는 정말 궁금했다.

어떤 사람과 혼례를 치러야 하는지 모든 것을 꿰고 있는 듯한 소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신랑감을 골라야 합니까?”

“하…….”

소천이 한숨을 내뱉었다.

이미 화영에서 수백 번 한 말을 다시 하려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가문입니다. 무엇보다 가문이 좋아야지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뭐… 그것이 어려우면 이름을 들어 알만한 가문이나 표국, 상회도 괜찮아요.”

소천이 도도한 얼굴로 말했다.

“네에? 가문을 먼저 본다고요?”

걸화가 정말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신랑감을 고르려면 무엇보다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지 그 가문을 본다고?

걸화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연하죠. 웬만큼 이름 있는 가문은 돈과 명예… 대부분이 갖추어져 있으니 크게 문제가 없지만 그게 안 되면 최소한 손가락질 받지는 않는 집안에 돈이 많은 곳으로 정해야 해요. 무공도 뛰어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돈으로 무인을 사면되니깐.”

소천의 당당한 표정에 걸화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구파일방이라 하면 대부분 혼례를 올리지 못하는 문파 아닙니까?”

걸화의 물음에 소천이 가볍게 미소를 보이고 답했다.

“그러니 속가제자를 택해야지요. 돈 많은 상회나 표국에서 구파일방에 속가제자로 보내는 그런 경우가 좋지요. 집안으로 돌아오면 돈도 많고 구파일방의 소속이라는 꼬리표도 있고, 무공도 어느 정도 할 것이고, 더없이 좋은 조건이지요.”

소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걸화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천을 보았다.

“…….”

화영은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였다.

친우인 소천의 말이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마음 깊이 박힌 그 사내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헤어나기가 어려웠다.

보고 싶어도 참고, 생각나도 모른 척 버티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자신은 정말 괜찮다 싶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멍하니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소천의 이야기를 듣던 걸화는 문뜩 개방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개방도 구파일방의 하나이니 당연히 인정은 받겠지만, 저 똑 부러지게 말하는 여인에게서 듣고 싶었다.

“소저! 구파일방이면… 개방은 어떻습니까?”

“네에?”

걸화의 눈에는 소천이 앉은 자리에서 족히 다섯 치는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펄쩍 뛰었다.

“의녀님! 아무리 그래도 어찌 거지를 짝으로 고르라 하십니까? 잘 몰라서 그리하였다 저는 이해하지만 어디 가서 그런 말씀 마십시오! 뺨 맞습니다!”

소천이 정말 못마땅한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

걸화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구파일방, 구파일방 그리 입에 달고 있더니…….

개방도 구파일방의 하나인데 저리 펄쩍 뛸 것까지야.

소천은 소천대로 불쾌했다.

아무리 의술만 공부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지만,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의 여식에게 어찌 거지를 들이댄다는 말인가?

이건 남궁세가가 아니라 어디다 들이대도 뺨을 맞든, 욕을 먹든 암튼 좋은 소리 듣지 못할 짓거리였다.

“하아…….”

소천이 불쾌한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묻은 것도 없는 옷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왔던 꽃을 들어, 화영의 방 꽃병에 꽂았다.

“…….”

너무 당황에서 눈만 끔뻑이며, 소천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걸화는 성질이 올라왔다.

자기 집안이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앞에 새하얀 약사발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소천을 흘겨보았다.

‘개방이 어디가 어때서!! 남궁세가? 암튼 저 오대세가라는 것들…….’

걸화의 머릿속에 제갈련도 떠올랐다.

싸잡아서 꼴 보기 싫었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걸화가 약사발과 쟁반을 챙겨 일어섰다.

걸화는 신의에게 가르침을 계속 받고 싶었다.

잘 배워서 걸부에게 꼭 영단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약사발로 남궁세가 여식의 머리통을 깨면, 그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소천과 화영이 방을 나서는 걸화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

걸화는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화영의 방을 나섰다.

“어휴우!!”

성질을 참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남궁세가가 잘나면 뭐 얼마나 잘났다고, 그게 지가 잘난 건가? 쳇! 생긴 것은 꼭 불여시처럼 생겨가지고… 에잇!’

걸화는 발에 차이는 돌멩이를 세게 걷어차고 저벅저벅 걸었다.

걸화는 불여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남궁소천의 출중한 미모는 중원에서 유명했다.

부지런히 외모를 가꾸고, 언제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곱게 꾸미고 다녔다.

거기다, 오대세가의 하나인 남궁세가의 여식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리했고, 그 덕에 글공부도 무공도 웬만큼은 해내고 있었다.

미모까지 뛰어나니, 그녀에게 목매는 사내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미 혼담을 거절한 집안도 여럿 있었다.

그러니, 남궁소천의 입장에서는 고를 수밖에.

남편감의 됨됨이며, 인물과 무공, 재력과 소속된 문파의 평판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자와 혼례를 올리고 싶은 마음은 당연했다.

한데,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는 친우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저리 어리석은 소리를 해대며 누워있다.

거기다 그녀를 치료하러 온 의녀라는 사람은 더 기가 찬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개방? 거지를?

평생 시집을 못 가고 혼자 살았으면 살았지, 어디 사람이 없어서 거지와 혼례를 치르겠는가.

태어나서 들은 말 중 가장 불쾌하고, 어이없는 이야기였다.

아픈 친우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얼른 집에 가서 언짢은 말을 들은 귀를 씻고 싶었다.

그날 저녁, 걸화는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약사발을 들고 화영의 방으로 향했다.

이전의 걸화였으면 기분이 나쁘면 할 일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제 맘대로 행동했겠지만, 다행히 지금의 걸화는 제법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조용히 은둔한 2년의 세월 때문인지, 연천과 함께 무림행을 다녔던 것 때문이었는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걸화는 몸과 함께 마음도 크고 있었다.

열 받고 기분이 더러워도 정해진 약재를 정확히 재어서 은근한 불에 약을 달였다.

달인 약을 사발에 짜 담아서 화영의 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상황이 어떠하건 할 일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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