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신의! 드디어 오셨군요.”
가주가 그렇게 말하고,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시일이 좀 지체되었구려.”
신의가 미안한 기색 없이 말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예정에 없이 개방에 머문 기간이 달포가 넘었다.
그 기간만큼 백가장에 늦은 것이다.
하지만, 백가장주는 신의가 잊지 않고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신의도 그 정도 늦은 것에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환자를 먼저 보시겠습니까?”
마음 급한 백가장주가 이제 겨우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은 신의를 재촉했다.
그간 의원들이 다녀간 것과 신의를 찾기 위해 애쓴 것, 겨우 연락이 닿았는데도 달포나 늦은 것을 생각하면, 백가장주 입장에서는 서두를 만도 했다.
“가주께서 이리 재촉을 하시는데 그리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환자는 어디 있소?”
신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가주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따라오시지요.”
가주는 신의 일행을 작고 예쁜 앞마당을 둔 전각으로 안내했다.
교준은 익숙한 듯 문 앞에 서 있고, 걸화는 신의를 따라 안으로 들었다.
깨끗하고 예쁘게 장식이 된 방은 백가장의 여식 화영의 방이었다.
백가장주가 침상에 드리워진 진홍빛 장막을 올렸다.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을 한 화영이 누워있었다.
백가장주가 시름 깊은 얼굴로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으흠!”
신의가 뒤에서 헛기침을 하자, 백가장주는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신의는 느긋하게 화영의 침상에 걸터앉아 맥을 짚었다.
방 안의 모두가 눈을 감은 신의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신의가 화영의 손을 내려놓고 걸화에게 말했다.
“짚어 보거라.”
걸화도 침상에 걸터앉아 화영의 맥을 잡았다.
신경을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작은 울림이 걸화의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깊은 대맥의 혈이 졸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 같았다.
그 아래 심장 소리처럼 두근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뚝뚝 끊기는 것과 같은 맥이 작게 울렸다.
걸화가 눈을 감고 화영을 잡은 손에 더욱 집중했다.
안정되지 못한 맥의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구름처럼 흩날렸다.
흩어졌다 모이기도 하고 모여서 휘청거렸다.
걸화가 천천히 눈을 뜨고 화영의 손을 침상에 올려놓았다.
“어떠하냐?”
걸화에게 묻는 신의의 목소리에는 흥이 담겨있었다.
맥을 짚은 후 걸화가 하는 대답이 기대되어서였다.
때로는 아주 정확하게, 때로는 세세하게, 때로는 장황하게 설명하는 걸화의 답을 듣는 것이 흥미로웠다.
“대맥의 혈이 강하지 못하고 가늘게 겨우 흐릅니다. 끊기듯 두근거리는 듯한 맥이 느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흩날리는 것처럼 휘청대었습니다.”
신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서 이야기하세.”
백가장의 가주가 신의를 객실로 모셨다.
신의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백가장주가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허허… 가주! 참 성질도 급하시오. 내 숨 좀 돌리세.”
신의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해댔다.
“…….”
백가장주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지만, 신의의 입만 쳐다보며 기다렸다.
성질 급한 걸화도 신의의 여유로운 모습이 답답했다.
빨리빨리 말해 줘버리면 될 것을 뭘 저리 꾸물거리는 건지.
신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가장주의 시선은 신의의 입으로 빨려 들어갈 듯 한껏 집중되었다.
“회심병일세.”
기다린 것에 비해, 턱없이 짧은 답이었다.
“…….”
신의의 말에 백가장주가 눈을 끔뻑였다.
“약재로 잠시 증상을 완화시킬 수는 있으나 약이 없는 병이지.”
말을 끝낸 신의가 다시 부채를 흔들었다.
“회심병…이오?”
가주가 미간을 모으고 되물었다.
“상사병이라고도 하지.”
신의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하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들을 보던 신의의 눈에 회심병은 별 볼 일 없어 보이긴 하겠지.
“무어요?”
백가장주는 이미 들은 말을 또 물었다.
“…….”
신의는 가주를 쳐다볼 뿐 달리 말이 없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해 줄 만큼, 신의는 친절한 사람이 못되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백가장주가 질문을 바꾸어 물었다.
“그것을 의원인 내가 어찌 알겠나?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허…….”
가주는 생각지도 못한 신의의 말에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걸화는 신의가 처방한 약재를 달였다.
신의가 늘 하듯이 탕약기에 부채질을 해가며 달인 약을 화영에게 먹이는 것도 걸화의 일이었다.
화영은 신의가 내린 탕약 덕분에 기력을 되찾았으나, 자신이 상사병이라는 것을 부인하고는 입을 꼭 다물었다.
“신의! 저 아이가 저리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지금은 신의가 있어 기력을 찾았지만, 신의가 떠나고 나면 또다시 몸져누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백가장주는 답답했다.
신의는 화영이 회심병인 것을 알고 곧 백가장을 떠나려고 했다.
백가장주가 가지 못하게 막는 통에 계속 백가장에 잡혀(?)있었다.
정말 급한 일이 있다면 백가장주가 사정을 하든 말든 물리치고 가버릴 신의였다.
여유가 있는 것인지, 회심병을 어찌 고쳐볼 심산인지 속을 알 수 없는 신의가 못 이기는 척 백가장에 머물렀다.
백가장주로서는 일단 한시름 놓았으나, 화영이 낫기도 전에 신의가 떠나버릴까 봐 노심초사였다.
“회심병이 가벼이 볼 것이 아니긴 하지요. 상사병이 도저 죽는 사람도 있으니깐.”
백가장주는 시름시름 앓는 여식 때문에 하루하루 말라갔건만, 태평한 것인지 어쩐 것인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신의의 대꾸였다.
“그럼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그것은 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깐…….”
신의의 대답은 무심했다.
걸화는 약사발을 들고 화영의 거처로 들었다.
처음보다 나아지기는 하였으나 핏기없는 얼굴의 화영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걸화는 화영의 등에 베개를 여러 개 괴어 상체를 높이고, 약사발을 들어 숟가락으로 화영의 입속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화영은 사흘째 하루 세 번 자신의 거처에 약을 들고 오는 의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의원은 사내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여인임이 숨겨지지 않았다.
앞섶이 두둑하고 허리가 낭창낭창했다.
무엇보다 곱고 선이 가는 얼굴은 남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여인이시지요?”
화영이 숟가락과 약사발을 챙기는 걸화에게 물었다.
손을 멈춘 걸화의 얼굴이 당황의 빛으로 물들었다.
지금껏 자신이 여인인 것을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천과 함께 다니던 때에는 아직 어려서 그녀의 여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걸화는 달랐다.
모르긴 해도 알아보는 이들이 종종 있을 것이다.
“…어찌 아셨습니까?”
걸화가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그리 고운 얼굴이 겨우 남장으로 가려지겠습니까?”
화영의 말에 걸화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대답과 달리 화영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소저는 마음의 병입니다. 치료가 어렵기도, 쉽기도 하지요. 저도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았었는데… 뭐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말하는 걸화의 머릿속에는 연천이 떠올랐다.
“의녀님도 누군가를 염모한 적이 있나 봅니다.”
화영이 기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 염모…였나? 그냥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그것뿐이었는데 그것도 힘들다고 하더군요. 저는 정파니 사파니 그런 것을 나눠서 사람 구분하는 것 정말 싫습니다.”
걸화가 생각만 해도 짜증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별것도 아닌 이야기에 화영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채를 띠었다.
“염모하던 분이 사파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이었나 봅니다.”
기운 없던 화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네… 뭐…….”
걸화가 얼버무리며 답했다.
“제가 염모하는 분도 사파에 몸담고 있습니다.”
화영은 지금까지 걸화가 본 중에 가장 힘 있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
뒤의 ‘네’는 거의 외침에 가깝게 목소리가 올라갔다.
화영의 핏기 없는 얼굴에 붉은빛이 돌았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인지, 꼭꼭 숨겨 놓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부끄러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놀라셨습니까?”
화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밖으로 내밀었던 작은 마음이 다시 구석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요! 아니요! 안 놀랐어요. 저는 하나도 안 놀랐습니다. 정말 안 놀랐어요.”
걸화가 과장되게 대꾸했다.
“놀라실 만도 하지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시오. 절대 아버지가 아시면 안 됩니다.”
잠시 고민하던 화영은 결국 마음을 숨기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들은 것을 어찌 못 들은 것으로 합니까? 그리고 사파의 사내를 염모하는 것이 무슨 큰 죄입니까? 그 사내도 자신이 사파가 되고 싶어서 되었습니까? …되고 싶어 되었나?”
당당하게 말하던 걸화는 혹시 그 사내가 선택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말꼬리가 흐려졌다.
“아닙니다, 그분도 너무 어려 어찌 그곳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라보니 그곳 사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절대 그분이 선택한 것 아닙니다.”
화영이 급하게 변명을 했다.
“그렇죠? 정파니 사파니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도 서로 미워하고 가까이 지내지도 못하게 하는 것 저는 정말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걸화의 언성이 높아졌다.
“의녀님은 저와 생각이 같군요.”
화영이 엷게 미소 지었다.
“네!”
걸화가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걸화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혈영천마의 제자라고, 정파인 걸화를 밀어내는 연천이지만.
“그분은 아주 좋은 분입니다. 단지… 사파에 소속되어 그렇지… 하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분과 인연을 맺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가문을 생각하면….”
화영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소저는 소저가 그리 생각하셨군요. 저는 아버지도 집도 다 버리고 쫓아가겠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안 된다고 저를 내쳤습니다. 치… 나쁜…….”
생각할수록 속에 뭔가가 울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