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신의를 따라】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걸화는 녹초가 되었다.
연천 옆에 붙어서 웃어대는 제갈련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지 않기 위해 모임 내내 자기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해대었기 때문이었다.
개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젓는 연천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느라 그나마 있는 힘도 쪽 빠져버렸다.
천상은 걸화의 마차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나갔다.
후기지수 모임에서 걸화의 마음이 바뀌었기를 바라며, 거기서 그럴듯한 사내놈이라도 하나 데리고 왔기를 기대하며.
마차의 문을 연 천상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바닥에 뻗어 코를 골아대는 걸화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천상은 다음날에도 걸화에게 모임이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눈꽃처럼 새하얀 유군을 입고 새까만 머리를 풀어헤치고 풀꽃 향기를 풍기며, 마차 바닥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꼴을 보고 뭘 묻겠는가.
안 봐도 알만했다.
‘그냥 강이랑 혼례를 올리는 건데, 괜한 욕심을 부려가지고… 지금 준비하면 늦으려나? 대엿새 뒤면 신의가 올 텐데…….’
천상은 우울했다.
꼼짝없이 걸화를 신의에게 보내게 생겼으니.
* * *
후기지수 모임에서 천상이 바라는 성과는 전혀 없었다.
걸화는 친우를 사귀지도 못했고, 눈이 맞은 사내도 없었다.
남의 집 여식의 머리채를 잡아 뜯지 않고, 귀찮게 구는 사내놈의 눈탱이를 향해 주먹을 날리지 않은 것이 성과라면 나름의 성과였다.
천상이 그렇지 않아도 속이 상한데, 관에 왕진을 갔던 신의는 나흘이나 일찍 개방으로 돌아왔다.
표정 관리를 하려고 해도 불편한 기색이 자꾸만 드러나는 천상이었다.
“방주는 어디 몸이 불편하신가? 내가 맥이라도 좀 짚어봐 드리리까?”
신의가 여유롭고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에 기분이 더 나빠지는 천상이었다.
“되었네.”
“그럼… 개방에 몸이 불편한 자가 있으면 데려와 보게. 내 여기까지 왔으니 보아주고 가겠네, 걸화도 불러오고. 아! 개방에 의약당이 있지? 그리 안내해 주게나.”
“끄응… 알겠네.”
천상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짧게 말을 내뱉었다.
온몸에 붉은 반점이 뒤덮인 개방의 환자를 내려다보는 신의는 느긋했다.
걸화도 신의 옆에 앉아서 환자를 바라보았다.
걸화의 미간이 좁아지며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누워있는 개방도를 자신이 뒷간에 빠트린 적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각하느라 말이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혹여, 자신 때문에 똥독이 올라 지금껏 고생하는 것이라면…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다행인지 어쩐 것인지, 그자는 똥독 때문에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개방 총타의 거지들은 세상 누구보다 똥독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정통해 있었다.
수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다 보니 그리되었다.
덕분에, 개방에는 똥독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은 없었다.
“맥을 짚어 보거라, 엄지손가락에서 내려가는 손목 아래의 이 부분을 촌관척이라고 한다. 이곳을 검지, 중지, 약지 세 손가락으로 이렇게 짚는 것이다.”
신의가 시범을 보이자, 걸화가 따라서 환자의 맥을 잡았다.
“손가락 끝에 기운을 모아 맥박의 흐름을 느껴보아라.”
신의의 말에 걸화가 집중을 하고 환자를 잡은 손에 신경을 모았다.
미세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손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크고 무거운 두근거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가만히 그 느낌을 주시하고 있으니, 큰 맥박 주위를 휘감는 끈적하고 불규칙한 맥이 함께 느껴졌다.
한참을 더 맥에 집중하던 걸화가 조심스럽게 환자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어떠냐?”
맥을 짚는 걸화를 유심히 쳐다보던 신의가 물었다.
“음… 크고 묵직한 하나의 맥이 흐르고 그 주위로 작은 맥들이 달라붙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잡힙니다.”
걸화가 자신의 느낀 바를 신의에게 설명했다.
“그렇지.”
신의가 흡족한 얼굴로 대꾸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놀라웠다.
아무리 옆에서 가르쳐도 맥을 느끼는 것은 맥을 잡은 이가 온전히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정확한 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고, 자리를 찾았다고 한들 그곳에 손가락만 올려놓는다고 다 맥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세하고 세밀한 맥을 읽어내는 섬세한 손끝의 감각과 예민한 기감이 필요한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작업이었다.
걸화가 그것을 단번에 해내고 있었다.
신의는 스스로의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배걸화라는 아이가 신통하고 대견했다.
“음!”
헛기침을 하고, 생각을 떨쳐낸 신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반진이다. 심장에 화의 기운이 폐를 눌러 나타나는 것이지. 몸이 허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아, 피부는 몸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곳이다. 몸의 기혈이 건강하면 피부 또한 그러하다. 이 경우에는 몸을 보하고 폐의 열기를 빼주어야 하느니라.”
“네…….”
걸화가 대답했다.
“교준아! 교준이 이리 와 보거라.”
신의가 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교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교준이의 맥을 짚어 보거라.”
교준이 잠시 망설이다 걸화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걸화가 교준의 손목을 잡자, 그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교준의 맥은 굵고 탄탄하고 기운찼다.
주된 맥 뒤로 작은 맥박 또한 강하면서 주된 맥박과 조화를 이루어, 폭포를 향해 나아가는 산속의 계곡처럼 거침없이 흘렀다.
“그것이 건강한 자의 맥이니라. 기억해 두어라, 생각이 나지 않으면 교준이의 맥을 자주 짚어 보아라.”
“네.”
걸화가 답하고 교준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신의는 힐긋힐긋 걸화를 쳐다보았다.
이 짧은 순간에 묵묵히 맥을 집어내는 걸화가 말할 수 없이 기특했다.
어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걸화는 열흘 가까이 신의와 함께 여러 명의 개방도의 맥을 짚어 보고 약재를 골라 약을 달였다.
신의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 걸화를 보쌈하듯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아쉬움에 여식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방주를 보아서 개방에 머문 것이다.
걸화를 가르치려면 어디든 환자가 있는 곳이어야 했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개방에는 꽤나 많은 환자들이 줄지어 있었기에 걸화를 가르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이제 슬슬 채비를 하자.”
신의가 마지막 환자에게 탕약을 주고서 걸화에게 말했다.
천상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신의 딴은 그에게 시간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신의는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 * *
개방을 떠나는 날 아침, 걸화가 남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 모습에 가장 놀란 것은 교준이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은 맑고, 큰 눈 속에 박힌 눈동자는 길고 짙은 속눈썹 아래에서 반짝했다.
열여덟이나 먹은 걸화의 여성이 남장에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숨겨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남장을 하며 묘한 매력을 풍겨댔다.
“그리하고 갈 것이냐?”
신의가 남장한 걸화를 보며 물었다.
“이리하는 것이 편합니다. 배걸아라고 불러주시어요.”
걸화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배걸아’라는 세 글자에 가슴이 아릿했다.
지금껏 자신을 그 이름으로 불러준 이는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배걸아로 살아보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좋겠구나. 그만 가자.”
신의의 말에 천상이 걸화의 손을 잡았다.
“걸화야! 너무 힘들면 신의께 말씀드려 그만하고 돌아와도 된다.”
걸화가 미소 띤 얼굴로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볼우물이 깊게 패인 걸화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교준이 입을 헤벌쩍 벌리고 걸화를 바라보았다.
“걸화야, 사람은 다 제각기 사정이라는 것이 있단다. 그자도 자기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혹여 궁금하면 오라비가 알아봐 주랴?”
걸윤이 걸화 앞에 서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돼. 알고 싶지 않아, 그 사정.”
거짓말이다.
알고 싶었다, 너무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알아낸다고 해도 더 이상 백연천이라는 사람 옆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
어차피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알아보았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머리만 더 복잡할 테니깐.
“그래, 잘 다녀와라.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게다.”
걸윤은 걸화가 신의의 의술 수련을 온전히 끝내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걸화가 그토록 바라는 무림행을 나가, 넓은 세상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를 바랐다.
신의 옆은 안전할 테니…….
그리고, 연천 때문에 힘든 마음을 세상 속에서 위로받기를 희원했다.
신의의 그늘은 개방과는 다를 것이다.
개방에서야 믿는 구석이 있어 제멋대로 사고를 치고 돌아다녔지만, 신의 밑에서는 그러기 힘들 것이다.
이번 기회에 철도 좀 들었으면 싶었다.
걸윤의 말에 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영단 먹은 건 너무 미안해, 내가 그건 잊지 않고 꼭 갚을게.”
걸화가 걸부에게 말했다.
“그것은 괜찮으니 몸조심하거라, 아버지 말씀대로 힘들면 돌아와도 된다.”
걸부가 답했다.
“나와 동행하는데 몸이 건강하지 않을 이유가 무에 있겠느냐? 어서 가자.”
신의가 부채질하며 재촉했다.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걸부 형, 걸윤아 다녀올게.”
걸화가 반듯하게 인사하고 신의를 따라나섰다.
천상과 걸부, 걸윤은 신이 일행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는 딸, 누이가 중원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몰래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서 말이다.
천상의 가슴이 아릿한 게 눈가가 젖어왔다.
* * *
신의 일행은 개방 아래의 마을로 내려와 마차를 구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교준이 신의에게 물었다.
“음… 아직 시일이 있는 듯하니 백가장으로 가자꾸나.”
신의가 답했다.
교준이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았다.
크고 묵직한 마차는 천천히 백가장을 향해 달렸다.
며칠을 달린 마차가 백가장의 대문 앞에서 멈추자 신의가 내렸고, 교준과 걸화가 그 뒤를 따랐다.
신의를 본 시종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입구를 지키던 다른 시종이 신의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신의는 그 말을 들은 체 만 체하고 부채를 살랑대며 시종을 따랐다.
시종을 따라가는 중에, 맞은편에서 백가장의 가주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체통도 생각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