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보은상회의 가주는 백연천이 맞다.
걸화가 백연천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그런데 그가 왜 보은상회의 가주인가?
그는 산에서 스승과 둘이서만 살았던 백연천인데…….
서역?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2년 전이면 걸화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 것이다.
대체 그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촌티 줄줄 흐르던 백연천이 자신감 넘치는 보은상회의 가주가 된 것이란 말인가.
걸화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고, 속은 답답했다.
그 대단한 보은상회 가주가 된 백연천에게 배걸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가주님! 이것 한번 드셔보시어요. 저는 이리 살살 녹는 향어는 처음 먹어 봅니다. 역시 보은상회의 숙수 실력이 대단합니다.”
초연희가 젓가락으로 생선 한 점을 집어 연천의 앞에 놓인 접시에 올렸다.
“고맙소, 소저가 주니 특별히 더 맛이 좋소.”
초연희가 올려 준 생선을 입에 넣은 연천이 웃으며 말했다.
굳은 걸화의 얼굴에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가주님 어깨에 무엇이 묻었습니다.”
제갈련이 연천의 어깨를 톡톡 털며 말했다.
“고맙소.”
연천이 제갈련을 보고 미소 지으며 답했다.
걸화가 앞의 호리병을 거칠게 잡아채 자신의 잔에 부었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저,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곳의 지리도 잘 모르실 텐데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모용진이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다녀올 터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걸화가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무언가를 꾹꾹 누르며 겨우 대답하고 밖으로 나섰다.
전각 밖까지 연천과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걸화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았다.
어디서건 성질을 내야지 가만히 있었다가는 사고 칠 것 같았다.
백연천의 멱살을 그러쥐건, 옆에서 계속 얼쩡대는 사내놈의 면상에 주먹을 내리꽂건, 앞에서 실실 웃는 계집애의 머리채를 낚아채건, 뭔 짓을 할 것 같았다.
쿵쾅거리며 걷던 걸화는 전각에서 떨어진 후미진 곳을 찾았다.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왜!”
전각에서 멀리 떨어진, 후원 구석에서 혼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후원을 급하게 왔다 갔다 걸음을 옮겼다.
허연 옷을 입은 마른 여인이 같은 자리에서 후다닥거리며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괴이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생각해도 연천이 왜 보은상회의 가주이고,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과 동행할 수 없다고 하는 것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혼자서 구시렁대며 휘적휘적 후원을 걷던 걸화는 한편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리도 허탈할 수가 없었다.
영친왕에게 복수할 것만 생각하던 자신의 2년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보다 그와 연천이 함께 했던 그 시간은 무엇이며, 대체 백연천은 누구란 말인가?
복잡한 머리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쉬이 삭혀지지가 않았다.
연천을 보고 있으면 그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따져 들 것만 같아 전각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백연천이라는 사람에게 그리도 의지했는데, 그 순한 얼굴을 믿었는데…….’
저 백연천은 자신이 알던 그가 아니었다.
걸화는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외로 꼬고 돌덩이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전각에서 떨어진 후원은 조용했다.
풀벌레가 울어대는 소리만 걸화의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걸화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기운 없고 다 꼴 보기 싫었다.
“휴우…….”
크게 한숨을 내쉬어도, 속이 답답했다.
맑은 햇살이 나무와 꽃과 돌덩이에 앉은 여인을 비추었다.
정성 들여 꾸며 놓은 후원과 그 한편에 앉아있는 여인.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뒤숭숭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머릿속이 비는 것 같아서 편안했다.
“혼자 이곳에서 뭘 하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걸화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놀랐습니까? 미안하게 됐습니다… 소저가 들어오지 않기에 걱정이 되어….”
연천이 정말 미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
걸화는 커진 눈으로 연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처음이라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
걸화는 답 없이 연천을 쳐다보았다.
연천이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소저를 오늘 처음 보았는데 왜 이리 낯이 익은지 모르겠습니다. 혹여 저를 본 적이 없습니까?”
“허……!”
걸화는 기가 찼다.
‘정말 못 알아보는구나. 고작 머리를 풀고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었다고 못 알아보는 것이야?’
걸화는 고작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백연천과 함께 다니던 꼬질꼬질한 배걸아와 한껏 꾸민 공도상회의 설화는 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었다.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연천이 걱정 어린 눈으로 물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걸화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혹여 사내인 아우가 있지는 않습니까? 소저를 보는데 딱 생각나는 사람이 있지 뭡니까?”
연천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두 분뿐입니다.”
“그렇겠지요…….”
연천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저를 보고 생각난다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걸화는 연천이 무슨 말을 할지 정말 궁금했다.
“으흠… 아주… 재미난 아이입니다.”
연천의 입가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천진한 미소가 번졌다.
‘나 말하는 거지? 재미난 아이가, 그게 다야? 배걸아가 백연천한테 고작 재미난 아이일 뿐이야?’
겨우 삭힌 뭔가가 속에서 울컥거렸다.
“어린아이인데… 성질도 괴팍하고 지저분하기는 또 얼마나 지저분한지… 거기다 고집은 황소고집이 따로 없지요.”
연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걸화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말하는 연천은 몰랐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그 소리에 속이 편하겠는가?
걸화가 주먹을 꼭 쥐었다.
손에 힘을 빼면 연천을 향해, 뭔가를 집어던지든 주먹을 날리든… 암튼 뭔 짓을 할 것 같았기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 나 더럽다! 안 씻어서 더럽고 성질도 더럽다!’
“한데 그 아이와 있으면 그리도 재미있었습니다. 너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해서 바보처럼 자꾸 웃음만 나오지 뭡니까.”
연천은 눈앞의 여인을 보며,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미소가 깊어졌다.
“…….”
걸화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오랜만이었다.
연천의 그 미소가.
전각 안에서 후기지수들을 향해, 내내 미소와 웃음을 걸치고 있던 연천이었다.
하지만, 그건 백연천의 미소가 아니었다.
지금이 진짜 백연천이었다.
모자란 듯 어수룩하고 꾸밈없이 순박하고, 어린아이처럼 깨끗한 저 웃음이 진짜 백연천의 웃음이었다.
반듯하게 입을 벌리고 하하하 소리나 내는 건 백연천의 웃음이 아니었다.
걸화는 티 없이 웃는 연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지난 2년간 말할 수 없이 그리웠던 얼굴이었다.
함께 다닐 때, 바보 같다 놀려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 아이가 그립습니다.”
한숨을 쉬듯이 내뱉었다.
연천의 얼굴에는 아득한 그리움이 남았다.
“…….”
걸화의 숨이 딱 막혔다.
“그 작은 아이가 보고 싶군요.”
연천의 낮은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연천의 말에 반짝이는 작은 빛줄기가 걸화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걸화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만나면 되질 않습니까?”
그녀의 진심이었다.
걸화는 느릿하게 입을 여는 연천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그 아이에게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라… 어찌… 내 욕심만 부리겠습니까…….”
연천의 한숨 섞인 대답에는 무거운 시름과 미련이 남아있었다.
걸화는 지금이 모처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연천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만하면 이전처럼 같이 다닐 수도 있었다.
연천이 마음만 바꿔먹는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아이의 생각은 모르지 않습니까? 좋지 못하다 해도 같이 있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의 의견도 존중해 주는 것이….”
“두 분이서 무얼 하시는 겁니까?”
걸화는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에 말을 맺지 못했다.
말하는 여인은 제갈련이었다.
언제 왔는지 걸화와 연천을 보는 그녀의 눈은 날이 서 있었다.
“설화 소저가 길을 잃은 모양입니다. 소저! 어서 들어갑시다.”
연천의 말에 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련이 앞장서서 걷는 연천의 소맷자락을 붙들어 함께 걸었다.
걸화는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옮겨, 어기적대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백연천이 보은상회의 가주이고, 그 백연천이 배걸아를 그리워했다.
그것으로 된 것인가?
걸화의 속에서 치밀어 오르던 화가 가라앉았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편에 짠한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이 연천을 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천도 배걸아를 그리워했다.
걸화는 그것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연천이 보은상회 가주인 것을 알았으니 찾아와서 볼 수도 있었다.
이렇게 1년에 한 번씩 후기지수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기만 힘들어하고, 자신만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는 그 사실만으로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걸화는 모임 내내 도를 닦는 기분으로 앉아있었다.
아주 대놓고 연천의 손을 주무르고 음식을 올려주는 여인들과 허허거리며 그것을 받아주는 연천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걸화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길고 긴 시간을 버텼다.
옆에서 웬 놈들이 이런저런 말을 붙였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답 없는 빙긋한 미소뿐이었다.
온통 연천과 그 주변의 여인들에게 신경이 쏠린 걸화로서는 그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말하지 않고 먹지 않고, 엉덩이도 긁지 않고 다리도 떨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걸화는 신비롭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천상이 그리도 바라던 그 모습,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내들을 홀리고 있었다.
정작 걸화는 그 사내들이 귀찮게 구는 인간들일 뿐이었지만.
걸화는 다시 연천과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제갈련을 노려보았다.
‘아씨… 저 기집애만 아니면 잘 설득할 수도 있었는데… 어휴… 저거, 저거 가만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