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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3화 (103/230)

103화

마차가 멈추자 걸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이전의 걸화였다면 정말 도망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걸화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형… 걸윤에게도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이 별것 아닌 일을 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반대편에서는 정말 하기 싫었다.

야속하게도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걸화의 마음을 모르는, 시종이 착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걸화는 굳은 얼굴로 마차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보은상회 앞에는 시녀와 시종들이 2열로 도열해 있었다.

그중에 한 시녀가 걸화 곁으로 다가왔다.

“어느 집안의 누구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보은상회 시녀의 물음에 걸화가 대동한 시녀가 대답했다.

“공도상회의 설화 아가씨입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시녀가 앞장섰다.

걸화는 표정 없이 보은상회의 시녀를 따랐고, 걸화의 시녀가 그녀 뒤를 따랐다.

보은상회의 분점은 분점임에도 규모가 크고, 시녀와 시종의 수도 많았다.

가주의 취향인지, 집을 꾸미는 자가 부러 그리한 것인지 입구부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나무가 양쪽 벽을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관리가 잘 된 나무들은 숲에 온 것 같은 시원한 청량감을 주었다.

앞서가던 시녀는 커다란 전각으로 걸화를 안내하고, 전각 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 뭐라고 속삭인 뒤 다시 정문으로 돌아갔다.

“설화 아가씨! 안으로 드시지요.”

사내가 전각 안으로 걸화를 안내했다.

걸화는 무거운 마음으로 사내를 따랐다.

사내가 익숙하게 전각의 문을 열어젖히자, 이야기를 나누던 스무 명쯤 되는 이들의 목소리가 딱 끊기며 그 모두의 눈이 걸화에게로 쏟아졌다.

사내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도상회의 설화 아가씨입니다.”

걸화에게 들러붙은 시선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변했다.

‘하! 공도상회 주제에 여길 온다고?’

‘곱다…….’

‘흥! 얼굴이 반반해서 사내 꽤나 울리겠는데.’

‘공도상회? 그곳은 거지들이 운영하는 것 아니었나?’

그들은 그 짧은 순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걸화를 판단하고 있었다.

눈을 내리깐 걸화가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사내는 걸화를 후기지수들이 앉아있는 탁자에 걸화의 자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걸화는 자신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는 이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보통은 자리에 앉기 전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지만, 걸화는 무릎을 숙여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자리가 될 것 같았다.

보은상회에서 후기지수 모임을 열면서 특정 문파에 초대장을 보낸 것도 아니고, 특정 문파를 콕 집어서 오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방을 붙이고 여기저기 모임에 대한 소문을 낸 것뿐이었다.

방에도 그렇고, 소문 속에서도 많은 가문의 후기지수들의 참여를 바란다고 쓰여 있었다.

한데, 첫 모임부터 오늘 세 번째 모임까지 참석한 가문을 보면 오대세가,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상회에 속한 자들이 전부라고 할 법했다.

그 외엔 그들과 친분이 있어, 함께 오는 다른 가문의 자제들이 몇 명 있는 것이 전부였다.

걸화의 맞은편에 앉은 제갈련이 걸화를 훑어보며 조소했다.

공도상회가 중원에서 결코 만만하게 볼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판매하는 물건이 없으니 점포의 크기는 작았지만, 전 중원에 퍼져 있는 점포의 개수도 어마어마했고, 벌어들이는 금전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오대상회에 비해 재력이나 입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처음 본 사람을 비웃을 것까지야…….

걸화는 제갈련의 비웃음을 못 본 척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개방의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간담을 쓸어내렸을 만한 일이었다.

걸화는 조그마한 일도 그냥 넘기는 성정이 못되었으니.

“후우…….”

걸화는 아버지와 걸부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기로 했다.

그들을 위해 딱 몇 시진만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걸화는 이곳에서 짝이나 친우를 찾을 마음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신의를 따라나서면 언제 개방에 돌아올지 몰랐다.

이 몇 시진으로 아버지와 걸부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면 버텨보리라.

제갈련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뒷간에서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피할 수 있었으니.

“모용세가의 모용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모임은 처음인가 봅니다.”

걸화의 옆자리로 다가온 모용진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네.”

걸화가 눈을 내리깐 채, 마지못해 답했다.

“여기 정원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곳 보은상회 가주께서 후기지수 모임을 가지신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저는 그 세 번 모두 참석을 했습니다. 혹여 궁금하신 거라도 있으면 제게 편히 말씀하세요.”

모용진이 걸화를 보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청운상회의 소가주 공지엽이라고 합니다. 공도상회에 대해서 좀 알지요. 워낙 가주께서 얼굴을 보이시지 않아 개방 방주님이 그 주인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봅니다?”

오대상회 중 하나인 청운상회의 소가주가 걸화에게 물었다.

걸화가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서군표국에 허윤광이라고 합니다. 오늘 모임에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걸화를 보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걸화는 여전히 작은 미소로 답했다.

세 명의 사내가 걸화의 양옆과 앞을 차지하고는 그녀에게 호감 어린 눈빛을 보내며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었지만, 걸화는 그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저것들은 왜 사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고 귀찮게 구는 게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제발 아무도 자신을 건들지 않기를, 눈앞에서 자신을 흘깃대며 빙글빙글 웃는 제갈련의 머리통을 깨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주님이 늦으시네.”

붉은색의 커다란 머리 장식을 한 제갈련이 문 쪽으로 목을 쭉 빼며 말했다.

움직일 때마다 떨잠이 떨렸다.

“소저는 그저 가주님밖에 눈에 들어오는 이가 없구려?”

주과상회의 초연희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걸화는 이 전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서 모임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복건의 그 객잔에는 무슨 일로 왔던 걸까?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제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수백 번 다짐했건만, 백연천은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었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방문이 열리며 걸화를 안내했던 사내가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보은상회 가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소리에 제갈련이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느라 분주했다.

보은상회의 가주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탁자의 한 가운데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걸화는 자신의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내가 없어도 괜찮으려나?’

보은상회 가주는 탁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임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많이들 드시고, 즐겁게 쉬시며 좋은 인연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보은상회 가주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2년 동안 잘 살았던 모양이던데 뭘…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는 거겠지…….’

걸화의 머릿속에서 연천에게로 흐르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예의 바른 인사말을 늘어놓던 보은상회의 가주가 말을 이었다.

“오늘 처음 오신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설화소저?”

가주의 말에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걸화에게 쏠렸다.

걸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겠지? 먹어 봤자 또 국수지 뭘… 나 아니면 그마저도 건너뛰고 잘 먹지도 않는데…….’

“설화 소저! 공도상회의 설화 소저!”

보은상회 가주가 여러 차례 걸화를 불렀지만, 걸화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빠져있었다.

걸화의 옆자리에 앉은 모용진이 보다 못해 걸화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걸화가 모용진을 돌아보자 모용진이 걸화의 맞은편 옆으로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보은상회의 가주를 가리켰다.

걸화는 모용진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 보은상회 가주를 쳐다보았다.

걸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당히 불쾌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걸화와 눈이 마주친 보은상회 가주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자신감에 차서 수십의 후기지수들을 향해 인사말을 하던 보은상회 가주가 걸화에게 시선을 향한 채 말을 멈추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하하하, 설화 소저가 아름답기는 하지요? 열 여인을 마다하던 가주마저도 이리 넋을 놓으시니.”

공지엽의 말에 보은상회 가주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였다.

“설화 소저! 반갑습니다! 오늘 재미있게 즐기다 가십시오.”

가주가 짧게 말을 마쳤다.

굳은 얼굴로 가주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화를 향해, 제갈련이 불쾌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

그리고 시선을 다시 보은상회 가주에게로 옮겼다.

“가주님!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어찌 모임이 아니면 연락 한번을 아니 주십니까?”

제갈련이 환하게 웃으며 가주에게 말했다.

가주도 웃었다.

의연하고 당당한 웃음이었다.

“미안하오. 내 바빠서 그만.”

가주의 얼굴을 뚫을 듯 쳐다보는 걸화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깨를 쭉 펴고 상석에 앉아있는 보은상회의 가주.

자신의 옆에 달라붙어 앉은 제갈련을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그는….

그가 바로 걸화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사내, 백연천이었다.

“소저! 무엇이 불편하십니까?”

모용진이 걸화의 굳은 얼굴을 보고 물었다.

“아닙니다… 저분이 보은상회의 가주입니까?”

걸화가 연천에게 향했던 시선을 겨우 거두고 물었다.

“네, 참으로 잘났지요? 같은 사내가 보아도 잘났다 싶습니다.”

모용진의 목소리에서 연천을 향한 질투가 묻어났다.

“보은상회 가주는 서역에서 공부하다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만.”

걸화가 물었다.

“소저도 소문을 들으셨군요. 맞습니다. 그간 보은상회의 가주도 소가주도 얼굴을 본 이가 없었지요. 듣자 하니 가주님은 건강이 나쁘시고 소가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서역에서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2년 전쯤 가주 자리를 물려받으며 보은상회로 돌아왔지요.”

모용진의 말에 걸화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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