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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2화 (102/230)

102화

자리에서 일어선 천상이 염문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염문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염문강은 천상이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기꾼도 아니고 노름꾼도 아니고, 주색에 빠지지도 않은 놈이라……. 강아!!”

천상이 염문강을 불렀다.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말이다.

“네? 네… 방주님!”

“너 걸화가 어떠냐?”

“네?!”

염문강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눈을 뎅그렇게 뜨고 천상을 쳐다보았다.

“너 내 사위하자!”

“네… 네? 네에?”

염문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왜? 싫으냐?”

천상이 삐딱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 그것이 아니오라…….”

염문강의 말문이 막혔다.

내공을 실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천상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말을 해대던, 그 영리하고 말 잘하는 염문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부르르 떨어댔다.

천상을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염문강은 총타에 처음 들인 어린 거지들 중 하나였다.

배움을 받는 거지들 중에 유난히 총명하고 침착해서, 지금은 천상의 모사 일을 맡고 있었다.

말이 모사이지, 성질이 급해 뭐든지 저지르고 보는 천상을 말리는 게 그의 주된 일이었다.

지금도 모사 일을 보는 염문강의 스승이 계시기는 했지만, 연세도 많고 천상의 말에 꼬박꼬박 토를 달다 보니 천상은 주로 염문강을 옆에 두었다.

염문강은 천상의 심기를 최대한 덜 건드리며, 그를 저지하는 요령이… 아니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그가 모사가 된 이래, 아니 개방에 들어온 이래, 아니 태어난 이래, 가장 위험한 순간에 처하게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뭔 일이 터질지 모른다.

걸화를 신의에게 보내기 싫은 천상의 심기는 이미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후…….”

염문강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던가.

‘걸화와 혼례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방주의 사위 자리? 어느 거지가 싫다고 하겠는가?

걸화? 지금의 모습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예뻤다.

염문강도 사내고 눈이 있으니 걸화가 미색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염문강은 걸화의 어린 시절을 너무 속속들이 보았다.

아름다운 미색 위로 거지들을 똥통에 빠트리고, 짱돌을 던져대는 구역질 나게 더러운 한 생명체의 모습이 겹쳐졌다.

염문강이 작게 진저리를 쳤다.

“왜 답이 없느냐?”

천상이 뒤로 물러난 염문강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불쾌함이 번지고 있었다.

천상의 뒤로 걸부와 걸윤의 어쩌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 들어왔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어찌… 제가 감히 아가씨와…….”

염문강이 더듬거렸다.

“괜찮아, 감히는 무슨… 그럼 혼례 준비를 하여라!”

천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명했다.

염문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대로 있으면 꼼짝없이 걸화와 혼례를 치를 것이다.

성질 급한 천상의 일처리는 무섭도록 빠르니.

“저… 저… 저… 바, 방주님!”

염문강이 겨우 천상을 불렀다.

“사위!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

천상이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그… 아가씨는… 아무래도 명문가에 시집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어디 가서 명문가 사내를 찾겠나?”

“후, 후기지수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 보내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후기지수 모임?”

“네! 중원의 명문가 자제들은 죄다 모일 겁니다.”

“그래?”

천상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염문강은 속으로 제발 천상의 마음이 바뀌기를 빌었다.

“모임 참석자 수가 서른은 족히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염문강이 빠르게 말했다.

물론 그 서른에는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염문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

천상의 마음속에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났다.

데리고 있는 거지보다야 명문가 자제가 백번 낫지.

“그 모임에서 만난 황보세가 자식과 서문세가의 여식이 얼마 전에 약혼했습니다.”

염문강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모임에서 만나서 약혼을 했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었다.

두 가문에 혼담이 오가던 차에, 모임에서 만난 두 남녀가 가까워지긴 했지만.

모임이 다른 목적 없이 그저 친목만을 위한 것이라, 친우를 사귀고 미래의 배우자감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과 가까워지는 의미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모임에 간다고 무조건 혼례 상대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모임 한번 가서 짝부터 찾아올 리는 없다고 봐야 했다.

염문강은 그것을 알면서도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명문가 자제를 들먹이며, 걸화를 모임에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 모임에 보내는 것이 나으려나?”

천상이 시원스럽게 답하지 않고 고민했다.

“네!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천상이 지시를 내린 것도 없는데, 염문강이 재빨리 답했다.

“강아!”

“네? 방주님!”

“사람이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게 도리가 아닌데…….”

“아,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를 위해서 명문가에 양보할 수 있습니다.”

염문강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렀다.

“그래?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천상이 아들들에게 물었다.

염문강이 아직도 제 색을 찾지 못한 허연 낯빛으로 걸부와 걸윤을 쳐다보았다.

“후기지수 모임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걸부는 ‘신의를 따라나서기 전에’라는 말을 삼켰다.

“꼭 혼례 치를 사내를 찾는 것이 아니라도 친우를 사귀어도 좋고, 다른 가문의 또래들과 가까워지는 것은 걸화에게도 좋을 겁니다.”

걸윤도 거들었다.

딱 봐도 염문강은 걸화와 혼례를 올릴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인륜지대사를 이리 급하게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걸윤은 신의와 함께 가는 것이 누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말에 염문강이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리 준비하여라.”

천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방주님!”

염문강이 힘주어 답했다.

“강아!”

자리에 앉은 천상이 다시 염문강을 불렀다.

염문강은 오늘 천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가슴이 푹푹 파이는 것 같았다.

“네에? 방주님?”

염문강이 불안한 얼굴로 답했다.

“그… 전부 좋은 가문의 자제들일 텐데, 개방에서 왔다고 하면 거지라고 무시하고 그러지 않겠나?”

“…….”

염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염문강이 입을 열었다.

“공도상회 가주의 딸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든 걸화를 후기지수 모임에 보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수일 내로 걸화와 혼인하게 생겼으니.

“공도상회? 그곳에 가주가 어디 있는가? 공도상회는 내가 주인인데.”

개방이 전국적으로 운영하는 점포, 정보를 사고파는 그 점포의 이름이 공도상회였다.

“공도상회는 개방에서 운영하는 상회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방주님이 공도상회의 주인이라고 나선 적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누가 가주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아가씨가 공도상회 가주의 여식이라고 하면 다들 개방과 연계되어 공도상회를 운영하는 가문이 있겠거니 생각할 겁니다.”

“배걸화라고 하면 내 딸인 것을 알 텐데?”

“그럼 가명이라도 지어 보내지요. 마음 맞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 개방의 자손인 것을 밝히면 되지 않겠습니까? 공도상회 가주의 딸인 것이 거짓도 아니고…….”

염문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래, 그럼 그리하여라.”

“신경 써서 채비하겠습니다.”

염문강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잠깐 사이 핼쑥하게 변해있었다.

* * *

걸화는 예쁘게 장식을 한 마차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은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찰랑거리며, 기분 좋은 향기가 마차 안에 퍼졌다.

뽀얗게 바른 분은 그녀의 맑은 얼굴을 한층 더 환하게 만들었다.

볼에 바른 복숭앗빛 연지는 귀여움과 생기를 가미해 주었고, 붉은 연지를 바른 도톰한 입술은 반짝이며 육감적인 빛을 더했다.

무엇보다 크고 또렷한 눈에 곱게 한 눈 화장은 그윽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성했다.

한번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미인의 모습이었다.

천상은 마차를 타는 딸에게 신신당부했다.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개방에 오면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만들어 줄 것이니 음식도 어지간하면 먹지 말고, 그리고… 그냥 가만히 있거라.”

걸화는 정말 가만히 있고 싶었다.

말을 하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멍한 머릿속에 연천에 대한 생각만 맴돌았다.

복건의 객잔에서 만난 연천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최상품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말투와 행동거지, 표정 등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영친왕의 성에서 나온 직후, 연천을 찾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살았던 2년이 미어지게 안타까웠다.

그때 바로 찾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

소용없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이제는 정말 백연천이라는 사람과는 끝일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고 격려하고, 실수해도 다독여주던 그 따뜻한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묵직한 우울감이 밀려왔다.

걸화는 그늘진 고운 얼굴로 창밖의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후기지수 모임은 하남에 있는 보은상회의 분점에서 열렸다.

보은상회는 중원의 오대 상회 중 하나였다.

말이 좋아 오대 상회 중 하나이지 중원의 최고 상회라고 해도 반박할 자가 없을 정도의 규모와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상회가 10수년 만에 중원 최고의 상회가 되었는데, 아무도 가주의 얼굴을 본 이가 없었다.

아주 중요한 일에도 총관이 얼굴을 내밀 뿐이었다.

다행히 총관은 우직하면서도 노련하여 굳건한 신뢰를 유지했고, 가주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몇 해 전, 서역에서 공부하던 소가주가 돌아와 가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하더니, 며칠이 멀다 하고 중원의 주요한 가문들을 초대하고, 후원하고 또 초대를 받아 방문하였다.

중원의 거대 가문과 문파들을 들썩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기지수들의 모임도 1년에 한 번씩 주최했다.

자식들이 좋은 가문과 친분을 쌓아서 좋고, 정혼 할 짝이라도 찾으면 더 좋은 일이니 마다하지 않았다.

이름 있다는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한껏 꾸미고 와서 서로 추켜세우고, 은근히 집안 자랑을 해대며 인맥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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