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혼례를 올려라】
“뭐라? 그자가 살아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천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난 2년간 하루하루 말라가는 걸화를 보며 천상은 늘 연천이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가 정말로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친왕의 성에서 파옥을 하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
이게 어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중원 소식통인 개방이 그걸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천마검 도둑이 효시되지 않았느냐? 한데 그자는 어찌 살았지?”
걸부도 이해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값비싼 옷으로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신수가 훤했습니다.”
걸윤은 도도한 얼굴로 자신과 걸화를 내려다보던 연천의 얼굴이 떠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갑자기 그자에게 무슨 돈이 생겨서?”
천상이 물었다.
“살아있으면서 어찌 걸화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은 게지?”
걸부도 물었다.
연천의 모습은 의문투성이였다.
걸윤이 입을 열었다.
“걸화와 한참 이야기를 했는데 주위에 진법이 걸려 있는지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데… 그때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진실인 것 같습니다.”
걸윤이 알맹이를 쏙 빼놓고 이야기했다.
“무엇을 말하느냐?”
핵심이 빠진 걸윤의 말은 궁금증을 유발했다.
천상이 상체를 걸윤 쪽으로 쭉 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자가… 자신의 스승이 혈영천마라 하였습니다.”
걸윤이 느릿하게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이 진실인지 이걸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자신은 이것을 믿고 있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어? 혈영천마?!”
천상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네, 영친왕의 성에서 헤어질 때 그리 말했습니다. 그때는 당황해서 그자를 잡지 못했으나, 성을 빠져나와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자의 신수를 보면 그 말이 맞는 듯도 합니다.”
걸윤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마교에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 새로운 사파도 없고… 지금은 조용한 상황이야.”
걸부가 말했다.
“스승과 단둘이 산에서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자의 신수가 훤해진 것이 혈영천마의 추종자들을 만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검을 훔친 자들이 혈영천마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중원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 수도 있음이야…….”
천상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걸화는 다른 말은 없었어?”
걸부가 물었다.
“걸화는 그자의 사정을 아는 것인지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울면서 나왔습니다.”
걸윤이 씁쓸하게 말했다.
“…뭔가가 불안하구나…….”
천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주 계시오?”
문밖에서 들리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세 부자는 입을 다물었다.
신의였다.
“내 들어가겠소.”
신의는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천상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걸부와 걸윤이 일어서서 신의에게 인사를 했지만, 신의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자네 여식이 돌아왔다고 들었네만.”
“이제 막 돌아왔네, 여독이 풀리면 내 만나게 해줄 터이니 조금만 기다리게.”
신의에게 대꾸하는 천상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있었다.
집 나간 여식이 집으로 돌아왔건만 천상은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난번처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 신의가 제풀에 포기해 버릴 테니.
‘이번엔 어찌 저리도 빨리 돌아온 건지…….’
신의의 흡족한 표정에 불쾌함이 솟는 천상이었다.
“나도 바쁜 사람이니 서둘러주시게.”
신의가 느긋하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에휴우…….”
천상이 방 밖으로 사라지는 신의의 뒤통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걸화는 신의와 교준을 홀렸던 여인의 모습으로 천상의 집무실에 앉아있었다.
천상, 걸부, 걸윤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달리 신의의 여유로운 얼굴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천상이 침을 꼴깍 삼키며 신의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나와 함께 가자꾸나.”
세 부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의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걸화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성질 급한 천상이 신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나 차차 보아서 제자로 삼을 수도 있음이야.”
“…….”
걸화는 답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는 게냐? 싫은 것이냐? 내 자랑은 아니다만 내 제자가 되려고 목을 매는 자가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
“…….”
걸화는 묵묵히 신의의 말만 듣고 있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에 이리 좋은 기회가 또 없을 듯싶다만 네가 싫다 하면 내 없던 일로 하겠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아라, 너와 개방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신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의에게는 이미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중원 곳곳에서 의술을 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후계자는 정하지 못했다.
신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신의라는 이름을 끊기게 둘 수는 없었다.
그들 중 누구를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였다.
걸화만, 딱 걸화만 더 가르쳐보고… 이 아이만 더 보고 결정하자 마음먹는 신의였다.
걸화를 옆에 두고 가르쳐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칠 수도 있었고, 순순히 개방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가겠습니다.”
걸화가 짧게 대답했다.
“아… 아니…….”
천상은 자신이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신의의 뜻이었다.
거기다 걸화의 뜻이기도 했다.
걸화가 싫다 하면 모를까 걸화도 좋다고 한 마당에 자신이 말릴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개방에 와서 방주의 직계가 신의의 머리통까지 깼다.
그 책임을 묻지도 않고 데리고 다니며 의술까지 가르치겠다는데 그런 호의를 어찌 거절하겠는가.
자칫하다 신의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천상은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무리 신의의 호의고 좋은 자리이기는 하나 천상은 싫었다.
믿고 혼례를 올릴만한 사윗감을 찾기 전까지는 걸화를 옆에 두고 싶었다.
“그럼 준비하거라,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
천상의 복잡한 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신의가 명쾌하게 말했다.
“그리 빨리 가야 하는가?”
천상이 물었다.
“벌써 개방에서 시일을 너무 지체했어.”
“그래도 이건 너무 하네, 저 아이 집 떠났다가 어제 돌아왔네. 자네와 저 아이가 떠나면 또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내게 작별할 시간은 주어야 하지 않겠나?”
천상이 사정조로 말했다.
“허허… 걸화를 기다리느라 관에 약속한 시일이 벌써 지났어, 나도 더 지체할 수가 없네.”
“아비의 심정도 좀 헤아려주게나, 어미 없이 지금껏 혼자 키운 하나밖에 없는 여식일세.”
천상이 감정에 호소했다.
신의가 부채를 흔들며 생각에 잠기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그럼 관에는 나 혼자 다녀오겠네, 관에 다녀오면서 걸화를 데려가도록 하지. 보름쯤 걸릴 것이니 걸화는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거라.”
신의의 말에 천상의 걱정스럽던 얼굴이 펴졌다.
“네…….”
걸화가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 신의와 교준이 떠났다.
보름 후에 걸화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말이다.
천상은 염문강과 그의 아들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흐음…….”
천상은 또다시 침음을 흘렸다.
“방주님,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신의의 제자가 되겠다는 자가 줄을 섰습니다. 그런 분이 걸화를 선택하셨습니다.”
걸부가 말했다
“으흠…….”
천상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신의의 제자가 되기만 한다면, 걸화가 차기 신의가 될 수도 있었다.
중원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것이고, 모두가 그녀를 칭송할 것이다.
하지만, 천상은 싫었다.
의원이 된다는 것이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이겠는가?
세상 모든 약초를 알아야 했다.
약초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산이다.
온 산을 뒤집으며, 약초를 공부하고 사람의 온몸 기능을 알아야 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부터 고름이 잔뜩 끼인 사람, 독을 뒤집어쓴 사람, 연신 기침을 쏟아내는 사람… 암튼 그 위험한 이들을 가까이서 보살피는 일을 걸화가 하는 것이 싫었다.
거기다, 신의에게 보내면 1년에 한 번, 아니 몇 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 보내기 싫어졌다.
“개방에 들어온 복입니다. 걸화가 개방에 있어보았자 저리 넋을 놓고 있을 겁니다. 신의를 따라가는 것이 걸화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걸윤도 걸부의 말에 동의했다.
아들자식들이 하나같이 저리 말해도 천상은 걸화를 개방에서 멀지 않은 가문에 시집을 보내고 싶었다.
자주 볼 수 있고, 편히 살 수 있는…….
천상은 아들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깊이 생각에 빠졌다.
걸부과 걸윤은 입을 다물고 천상이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신의가… 걸화가 가지 않겠다면 없던 일로 한다고 하였지?”
천상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신의가 그렇게 말하긴 했다.
지나가는 말처럼…….
염문강은 불안한 눈으로 천상을 바라보았다.
천상이 저렇게 고민을 할 때면 뭔가 엉뚱한 의견을 내놓기 일쑤였기에.
천상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급하게 혼담을 넣을 곳을 찾아보거라!”
염문강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방주님! 지금 혼담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신의와 약속을 했는데 이제 혼담을 넣는다는 것을 신의를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그래?”
천상이 염문강을 삐딱하게 쳐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가서 사내놈 하나 데려와 보거라! 정인이 있어 못 간다면 신의가 어쩌겠느냐? 그냥 혼례를 치러버리자! 좋은 가문에 시집을 못 보내면 데릴사위를 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방주님! 아무리 그렇지만 걸화를 알지도 못하는 자와 갑자기 혼례를 치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기꾼인지 노름꾼인지, 주색에 빠진 놈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걸부가 침착하게 천상을 말렸다.
“그래?”
천상이 콧구멍을 크게 벌여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천상이 벌떡 일어났다.
염문강과 두 아들은 이야기 중에 벌떡벌떡 일어나는 천상을 익숙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