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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100화 (100/230)

100화

“으어어어… 으윽… 어억…….”

방 안에서 나는 큰 소리에 놀란 연천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세 명의 사내가 너덜너덜한 옷 한 벌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었다.

“아….”

연천은 못 본 척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들이 찾아낸 옷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스승님이 깊숙한 곳에 숨겨 놓은 것이었다.

연천은 스승님이 그 옷을 꺼내어 보는 것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피가 말라붙고, 심하게 찢어져 흉물스러운 옷이었다.

“스승님, 이 옷은 무엇입니까?”

어린 연천이 얼굴을 구기고 물었다.

“아주 아주 예전에 내가 입었던 것이다.”

스승님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고, 다시 깊이 넣어놓았다.

그것은 혈영천마가 세상에 자취를 감춘 그 날 입었던 옷이었다.

연천은 스승님의 짐을 정리할 때 미처 그것은 생각지 못했다.

일상에서 사용하던 옷가지 몇 벌만 정리하고 말았다.

저것까지 찾아낸 것을 보면, 세 명의 사내가 작은 방을 어지간히 헤집었나 보다.

연천은 방 안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를 못 들은 척 다시 앞을 응시했다.

한참 뒤, 연천은 기운 없는 세 명의 중년인을 이끌었다.

힘없이 비틀거리며 숙소에 도착한 신의는 함께 간 이들에게 시커먼 탕약을 내밀었다.

만약을 위해서 꼭 먹어야 한다고 우기는 통에 연천까지 씁쓸하고 들큼한 액체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날 밤, 연천은 오랜만에 깊게 잠이 들었다.

스승님을 뵙고 와서인지 자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다녀와서인지, 그들의 뜻대로 해보기로 마음을 정해서인지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리도 어색했던 폭신하고 부들부들한 이부자리가 편안했다.

* * *

무명촌으로 돌아온 후, 시종과 시녀가 들어와 연천을 깨끗하게 씻기고 닦였다.

연천은 그들에게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연천의 몸에 맞춰 제작한 옷 중 하나를 골라 입히고 반듯하게 머리를 빗어 올려주었다.

이마에 맨 남빛의 영웅건은 연천의 밝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그분의 눈이 정확하시었습니다. 이리도 훤칠하고 인물이 훌륭하신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모충일이 복색을 갈아입은 연천을 보고 말했다.

“고맙습니다.”

“가주! 말씀을 편히 하십시오.”

“차차… 그리하겠습니다.”

“검집을 새로 준비했습니다. 화려한 것은 꺼리시어 가진 것과 비슷한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모충일이 짙은 잿빛의 가죽으로 된 검집과 같은 색의 가죽끈을 내밀었다.

연천은 모충일에게 받은 검집과 가죽끈을 탁자에 올려두고,

항상 지니고 다니던, 때 탄 검을 꺼내 손잡이를 감고 있던 낡은 끈을 천천히 풀었다.

너덜너덜한 띠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풀려나갔다.

“아하…….”

모충일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듯 터져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연천이 끈을 풀어낸 검의 손잡이는 밝게 빛나는 작고 새하얀 보석이 자잘하게 박혀있었다.

모충일은 무언가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새삼스러운 얼굴로 연천과 검을 번갈아 보았다.

연천을 향한 그의 눈빛은 숭배에 가까웠다.

연천은 애써 모충일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검의 손잡이를 새로운 끈으로 천천히 감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모충일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모충일의 말이 맞았다.

서역에서 돌아온 소가주가 보은상회의 가주 자리에 올랐다는 소문이 돌자 이곳저곳에서 연천을 초대해댔다.

모충일은 초대하는 곳의 의중을 꿰뚫어 보았다.

“이곳은 그저 가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원하지 않으시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가주님과 친분을 쌓아두고 싶어 초대하는 곳이지요. 부담 없이 다녀오시면 될 겁니다.”

“이곳은 오랫동안 보은상회에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이지요. 아마 감사의 인사를 하려 부르는 것일 겁니다.”

“이 문파와는 앞날을 위해 잘 지내는 것이 좋을 테니 금전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겁니다.”

연천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무림의 모든 문파는 저마다 관계가 얽혀있었다.

다 같은 정파라고 해도 사이가 좋은 문파가 있고 좋지 않은 문파도 있었다.

그들의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들 한 가운데로 백연천과 보은상회가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중원에서 최고로 돈 많은 상회의 가주는 인심이 넉넉하여 후하게 원조했다.

인맥을 만들어 놓으면 좋게 쓰일 사람이었다.

사람의 눈은 똑같았고, 보은상회 백연천에 대한 평가는 비슷했다.

중원의 문파와 다른 상회에서 보은상회의 새로운 가주와 친분을 쌓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백연천은 이 문파, 저 상회의 초대를 받아 다니기 바빴고, 무인을 지원받는다는 명목으로 과분한 돈을 후원했다.

하지만 이 생활이 2년이나 되었음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연천은 답답했지만, 16년이나 기다린 모충일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보필하고 호위하고 챙기는 이들은 많았지만, 연천은 항상 혼자인 것 같았다.

언제나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빈 것 같았다.

그날은 보은상회 본점에 갔다가 무명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연천은 보은상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몰랐다.

화칙이 지금껏 알아서 운영했기에 알 필요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충일이 권하는 일이니, 가끔 가서 며칠씩 머물다 오는 게 전부였다.

연천은 보은상회의 가주이지만, 단 한 번도 보은상회가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스승님을 위해 맞지도 않는 자리에 잠시 앉았다고만 생각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고, 자신은 진짜 백연천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 생각 끝은 언제나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불안함이었다.

그날 저녁, 연천 일행은 무명촌에서 멀지 않은 객잔에서 묵기로 했다.

연천이 들어서기 한참 전에 앞서간 호위는 객잔에 연천이 오는 것을 알렸다.

보은상회의 가주, 백연천은 어디를 가든 이런 식이었다.

주위에서 미리 준비하고 말도 안 되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천은 그들의 행동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어서 옵쇼.”

객잔으로 백연천의 일행이 들어오자 점소이가 허리를 반듯하게 접어서 인사했다.

그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본 주인장과 점소이의 태도는 특별했다.

가끔 객잔에 들르는 보은상회 가주는 하루를 묵으면서 객잔의 반년 치 수입에 맞먹는 돈을 내어놓았다.

주인에게 주는 돈 말고도, 점소이에게 격려의 말과 함께 넉넉하게 웃돈을 집어주었다.

그들이 온다고만 하면 먹던 밥숟갈도 내팽개치고 뛰어나갈 만큼 중한 손님이었다.

어수선하던 객잔의 분위기가 보은상회 가주의 등장으로 싹 바뀌고 있었다.

주인장과 점소이는 가주 외의 손님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객잔에 있던 손들은 그 유명한 보은상회 가주에게 이목이 쏠렸다.

가주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경이 담긴 시선이 익숙한지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앞만 바라보았다.

그때, 객잔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연천의 시선이 돌아갔다.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나자빠진 그곳에 연천의 눈이 멈추었다.

아니, 연천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언젠가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것 같았다.

걸아가 객잔의 기물에 온몸을 부딪치며 휘청휘청 자신에게 걸어오는 그 모습이 낯이 익었다.

연천은 숨을 멈추고 걸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보은상회 가주가 된 후, 차갑게 얼어붙었던 감정이라는 것이 꿈틀거렸다.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인연도 있었다.

그런 인연은 모질게 끊어내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았다.

백연천과 배걸아는 그런 인연이었다.

잠시 흔들렸던 연천의 눈동자는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 *

연천과 헤어진 후, 걸윤은 걸화를 이끌고 개방으로 향했다.

두 마리의 말은 주인만큼이나 기운 없이 느른하게 나아갔다.

“에휴우…….”

걸윤은 걸화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 않겠다 발버둥 치지 않은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저 꼴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걸화는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는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말 위에 앉아있었다.

말이 흔들리는 대로 몸이 흐느적거렸지만,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걸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짐짝처럼 말 위에 실린 누이를 데리고 개방으로 향했다.

걸윤과 걸화가 말을 타고 개방 입구로 들어오는 것을 본, 거지 하나가 방주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가 소식을 전했다.

잠시 후, 천상과 걸부가 달려 나왔다.

“걸화야!”

천상이 걸화를 불렀다.

“아버지…….”

걸화가 메마른 목소리로 천상의 부름에 답했다.

“그래, 그래. 걸화야.”

천상이 말에서 내리는 걸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죄송해요.”

지금껏 걸화가 천상에게 수도 없이 한 말이지만, 그게 진심이라고 느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괜찮다, 이리 돌아왔으니 괜찮다.”

걸화를 다독이는 천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걸화가 영단을 훔쳐 달아난 이후, 한시도 마음을 졸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제발 살아서만 돌아와 달라고 내내 빌었다.

“걸부 형….”

걸화가 천상에게 손이 잡힌 채, 걸부를 보며 그를 불렀다.

“응….”

걸부가 가까이 와서, 자신의 팔을 걸화의 어깨에 둘러 토닥였다.

“미안해, 너무 미안해.”

버석하게 마른 걸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걸화도 알고 있었다.

그 영단이 걸부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영친왕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이 아니었다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백연천이 살아있었다.

복수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귀하고 아까운 걸부의 영단만 날린 셈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걸부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살아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오랫동안 기다린 영단이었지만, 걸부는 걸화를 탓하지 않았다.

걸화가 죽지 않고 살아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무리 귀한 영단이라도 누이의 목숨보다 귀하지는 못했으니.

“이제 안 그럴게요.”

걸화가 천상을 보고 말했다.

“그래. 됐다, 됐어. 무탈하게 돌아왔으면 되었지.”

“죄송해요…….”

“그간 힘들었지? 어서 들어가서 쉬자꾸나.”

“…….”

천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걸화는 자신의 전각인 안채의 내당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으흠….”

천상은 걸화의 뒷모습을 보고 침음을 흘릴 뿐이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걸부가 걸윤에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걸윤이 천상과 걸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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