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어찌 제가 상석에 앉겠습니까?”
연천과 모충일은 또 같은 실랑이 중이었다.
“천마가 되실 분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상석에 계시어야 하고, 아랫것들을 부리는 데 익숙해지셔야지요.”
모충일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공존하기 어려운 두 가지 모습을 함께 담아 말했다.
“으흠…….”
연천이 작게 침음을 흘리고, 마지못해 모충일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크고 화려하게 장식한 의자는 연천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불편한 얼굴로 모충일을 바라보았다.
“소개해드릴 이들이 있습니다. 들어오시게.”
모충일이 연천에게 말하곤 밖을 향해 외쳤다.
문밖에서 기다린 듯, 모충일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장년의 사내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충일을 중심으로 세 명의 사내가 나란히 연천의 맞은편에 섰다.
“소신 화칙이라고 하옵니다. 혈영천마님께서 천마로 계실 때 마교에 책사의 소임을 맡았지요. 지금은 보은상회의 총관으로 있습니다.”
화칙은 상관당월이 부교주가 된 후, 그의 뒤를 이어 책사가 되었다.
그 꼬장꼬장한 상관당월이 인정한 자였으니, 그의 비상하고 탁월한 능력은 알아 줄만 했다.
그가 있었기에 상회가 지금처럼 번성할 수 있었다.
우측의 사내가 말을 마치자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황임이라고 합니다. 의원이온데 사람들은 신의라고 부릅니다. 저는 마교에 몸을 담지는 않았으나 천마께서는 제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지요. 그분이 안 계셨으면 지금의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연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의라……. 하북팽가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걸아와 팽호연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는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고 했다.
출중한 의술로 어디서건 환영받고, 무림에 전쟁이 나건 어떤 무력 싸움이 있어도 신의만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했다.
그런 신의가 전대 마교의 천마를 아버지 같은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을 차리기 힘든 연천은 혼란스러웠다.
“소신 모충일입니다. 혈영천마님을 따르는 이들이 사는 마을, 무명촌의 촌장입니다. 과거 혈영천마님께서 천마의 자리에 계실 때, 교주의 호위를 맡은 천랑대의 대주였습니다.”
모충일이 새삼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세 명의 사내가 연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아… 아니…….”
나이 많은 세 명의 장년인이 자신을 향해 몸을 굽히자 연천은 안절부절못했다.
손을 내젓던 연천은 이내 포기하고 그들을 향해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은 몸을 바닥에 붙인 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모충일이 입을 열었다.
“저희의 주인이 되어주십시오.”
참… 사람 미칠 노릇이었다.
연천보다 인생을 배는 더 살아온 이들이었다.
중원 최고의 의원이고, 마교의 책사였고, 천마의 호위대장이었던 자가 자신에게 주인이 되어달라고 한다.
불편하고 불편하며, 또 불편했다.
“으흠…….”
연천이 가늘게 침음을 흘렸다.
“…….”
“…….”
“…….”
세 사람은 오체투지를 한 채 고집스럽게 일어나지 않았다.
연천의 불편한 마음이 점점 더 강하게 죄어 왔다.
“으흠….”
완고한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연천은 더 이상 결정을 미루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을 나가 백연천이라는 한 사람으로 살 것인지, 마을에서 혈영천마의 제자로 살 것인지 정해야 했다.
마을을 나가면 혼자서는 절대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의 이야기에 눈 닫고, 귀 막고 살아야 했다.
연천은 자신이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연천이 마지못해 작게 말했다.
그제야 세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연천은 다시 한번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 * *
조용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연천의 마음은 어수선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충일과 화칙, 신의 황임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스승님이 묻힌 곳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되어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남의 산에 숨어 살았으면서 이리 줄줄이 데려와도 되는가 싶었다.
“이곳은 당산이 아닙니까?”
화칙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보통 당산이라고 일컫는 산의 방향이 아니긴 했다.
대묘산을 타고 골짜기를 돌고 돌아 낭떠러지처럼 깎아지른 언덕을 내려왔지만, 바로 앞에 펼쳐진 진법은 당가의 것이었다.
혈영천마님이 사라지고 계속 당산을 의심했었다.
그때, 당가의 진법에 대해 엄청나게 연구를 했다.
끝내, 진법을 깨지도 당산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그 징글징글했던 진법은 금세 알아보았다.
“네, 맞습니다.”
연천이 태연하게 말하고 진법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 명의 장년인은 쭈뼛대며 연천을 따라 걸었다.
몇 걸음을 더 옮겼을 뿐인데 산의 풍경이 판이하게 변했다.
밝고 깨끗하던 풀빛은 칙칙했고,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뚝 끊어져 괴괴한 정적만 남았다.
향긋한 꽃향기와 싱싱한 풀냄새 대신 터분한 공기가 우중충한 숲을 채웠다.
“저희가 당산에 들어온 것입니까? 어찌 그 진법을 뚫고…….”
모충일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날 그분이 바로 몸을 피할만한 곳은 당산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산을 둘러싸고 있는 진법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진법에 경지가 높다는 자들을 여러 차례 데려와도 뚫지 못했다.
폐쇄적인 당가에 정보원을 심기도 어려웠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들어가려고 그리 애를 써도 되지 않던 것이 너무 쉽게 열리니 허무했다.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쓰린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저, 저것은 맹독성의 풀입니다. 근처에 가지도 만지지도 마십시오.”
진법 안으로 따라 들어오자마자, 신의 황임이 다급하게 말했다.
신의가 말한 독풀 옆을 연천은 천연하게 걸었다.
“아니! 저것도 독이 있습니다. 저기, 저것은 봉충! 극독을 가진 곤충입니다! 아니……!”
소리를 지르던 신의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성한 풀은 물론이고, 가시 돋친 나뭇가지와 윙윙대는 곤충, 작은 꽃씨까지 강한 독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잠깐!!”
신의의 외침에 세 사람은 그를 돌아보았다.
“이곳의 모든 것!! 저기 저 작은 벌레도! 저것도 강한 독성을 가진 꽃나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극독을 가지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건들지 마십시오. 촌장! 그 옆의 잡초를 조심하시오! 즉사할 수도 있소.”
말을 하는 신의의 등줄기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자신이야 어지간한 독에도 내성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간혹 보였다.
죽지는 않겠지만 꽤나 고생할 만한 것들 말이다.
신의의 머릿속에는 혹시라도 중독되었을 때 해독하는 방법이 나열되고 있었다.
당산에서 살아왔던 연천은 태연했다.
모충일과 화칙도 독풀과 독충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발걸음 옮기는 모충일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당산의 진법을 뚫으려 한 것은 그분의 자취를 찾아보려 한 것이지, 설마 당산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산은 당가에서 관리를 하는 곳일 텐데 어찌 그리 오랫동안 들키지 않고 사셨던 것일까?
바로 앞에 그분이 계셨음에도 찾아내지 못한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당산의 진법을 깨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분이 진법에 대한 경지가 그리도 높으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모충일이 안타까움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연천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앞으로만 나아갔다.
스승님의 진법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당가의 가주인 숙부가 데려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연천은 검을 들어 살아있는 듯이 순식간에 무릎을 휘감는 풀을 옆으로 누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따르는 세 명의 사내들이 편히 걷게 하기 위해서였다.
모충일과 신의, 화칙은 깊은 산속의 작고 허름한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그분께서 이곳에서 사셨단 말입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
신의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모충일과 화칙도 목이 콱 메었다.
다행히 오두막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고, 앞마당과 스승님의 묘지까지 풀이 짧게 잘려 정리가 되어 있었다.
각자의 추억과 슬픔에 빠진 세 명의 장년인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연천은 숙부인 당상만이 다녀간 것이라고 짐작했다.
연천이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스승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그들을 이끈 곳은 오두막에서 조금 더 들어간 양지바른 곳이었다.
연천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모충일을 못 본 척했다.
“그리도 오랫동안 전국을 다 뒤졌는데… 이곳에 계시었군요. 이곳까지 찾으러 오지 못한, 부족한 소인을 용서하십시오.”
모충일이 울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산소에 절을 했다.
“저희가 새로운 천마는 잘 모실 터이니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신의도 절을 올렸다.
붉어진 눈시울을 한 화칙은 입을 꼭 다물고 절을 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붉은 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연천도 스승님께 절을 올렸다.
‘스승님… 이제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잘하지 못할 것 같아 겁이 납니다. 저들의 믿음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평생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지 못할까 봐 무섭습니다.’
연천은 오두막의 툇마루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 아래고 옆이고 뒤고 할 것 없이 시커멓게 우겨진 풀 뿐이었지만, 연천은 뭔가 대단한 볼 것이 있는 것처럼 앞을 바라보았다.
연천의 눈에는 선했다.
그와 스승님이 함께 툇마루에 앉아 까맣게 우거진 풀숲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그리 있다, 숙부의 모습이 보이면 스승님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산으로 뛰어다니며 약초를 캐고 산 열매를 따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숲 사이사이 보이는 듯했다.
세 사내는 스승님의 유품을 정리하겠다고 방으로 들어갔다.
스승님에게는 유품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빈 몸으로 도망친 이에게 유품이 무엇이 있겠는가?
스승님이 평소 입으셨던 옷가지와 사용하던 몇 가지 물건은 연천이 불태웠다.
아무것도 없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간 세 사내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그분을 그리워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연천 또한 스승님과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나쁘지 않았다.
작고 꼬질꼬질하던 자신을 데리고 오던 스승님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연천은 그때의 기억이 없다.
그저 그랬을 것이라 상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