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그들의 주인?】
“우지심과 그 패거리들은 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못해 한동안은 일어나지 못할 듯했습니다.”
상관량이 우지심 일행을 살피고 와서 보고했다.
“음… 그래…….”
주진관이 대충 대꾸했다.
그는 우지심 패거리들이 어찌하고 있는지 따위 관심 없었다.
상관량 모르게 모충일과 형란의 가족을 보내야 했기에 무슨 일이든 시켜야 했을 뿐이었다.
주진관은 모충일에게 형란과 그녀의 가족을 맡겼다.
이것은 모충일과 자신만 아는 비밀이었다.
형란의 가족 같은 이들과 자꾸 마주치게 되는 것은 중원의 팍팍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운명인 것인지…….
그들이 문제가 생긴 마을에 계속 살 수 없음은 당연했다.
처음 도와준 이들을 중원 외곽의 마을에 데려다주고 살 수 있게 도와준 것으로 끝이 날 줄 알았는데, 고향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자들을 계속 만났다.
그들이 모이고 모이다 보니, 주진관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는 마을에서 상회도 운영하며 제법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
주진관이 데리고 간 사람이면, 서로 보듬어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모충일과 주진관만 아는 일이고, 마교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교 교주가 사람들을 모아 마을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것을 이용할 자들이 한 둘이겠으며, 그 꼴을 곱게 보지 않을 자들은 수두룩할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주진관의 눈치만 살피는 정파에서는 무슨 군대라도 만드는 줄 알고 난리들을 쳐댈지도 몰랐다.
“그들의 뒷배가 황후의 친척 되는 이입니다. 자금만 투자해 놓고 우지심이 가져다주는 돈만 확인하는 모양입니다. 이번 일이 알려졌다가는 우지심도 쫓겨날 판이니 아마 쉬쉬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상관량은 일이 커지는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주진관은 일이 커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나는 일이 있어 조금 더 있다 갈 것이니, 너는 먼저 돌아가 있거라. 영월단주가 교를 이리 오래 비워서 되겠는가?”
주진관이 상관량에게 교내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게… 교주님께서 후계를 찾으시는 걸 확인하라 하셨습니다.”
“어허, 괜찮다.”
“…….”
“괜찮다니까, 여긴 충일이만 있어도 되니 먼저 가 있도록 하라.”
주진관이 묵직하게 명했다.
“…존명!”
잠시 망설이던 상관량이 답하고 사라졌다.
주진관은 비어버린 형란의 집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본 혈영천마 주진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모충일의 아득한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
“그날이 그분을 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대묘산으로 찾아간 것은 그로부터 보름 뒤였습니다. 유난히 숲이 우거진 산 중턱이 시커멓게 타서, 남은 것이라고는 독에 타다 만 시신들뿐이었지요.”
말을 하는 모충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연천의 미간도 따라 찌푸려졌다.
“어찌나 지독한지 시신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겠더군요… 그분은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분이 살아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찾으러 다닌 것이 16년이 되었습니다.”
모충일의 목소리는 쓸쓸했다.
모충일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그놈들… 수일검, 태청검, 금월대사를 갈기갈기 조각내어 씹어 먹으려 했습니다. 이 한 몸 바쳐 놈들을 지옥 불에 처넣을 수만 있으면 그리하려 했습니다. 한데… 마을 사람들이 낫을 들고 곡괭이를 매고, 부엌칼을 쥐고 화산으로 무당으로, 소림으로 향하더군요….”
말을 하는 모충일의 눈이 젖어왔다.
“그저 조용히 살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습니다. 아는 척하지 않기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한데 그들도 알고 있더군요. 자신을 구해준 분이 혈영천마님이고 그분 덕에 그리 산다는 것을요.”
“…….”
“무공도 뭣도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 없는 이들이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더군요. 제가 그날 오지 않았다면, 그 많은 목숨이… 그분을 위해 그 목숨들이 사라졌겠지요…….”
목이 메는지 고개를 숙인 모충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제가… 말렸습니다. 제가 설득했습니다. 그런 복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그분의 오명을 벗기는 것이 우선이라며 복수를 못 하게 말렸습니다.”
말을 하는 모충일이 눈을 깊이 감았다.
가슴에 묻어둔 모충일의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뒤, 다시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분이 제게 맡긴 사람들입니다. 짐승보다 못하게 살다 겨우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들이 주군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달려드는데 제가 말렸습니다. 그리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분이 크게 노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날이 생각이 나는지 모충일의 목소리는 떨렸다.
“며칠간 온 마을이 울음바다였지요. 오열하고 몸부림을 치고, 같이 아파하고… 서로를 보듬었지요…….”
연천은 안타까운 얼굴로 모충일을 바라볼 뿐,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겠더군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날 일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정보원을 키웠습니다.”
모충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의심되는 문파에 상회를 통해 정보원을 심어놓고 보니 상회에 거기 딸린 표국과 정보원, 암살단… 식솔들은 엄청나게 불었는데, 딱 그분만 없더군요.”
모충일은 마을 사람들을 다독여 정보원을 키우고, 상회를 번성시킨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분에 대한 작은 단서만 있어도 달려갔지요. 중원 바닥에 어찌나 가짜 혈영천마가 많은지… 제가 그것들을 모조리 찢어 죽였습니다.”
모충일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
연천은 스승님이 돌아가시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펐다.
그리고 이제 어찌 살아야 하나 싶어 막막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셔서 제일 아프고 슬픈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충일을 보고 있자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뜬 모충일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희가 소유한 상회가 있습니다. 마교의 책사였던 화칙이 운영하고 있지요. 가주의 자리는 그분의 자리라 생각하여 처음부터 비어있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상회의 가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것이 스승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연천이 상회의 가주가 되어 뭘 어찌한다는 것인지.
“그놈들이 영웅으로 사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혈영천마님께서 살인귀라는 오명을 쓰고 계신 것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죽기 전에 그놈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저희의 바람입니다.”
모충일의 목소리는 아픔에 차 있었다.
“그놈들이 방심하도록 만들어야지요. 놈들이 믿을 수 있는 상회의 가주가 되어 주십시오. 중원 모든 문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속속들이 알아낼 것입니다.”
“그놈들을 탈탈 털어서 먼지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알아낼 겁니다. 반드시 그 실체를 밝혀낼 것입니다. 그래서 그놈들이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전 중원에 알릴 것입니다.”
점차 격앙된 모충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리하고 나면, 내 손으로 그놈들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발기발기 찢어서 씹어 먹을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감정의 응어리를 통째로 뱉어내는 것 같았다.
모충일은 무인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무인이라면 복수를 먼저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복수를 해내야 그분을 위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모충일이라면 능히 복수에 성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끝이 어떨지…….
모충일이 수일검, 태청검, 금월대사를 암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쟁쟁한 세 개의 문파 모두를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세 사람에 대한 복수는 성공하더라도 살아남기는 힘들겠지.
제어할 사람이 없는 마을 사람들 또한 그 문파에 복수를 위해 달려들 것이다.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목숨을 잃을 게 뻔했다.
화산과 무당, 소림에서도 가만있지 않을게다. 무림의 영웅을 해한 자들이니.
마을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마을을 찾는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을에 풀 한 포기 남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혹여 그들이 마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복수 때문에 부모 잃은 아이들은 떠돌거나 굶어 죽을게다.
복수에 가담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하며, 마을을 벗어나 다시 짐승 같은 삶을 시작할 것이다.
모충일은 복수 대신 그분이 남긴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그분의 명예를 되찾기로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복수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질책과 그분에 대한 죄송함이 가슴 속 깊이 박혀서, 종종 그곳이 아파왔다.
“…….”
연천은 말없이 모충일을 바라보았다.
모충일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하지만, 연천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 무명촌을 떠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중원 어디를 가도 혈영천마는 천하의 악인이었다.
그 꼴을 보고 숨을 쉬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충일의 계획이 그 무엇이라 해도, 그것을 따르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이 스승님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해야 했다.
“그리고 천마 자리에 오르실 준비도 하셔야지요.”
마음을 가라앉힌 모충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천마?’
현실감 없는 모충일의 이야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그의 이야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같았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허우적거릴 의지도 없는 연천을 형체도 없는 것들이 옭아맸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속이 답답했다.
“하아…….”
연천이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저희 상회의 가주 얼굴은 본 이가 없어, 모두들 궁금해했습니다. 그리도 궁금해하던 보은상회의 가주가 나타났다 하면 이목이 집중될 겁니다. 아쉬운 곳에서는 먼저 연통이 오겠지요. 적당히 원하는 것을 들어주며 인맥을 만들어 놓으시면 됩니다.”
모충일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연천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분이 선택하신 분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말을 하는 모충일의 얼굴은 편안했다.
연천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조금의 의구심도 불안함도 없었다.
모충일은 혈영천마와 그의 제자인 연천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었다.
“흐음… 스승님이 나를 선택하신 건가…….”
연천이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