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이의 손을 놓은 사내가 여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안 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아이와 아이의 아비가 여인의 반대 팔을 잡고 늘어졌다.
“엄마아아!”
주진관이 몸서리를 쳤다.
무림을 돌아다니며 저런 꼴을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찌 저리도 모질고 독하게 구는 겐지….’
“빚이 얼마요? 내가 갚아주겠소.”
주진관이 앞으로 나섰다.
상황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뻔했다.
모두의 시선이 주진관에게로 쏠렸다.
여인을 팔을 잡고 있던 사내, 우지심이 주진관에게 건들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우지심은 주진관을 훑어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허허허! 요즘도 이런 무림인이 있네?”
주진관의 옆구리에 찬 검을 보고 무림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인들이 의와 협을 행하는 것은 옛말이었다.
정파가 정도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은 마교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탐관오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문파를 이끌어가려면 여기저기 뒷돈도 대야 했다.
세상이 썩어가니 구린내 풍기지 않고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것은 무림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얼마요?”
주진관은 긴말하기 싫다는 듯 물었다.
우지심이 주진관의 주위를 빙 돌며 대놓고 그를 살폈다.
비싼 의복 차림도 아니오. 값나가는 장신구 하나 없었다.
모충일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주진관이 가볍게 손을 들어 저지했다.
모충일은 우지심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우지심이 피식 웃었다.
가끔 저런 자들이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주제에 말로, 글로 배운 대로 행하려는 얼치기들.
그런 놈들에게는 세상의 매서운 맛을 가르쳐줘야 했다.
우지심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은자 이백 냥!”
우지심의 말에 대꾸한 것은 아이의 아비였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내가 빌린 것은 은자 이십 냥이오! 이십 냥!”
우지심이 아이의 아비에게 설렁설렁 걸어가,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툭툭 내리쳤다.
“돈을 빌리면 이자가 붙는다는 것도 모르냐? 이자도 생각해야지! 이자!!”
“돈을 빌린 지 두 해도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이자가 그렇게나 붙는단 말이오?”
아이의 아비가 독기 품은 눈으로 우지심을 노려보았다.
“이놈 보소? 남의 돈을 이자도 안 주고 거저 빌리려고 했어? 내가 오늘 네놈한테 셈법을 알려줘야겠다.”
말을 마친 우지심이 손을 내밀자 그의 패거리 중 하나가 어른 팔뚝만 한 몽둥이를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아이 아비의 미간이 구겨졌다.
말로도 힘으로도 아이의 아비가 이길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는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그들의 힘을 믿고 저리 나대는 것이다.
우지심이 몽둥이를 높이 올렸다.
아이의 아비가 고개를 돌리고 아이와 아내를 감싸 안았다.
‘……?’
한참이 지나도 몽둥이가 날라 오지 않자,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우지심이 몽둥이를 쥐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몽둥이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인지 우지심은 몽둥이를 내려칠 수가 없었다.
싸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주진관이 몽둥이 끝을 손으로 잡고 있었다.
우지심이 얼굴을 확 구겼다.
“주겠소, 은자 이백 냥. 차용증 갖고 오시오.”
말을 하는 주진관의 눈빛이 서늘했다.
우지심은 몽둥이를 든 채, 주진관을 노려보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저들 중에 고리대를 쓴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으로 쓰게 될 자들도 있었다.
지금 보인 꼬락서니는 앞으로의 고리대업에 지장을 줄 수도 있고…이것저것 다 떠나서 기분이 드러웠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남의 돈을 갚아주네 마네 차용증을 가져오라 마라, 하! 몽둥이까지 잡아? 저놈이 내 뒷배가 누군 줄 알고!’
“이자가 더 붙었소. 은자 오백 냥이오!”
우지심이 조소하며 말했다.
“지불하겠으니 차용증 가지고 오시오.”
주진관은 놀라는 기색 없이 말했다.
“아니, 내가 셈을 잘못했구려, 은자 구백 냥이오!”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라지. 나야 입으로 금액만 올리면 그만이니. 네 놈이 언제까지 그리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우지심이 주진관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주진관이 웃었다.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시원하고 깨끗한 웃음이었다.
저런 놈들이 있었다.
고리대로 돈을 빌려주면서 돈을 받을 마음이 없는 자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돈을 빌린 그 집안에 내려오는 물건을 빼앗고, 가족들을 팔아넘기고 집에 좁쌀 한 톨 남지 않게 박박 긁어 가는 것이었다.
돈을 받고 순순히 놔줄 마음 따위 없었다.
주진관이 본 이들 중 열에 아홉은 그랬다.
겨우 돈 몇 푼 얹어 받자고 저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대가 셈을 잘못하는 것 같구려, 내가 셈을 알려주겠소.”
주진관의 목소리는 맑았다.
“흥!”
‘암만 셈법을 말해줘 봐라. 못 들은 척, 아니라고 빡빡 우겨댈 테니.’
우지심이 도전적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지심은 주진관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주진관의 손에 든 몽둥이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후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가물가물했다.
그저 아팠다. 죽도록 아팠다.
자신이 살려달라고 외쳤던 것은 기억이 난다.
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빌었던 것도 기억에 있었다.
언제 얻어터졌는지, 피떡이 된 패거리들이 옆에서 같이 빌었던 것도 같다.
입에 게거품 아니, 피거품을 물고 쓰러진 자신의 품을 누군가 뒤지는 것도 같았다.
‘차용증을 가지고 오지 말걸.’
아련한 기억 속에 후회했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의식이 사라져갔다.
‘아… 아프다. 온몸이… 안 아픈 곳 없이 다… 아프다…….’
자신의 몸 위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차용증을 읽어보던 주진관은 기절한 우지심에게 은자 200냥을 적선하듯 집어던지고는 멍하게 있는 아이의 아비와 어미, 아이를 일으켜 자리를 떴다.
* * *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아이 아비의 얼굴은 어두웠다.
자신을 도와준 무인의 호의는 감사한 일이고, 그의 몽둥이질에 잘못했다, 싹싹 비는 우지심 패거리의 꼴을 보고 있자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이 사내는 마을을 떠나면 그만이었지만, 우지심 패거리가 자신들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 몰랐다.
아내와 딸아이를 지키려면 대대로 살아온 마을을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미 집에 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솥단지까지 빼 들고 가버렸다.
가진 것도 없이 남의 마을로 간들 뭐가 더 나아지겠는가?
사람이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면 좀 나으려나?
산짐승이 우글대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으려나?
이 사내 덕분에 며칠의 말미를 얻기는 했지만,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깜깜했다.
주진관이 어미 옆에 앉은 여자아이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마형란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어린 형란도 그 사내가 자기와 부모님의 은인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향기로운 난초(馨蘭)라는 뜻이냐?”
형란을 바라보는 주진관의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번졌다.
“네, 그러하옵니다.”
형란이 반듯하게 답했다.
“예쁜 이름이구나, 형란아! 부모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서 놀겠느냐?”
아이에게 말하는 주진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네…….”
형란이 다소곳이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마당에서만 놀거라.”
주진관이 문을 나서는 형란에게 말했다.
“네…….”
대답을 한 형란이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아비는 형란이 나간 문을 멀건 얼굴로 쳐다보았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빚쟁이들한테 끌려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갈 곳도 없고, 이곳에 있을 수도 없었다.
오늘 밤, 세 식구 조용히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이에게 이 꼴 저 꼴 안 보이고, 젊은 아내가 이 짓 저 짓 안 해도 되는 길이지 싶었다.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주진관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혹여, 갈 곳이 있소?”
형란의 아비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사내의 질문에 뜨끔했다.
별생각 없이 물어보는 것이겠지……. 설마 세상 그만 살 마음을 먹은 것까지 눈치챘겠는가?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 이곳입니다.”
형란 아비의 알맹이가 빠진 것 같은 목소리는 덤덤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싹 가신 하루였다.
“괜찮다면 내가 갈만한 곳을 소개해 주겠소.”
주진관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
형란의 아비는 답하지 않았다.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인가?
이자가 누구인 줄 알고, 어디로 따라간다는 말인가?
그곳에 갔다가 온 가족이 뿔뿔이 팔려가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단 말인가?
자기 한입 먹고 살기도 버거운 세상이었다.
내 등 따스우려고 남의 등을 쳤고, 내 배 불리려고 남의 배에 칼을 꽂아댔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소?”
주진관은 자신이 소개해 줄 마을이 아주 좋은 곳이라는 둥, 자신을 믿어보라는 둥 하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지적할 뿐이었다.
“…….”
형란의 아비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젊은 사내의 깊은 눈은 세상을 다 산 노인의 것과 같았다.
사내의 말간 얼굴에 담긴 의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대 같은 이들이 모인 마을이라 지금보다는 살기가 편할 것이오.”
주진관이 가볍게 말했다.
“…….”
형란 아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죽고 싶어 죽으려 마음을 먹겠는가?
그것도 처자식까지 데리고 말이다.
살고 싶었다.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게 안 되니, 짐승보다 못하게 사니 그만 살자 싶었는데…….
형란의 아비는 말없이 옆에 앉은 형란의 어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도 그와 생각이 같았다.
그저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새로 옮긴 곳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그때 다른 마음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
형란의 아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그럼, 채비하시오.”
주진관이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당장 가는 겁니까?”
형란의 아비가 놀라 물었다.
새로운 곳으로 가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그게 지금 당장이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이곳에 미련이 있소?”
“아닙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형란의 아비가 고개를 저었다.
“나가 있겠소.”
주진관이 간단하게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