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모충일은 더 이상 마교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마교를 나와서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혈영천마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혈영천마가 없어진 이후, 마교의 세가 크게 줄어들었다.
일부는 모충일과 함께 혈영천마를 찾아다녔고, 또 일부는 혼자서 그분을 찾아나섰다.
그리고, 일부는 혈영천마가 없는 마교를 등졌다.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후계를 찾았으니 16년의 고생이 절반쯤은 성공한 셈인가?
천마신공은 최소한 2갑자 이상의 내공은 가지고 있어야 다룰 수 있었다.
‘어떻게 어린 제자에게 그리 큰 내공을 쌓게 하셨는지… 어찌 검집을 내다 파신 건지…….’
생각에 잠긴 모춘일의 눈에서 이슬이 흘러내렸다.
‘어쩌다 그분이…….’
* * *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선선한 바람결에 깨끗한 구름이 둥둥 떠가는 모습이 한가로웠다.
연천은 넓은 툇마루에 앉아 색이 고운 두 마리의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가 시끄럽게 지저귀어 댔다.
다른 한 마리가 부리로 시끄러운 새의 털을 쓰다듬듯 골라 주었다.
시끄러운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더욱 요란하게 지저귀어 댔다.
연천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띠었다.
날은 이리도 따뜻한데, 연천의 가슴은 꼭 있어야 할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시렸다.
시끄럽게 재잘대는 새가 꼭 걸아 같아 시린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형란이 예쁘게 미소 지으며 연천에게 다가왔다.
“새들이 하는 짓이 어여뻐 보고 있었소.”
연천이 형란에게 작게 웃어 보였다.
쓸쓸하고 황량한 웃음이었다.
“참 아름답습니다.”
형란도 연천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돌려 새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새로 난 어린잎으로 만든 차이온데 향이 좋아 드셔보시라고 가지고 왔습니다.”
형란이 쟁반을 놓고 작은 주전자에 담긴 차를 찻잔에 따라 연천에게 내밀었다.
“향이 아주 그만이구려, 고맙소.”
연천은 향긋한 차를 한입 들고는 걸아와 차를 마시던 생각이 나, 피식 웃었다.
걸아는 진득하게 앉아서 차향을 즐기지 못했다.
조그만 찻잔에 따라 차를 마시는 것에 감질이 난다며, 커다란 사발에 들이부어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무엇이 좋아 그리 웃으시는 겝니까?”
형란이 밝아진 연천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잠시 딴 생각을 했소. 미안하오.”
연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 아…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근심이 있으시겠지요.”
형란은 모충일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연천을 천마로 세우겠다는 계획 말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 근심인 것이 당연했다.
“아니오, 갈 곳 없이 떠돌던 나를 이리 품어주는 곳을 찾았는데 무슨 근심이 있겠소. 그저… 날이 과하게 좋구려.”
구름이 떠가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연천은 모충일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단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과 그것이 스승님을 위한 일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것도.
“…….”
형란은 아득한 곳에 눈이 가 있는 연천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형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앞만 보고 있던 연천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개방이 어떤 곳인지 아시오?”
“개방을 말씀하십니까?”
형란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렇소.”
연천이 형란에게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개방은 구파일방의 한곳으로 거지들의 문파입니다. 정보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곳이지요.”
형란은 연천의 의중을 모르기에 아주 기본적인 대답을 했다.
“구파일방이라 하면 정파를 말하는 것이오?”
“네, 그렇습니다.”
형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렇구려… 정파의 아이였구려, 정파의…….”
연천도 찻잔을 내려놓았다.
맑고 따뜻한 하늘을 바라보는 연천의 얼굴은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 같았다.
* * *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연천의 만류에도 모충일은 막무가내였다.
연천은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상석에 앉았다.
여우의 속 털을 넣어 만든 의자가 푸근하게 연천의 하체를 감쌌지만, 그의 마음은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옷을 새로 맞추었습니다. 갈아입으시지요.”
모충일이 연천의 몸에 맞게 제작한 옷을 내밀었다.
“이리 할 것까지 없습니다.”
연천은 그들의 과분한 보살핌이 부담스러웠다.
“의논할 일이 많습니다.”
모충일이 묵직하게 말했다.
“…….”
연천은 말없이 모충일을 바라보았다.
모충일의 눈에 연천은 혈영천마 그 자체였다.
연천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무명촌을 나가 스승님을 잊고 백연천으로 살든지, 아니면 무명촌에서 스승님인 혈영천마를 대신해서 살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무명촌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지낼 수는 없었다.
“천마께서는… 천마께서는 어찌 돌아가셨습니까?”
모충일이 혈영천마의 마지막을 묻고 있었다.
연천은 뭐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게 없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결정을 해야 할 듯싶었다.
연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스승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하셨습니다. 연세도 많으셨고… 작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병환으로… 으읍… 작년까지 살아계셨군요.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어찌… 찾지 못했는지… 어찌 이 모충일을 찾지 않으시고…….”
모충일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
연천은 그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모충일은 목이 멘 듯 겨우 입을 열었다.
“그날 제가 함께하지 못해서 그리된 겁니다. 제가 같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슴 깊은 곳 어딘가가 몹시 아파 보였다.
“…….”
연천은 모충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픔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그러니깐… 그날도 다른 날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모충일은 기억 속에서 수만 번을 후회하고, 바꾸었던 16년 전 그날을 또다시 떠올렸다.
새로운 천마께는 그날을 이야기해야 했다.
입 밖으로 내기 아픈 그 이야기를.
* * *
16년 전.
길을 걷는 사내의 옷차림은 수수했다.
흔한 옷감으로 지은 보통의 무복 경장이었다.
유난스러울 것 없는 차림임에도 사내에게서는 뭐라고 할까… 여유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깨끗한 기운이 흐른다고 해야 할까?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의 얼굴은 말갰다.
키도 몸집도 딱 평균치인 사내의 옆구리에는 천을 둘둘 감아놓은 두툼한, 검 한 자루가 대충 매달려 있었다.
그의 한걸음 뒤에 두 명의 사내가 따랐다.
한 명은 눈썹이 진하고 강직한 무인의 얼굴이었고, 다른 한 명은 눈매가 날카롭고 하관이 좁은 매서운 인상이었다.
앞선 사내의 표정은 유쾌했다.
햇살이 그 사내에게만 빛을 비추는 것처럼 환했다.
“얼마 만에 호남에 와보는지.”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뒤에 선 사내 중 한 명이 그 작은 말소리를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1년 전쯤에 오셨습니다.”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은 사내가, 앞에 선 젊은 사내에게 존대했다.
그가 진한 눈썹이 눈에 띄는 젊은 시절의 모충일이었다.
“그랬나? 여전히 사람도 많고, 볼 것도 많구먼.”
사내가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모충일은 주위를 한번 살피고 그를 따랐다.
앞에 선 젊은 사내의 이름은 주진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그 이름보다 혈영천마라는 별호로 불렀다.
그가 바로 50년 동안 천마신교의 교주를 맡고 있으며, 고금 제일검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로 인해 마교는 중원 제일의 단체로 군림했고, 마교의 영향력에 밀린 정파라 칭하는 자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며 마교의 동태를 살피기 급급했다.
천마신교의 교주인 혈영천마가 어느 날 갑자기 무림을 집어삼키겠다는 야망을 가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빌면서, 지금처럼 여행이나 하며 돌아다니길 바라면서…….
낮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어수선했다.
“갚을게요, 갚겠습니다. 그 아이는 안됩니다아아아아… 제바알…….”
울며 애원하는 목소리였다.
“있으면 지금 갚아!”
여유로우면서 조롱이 섞인 목소리.
“조금만 말미를 주시오. 조금만 더 주시면… 으억….”
사내의 말은 자신의 비명에 묻혔다.
“그럼 돈을 가지고 와, 그동안 자네 여식은 우리가 잘 보살피고 있을 테니.”
빈정대는 목소리가 낄낄거렸다.
그들 주위로 수십의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지만, 말리기는커녕 기침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주진관은 소리 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주진관을 밀치고 급하게 달려나갔다.
“안 돼요! 우리 애는 안 돼요. 차라리 나를 데려가요! 나를!!”
달려 나간 여인이 쇠 된 목소리로 악을 썼다.
주진관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나아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목도했다.
눈앞에선 대여섯 살쯤 된 여자아이를 사이에 두고, 네댓 명의 사내들과 아이의 부모가 대치하고 있었다.
“흐음….”
주진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중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황제가 제구실을 하지 못했고, 황후와 그 집안의 세력은 커질 대로 커져 제 배만 불리고 있었다.
그에 대적해, 황궁으로 들어온 황제의 아우와 황후의 피를 뿌리는 권력 싸움이 극에 달했다.
아무도 백성들은 신경 쓰지 않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1년 내내, 허리 펴지 못하고 일을 해도 남는 것은 빚이고, 그 빚은 무섭게 이자를 불려 나갔다.
그 끝은 꼭 저 모양이었다.
집 안에 있는 딸아이나 젊은 아내를 데려갔다.
그걸로 끝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얼마간 괴롭힘의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한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산산이 사라질 때까지 괴롭히고, 돈 되는 물건이고 사람이고 다 들고 갔다.
비릿한 미소를 걸치고 아이의 팔을 잡고 있던 사내가 아이를 잡고 매달리는 어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은 여인 같지 않게 곱고 여리여리했다.
아이를 잡은 사내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사내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돈 갚을 길은 없고, 아이 어미든 아이든 순서만 다를 뿐 자신들 손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이왕이면… 당장 써먹을 데가 많은 여인이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