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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94화 (94/230)

94화

모충일은 조심스럽게 연천의 검을 받았다.

연천은 아주 잠시, 모충일이 무기를 뺏고 자신을 공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검을 잡는 모충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모충일은 떨리는 손으로 낡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검을 받쳐 들었다.

누군가가 하사한 검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검을 진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누가 지켜보는 것처럼 눈앞으로 반듯하게 검을 받든 모충일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모충일은 손뿐만 아니라 온몸을 떨어대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멍하게 검을 내려 보다, 갑자기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죄인은… 천마를 지키지 못하였고, 천마를 끝까지 모시지 못하였고, 천마를 알아보지 못하였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바닥에 엎드린 채 울먹이며 말하던 모충일의 몸이 울렁거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곧 방바닥에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오열했다.

형란도 모충일을 따라 오체투지 했다.

연천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충일과 형란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연천의 만류에도, 모충일은 꿋꿋이 오체투지한 채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던, 연천이 모충일의 양팔을 잡고 일으켜 자리에 앉혔다.

형란도 자리에 앉혔다.

“…….”

연천은 무슨 말을 꺼내어야 할지 몰랐다.

모충일은 자리에 앉아서도 어깨를 들썩여댔다.

오랫동안 세상의 많은 일을 보아온, 경험 많고 나이 지긋한 장년인이 흘리는 눈물은 커다란 바위가 흔들리는 것처럼 옆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연천은 편치 않은 얼굴로 모충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겨우 평정을 되찾은 모충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는 힘이 강한 자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지요. 새로운 천마는 전대 천마에게 무공과 검을 이어받습니다. 그것이 천마신공과 천마검입니다. 지금의 천마는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천마께서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으니 마교의 천마이십니다.”

모충일이 약간 멍한 얼굴로 말을 마쳤다.

연천을 천마라 칭하면서 말이다.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천마신공이 맞다고 해도, 천마검은 영친왕에게 있습니다.”

연천은 자신을 천마라고 부르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거기에 다른 말은 붙이지 않았다.

자신을 천마라고 계속 우겨보았자, 천마검은 자신에게 없었다.

모충일이 손을 들어 연천의 검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이 후들거렸다.

“저 검이… 천마검입니다.”

모충일은 이 짧은 한마디를 힘겹게 뱉어냈다.

“……?”

연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천은 천마검을 알고 있었다.

천마검은 영친왕의 성에 있는 그것이었다.

“천마검은 마교가 일월신교 때부터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명교였던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검신의 재료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모충일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전대 천마가 검을 내리면, 새로운 천마는 양손으로 검을 받아 듭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 위에서 검을 받아 눈앞에 잠시 머물렀다 내립니다. 눈높이에서 검신을 받들어 보면 한 면에는 일(日)자가 다른 면에는 월(月)자가 보입니다. 맑은 검에 더 맑은 무언가를 감입한 글은 그냥 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연천이 가진 검에 일(日)자와 월(月)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검이 진짜 천마검이라는 말이었다.

“…….”

모충일의 이야기를 듣는 연천의 미간이 좁아졌다.

스승님이 혈영천마가 맞다는 이야기였다.

그리도 알고 싶었던 것이었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확실하다는 말을 들으니 겁이 났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것 같았다.

“저 검이 가짜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물었을까?

연천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스스로 의아했다.

스승님이 혈영천마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갑자기 자신을 천마라 부르는 모충일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스승님이 진짜 혈영천마면 이제 어찌해야 하나…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가짜일 수 없습니다. 천마검의 검신에 일(日)과 월(月)이 새겨진 것을 아는 이는 교내에서도 몇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저 검에 있는 것을 따라 만들지 못했습니다. 천마검을 재현하기 위해 수많은 장인을 불렀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완전히 진정이 된 모충일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

연천은 스승님이 혈영천마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속에서 일렁거렸다.

“하지만, 검집은 다릅니다. 겁집은 여러 번 새로 만든 것이지요. 영친왕의 성에 있는 검집은 혈영천마님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분은 그 화려한 검집이 불필요하다 하셨지요. 짐스러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모충일이 다시 울먹였다.

연천은 불안한 얼굴로 모충일을 보았다.

다행히 모충일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말을 이었다.

“그분이면 그 검집을 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것이 가짜일 수도 있고요. 천마검의 그 화려한 검집은 중원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모충일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제 스승님이 혈영천마가 맞으시군요.”

연천이 혼잣말인 듯 느릿하게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못한 그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연천의 얼굴은 체념한 듯,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천하에 그분이 아니고 천마신공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모충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그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될 순간이었다.

“영면에 드셨습니다.”

연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천마검이 영친왕의 성에서 나타났을 때부터 그분이 돌아가셨다 생각했다.

연천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리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연천의 말 곳곳에서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저는 스승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살인귀라 욕하더군요.”

연천이 내내 마음 아팠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닙니다. 그분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팔려가던 저와 저희 가족을 구해주신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이 그분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내 조용히 있던 형란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반평생을 그분을 모셨지만, 그분이 단 한 번도 악을 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충일도 형란의 말에 동조했다.

“스승님을 모셨습니까?”

연천의 쓸쓸한 가슴에 반가움이 일었다.

“네! 저는 과거 혈영천마님께서 마교에 계실 때, 천마의 호위를 맡았던 천랑대의 대주 모충일이라고 하옵니다.”

모충일이 새삼 자기소개를 했다.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연천이 그제야 인식한 모충일의 경어에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찌 천마께 말을 편하게 할 수 있습니까? 다른 명을 내려주십시오. 그것은 따를 수 없습니다.”

자신을 보고 사기꾼이라며 길길이 날뛰던 모충일의 깍듯한 행동과 말투가 불편한 연천이었다.

“저는 천마가 아닙니다.”

“천마가 맞습니다. 지금 교에 앉아있는 그놈이 천마가 아니지요! 제가 꼭 본래의 자리에, 천마의 자리에 앉게 해드리겠습니다.”

모충일의 얼굴은 과단했다.

결의에 찬 모충일의 얼굴을 보며, 연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오나… 저는 천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

모충일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연천을 쳐다보았다.

“저는… 스승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스승님이 살인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습니다.”

연천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모충일에게 말했다.

“천마척결이라는 되지도 않는 이름을 붙인 놈들이 있습니다. 그 정파 놈들이 진실을 알고 있겠지요. 소인 또한 결단코 그것들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모충일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

연천은 분노를 삭이는 모충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천마이시어, 소인이 또 흥분하여…….”

모충일이 연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천마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제가 편치가 않습니다.”

연천은 하루아침에 자신을 보고 천마라 부르는 모충일이 불편했다.

“어찌 천마께 천마라 부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모충일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편히 대해주십시오. 스승님을 모신 어른이시면 제게 스승님과 같은 분입니다.”

연천의 말에 모충일이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하늘 아래 혈영천마의 제자이면서 천마검의 주인이고, 천마신공을 구사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연천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천마로 모셔야 했다.

한데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니 난감할 수밖에.

* * *

무명촌의 촌장 모충일은 이른 새벽부터 수련하는 연천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물색없이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혈영천마와 함께 실전되었다고 믿었던 천마신공과 혈영천마의 진신무공인 뇌전신공을 구사하는 분이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주책맞게도 눈가가 젖어 검을 휘두르는 연천의 모습이 뿌옇게 변했다.

시신을 찾지 못했을 뿐이지 모두 혈영천마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화산의 수일검과 무당의 태청검, 소림의 금월대사를 중심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을 살인멸구한 혈영천마를 그들이 처단했다고…….

소문은 시간이 지나고 한 사람을 지나 옮겨질 때마다 각색되고 부풀었다.

혈영천마가 사라진 지 달포도 못되어 그는 세상에 없을 살인귀가 되었고, 수일검과 태청검, 금월대사는 무림의 영웅이 되었다.

중원 구석구석 소문이 퍼져나가도 혈영천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 세 영웅의 손에 천하의 악인 혈영천마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혈영천마를 가까이서 보아왔던 모충일은 믿을 수 없었다.

그분이 그리 쉬이 돌아가실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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