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혈영천마】
형란에게서 눈을 뗀 모충일이 연천을 돌아보았다.
“대협! 미안하오. 저 아이가 하도 힘없이 앉아있어서 그만… 혹여 필요한 것은 없으시오? 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리다. 쉴 곳이 필요하시거든 이곳에서 얼마든지 쉬었다 가시구려, 보상도 섭섭지 않게 하겠소.”
연천을 향한 모충일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친근한 얼굴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연천이 짧게 대답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금전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바로 그의 스승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였다.
“…이분은 저희가 혈영천마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형란의 말에 모충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것을 아시고도 어찌 이 아이들을 도우셨소이까?”
모충일의 인상 좋던 낯빛이 변했다.
혈영천마라는 그 한마디에 뭐든 다 퍼줄 것 같던 모충일이 싹 바뀌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연천을 잔뜩 경계했다.
연천은 모충일의 얼굴을 보고 선뜻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고민스러웠다.
“…제 스승님이 혈영천마와 관련이 있습니다.”
연천이 애매하게 말을 꺼냈다.
스승님이 혈영천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점점 더 명료해지고 있었지만, 아직도 스승님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혈영천마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뭔가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가 속 시원하게 답을 해줬으면 싶었다.
형란과 여기 촌장이라는 사람은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원수요?”
모충일이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것은 아닌 듯하나… 저는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외람된 부탁이오나 제게 혈영천마라는 분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저는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허허… 제자라는 사람이 스승님이 어떤 분인지를 왜 여기에 묻는단 말이오?”
모충일이 헛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제게는 더없이 따뜻하고 고마운 분이셨지요. 스승님께서는 본인의 과거를 제게 이야기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몸이 편찮으시어 종종 발작을 일으키셨는데… 그때면 크게 소리를 치며 누군가에게 호통을 치셨지요. 그때 들은 이름 중에 혈영이 있었습니다.”
연천은 솔직하게 말을 했다.
모충일이 자신을 이해해서 원하는 바를 알려주기를 바라면서.
“혈영에게 호통을 쳤다면 원수가 아니고 무어란 말이오. 대협! 내 대협이 우리 아이들을 구해준 것은 감사하고 있소. 그 보상은 충분히 하겠소. 허나, 혈영천마님에 대한 것은 입을 다물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오.”
모충일이 무서운 얼굴로 연천에게 말했다.
“흐음…….”
연천이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모충일은 혈영천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게 확실했다.
연천은 알아야 했다.
이들이 아니고서 언제 어디서 혈영천마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날지 알 수가 없었다.
연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것이… 스승님은 본인을 혈영이라고 칭하시었습니다.”
연천의 말에 모충일의 얼굴이 굳었다.
“어찌… 그런… 흐음… 혈영천마께서 사라지신 지 16년이 되었소. 우리는 하루도 쉼 없이 그분을 찾아다녔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짜 혈영천마를 만났는지 아시오?”
모충일은 그간의 일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 생각에 잠겨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분의 일부와 같은 천마검이 나타났소. 그분은 돌아가신 겁니다. 대협! 그만 이곳을 떠나시오. 내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할 것이니 조용히 떠나주시오.”
모충일의 낮은 목소리는 과단했다.
모충일은 혈영천마를 사칭하는 자들에 대해 격노했고, 혈영천마의 얼굴에 먹칠하는 가짜에 대한 그의 처분은 가혹했다.
연천이 곽준 일행을 구한 것을 알기에 참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검을 빼 들었을 것이다.
모충일은 연천에게 이는 화를 누르며, 감정을 걷어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천은 굳은 모충일의 얼굴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천마검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모충일의 얼굴에 불쾌함이 담겼다.
혈영천마를 사칭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진짜 혈영이라고 빡빡 우겨댔다.
되지도 않는 검을 천마검이라고 억지를 썼고, 뭣도 아닌 검술을 천마신공이라고 고집을 피웠다.
모충일은 그런 자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사칭이 아니었다.
그분의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는 짓이었다.
모충일은 그런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눈앞에, 자신의 스승을 혈영천마라고 주장하는 저 사내에 대해 치미는 노여움을 참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모충일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이봐라! 준비하라고 이른 것을 가지고 오너라!!”
모충일이 밖을 향해 소리쳤다.
“…….”
연천은 잠자코 기다렸다.
“후우…….”
모충일이 낮게 숨을 내쉬고 연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 보상금을 갖고 올 걸세, 그걸 가지고 가시게.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마시게. 그 이름이 다시 내 귀에 들린다면, 그때는 내가 대협을 어찌할지… 나도 모르네.”
모충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
연천은 난감한 얼굴로 모충일을 보았다.
연천이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연천은 혈영천마가 스승님이 맞는지 알고 싶었다.
세상이 말하는 그 악한이 정말 스승님인지 그것을 말이다.
곧, 법소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어른의 손바닥 두 뺨 정도 크기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법소는 상자를 모충일에게 내밀고 사라졌다.
모충일은 상자를 열어 내용물이 보이게 연천에게 내밀었다.
어린아이 주먹 만한 금자 스무 개가 상자 안에 누워있었다.
“가시게.”
모충일이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연천은 답답한 얼굴로 모충일을 바라보았다.
까딱하다가는 금자를 받고 꼼짝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이곳에 있었다.
지금 쫓겨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든 이들을 설득해야 했다.
“…스승님이 저를 데려왔을 때부터 몸이 좋지 못하여 저를 살리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마 돈이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스승님을 만난 다음 해이니, 일곱 살쯤이었을 것입니다. 스승님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서 그 검을 팔았던 기억이 납니다.”
연천은 천마검이 어떻게 영친왕의 성에 있는지는 모르나, 스승님의 손을 떠난 연유를 설명했다.
“이것 보시오!! 그 검이 어떤 검인 줄 아시오? 그건 그분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오. 그분의 천마신공은 그 검이 아니면 사용을 하지도 못한단 말이오! 아무리 실력 있는 대장장이를 데려와도 그 검을 만들 수 없소! 한데 그걸 저자에 팔아? 하! 기가 막혀서! 혈영천마께서 그걸 돈 때문에 저자에 팔았다는 헛소리를 믿으라는 게요!”
모충일의 꾹꾹 눌렀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 일말의 이성이 남아 참아내고 있었다.
제발 눈앞의 저 사내가 더 이상 입을 열지 말고, 이곳을 떠나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파렴치한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본 가짜들 중에 가장 형편없구려, 가시오.”
모충일이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연천은 일어날 수 없었다.
자신이 찾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혈영천마를 아는 사람이 있는 곳.
“스승님께서는… 본인이 어리석어 검에 연연했다고 하셨습니다. 제게는 그 어떤 검법에도 검에도 연연하지 말라고 하셨…….”
쾅―
참지 못한 모충일이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말을 마치지 못한 연천이 안타까운 얼굴로 모충일을 바라보았다.
“이런 사기꾼 같은 작자를 보았나! 이제 하다 하다 그분을 모욕하는 것이오!! 더는 못 봐주겠으니 당장 나가시오!!”
벌떡 일어선 모춘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연천은 모충일의 얼굴을 보며, 망설였다.
“…….”
모충일은 분노에 찬 얼굴로 연천을 쏘아보았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더 버티면 끌어낼지 없애버릴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나간다면, 곱게 보내줄 마음은 있었다.
다행히도 연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충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릉―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이자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검을 뽑아!!”
모춘일이 붉어진 얼굴로 연천을 노려보았다.
불안한 얼굴로 모충일과 연천의 대화를 듣던 형란이 나섰다.
“대협! 검은 내려놓으시어요. 내려놓고 말로 하시어요. 저희가 대협을 못 믿는 것이 아니오라 상황이…….”
연천을 말리던, 형란은 더 말을 잊지 못했다.
연천의 검에서 쏟아져 나온 밝은 빛이 모충일의 집무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자잘한 뇌전이 살아있는 듯 반짝거리며 연천의 검을 감싸고 있었다.
모충일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졌다.
뇌전을 걷어 들인 연천의 검은 뒤이어 눈부시게 밝고 붉은빛을 밝혀냈다.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제게 이것을 뇌전신공과 천마신공이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림에 나와 들으니 혈영천마께서 사용한 무공이라고 하더군요.”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끝낸 연천이 검을 갈무리하고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승님이 가르쳐 준 이 무공이 진짜 천마신공이 아니라면, 연천은 가볍게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스승님이 혈영천마가 아니라는 뜻이니.
모충일은 온몸이 굳은 것처럼 딱딱하게 서 있었다.
연천은 굳은 모충일의 얼굴을 보며 돌아섰다.
‘스승님이 혈영천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인가? 그럼 스승님은 누구일까? 숙부님의 말씀대로 그저 이름 없는 촌부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이들이 틀린 것인가?’
혈영천마를 안다는 이들이, 스승님이 혈영천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뭔가 개운치 않았으나, 더 이상 이곳에 매달릴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생각한 연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모충일의 방 밖으로 향했다.
“자! 자, 잠깐만!”
다급한 모충일의 부름에 연천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모충일은 정신이 조금 나간 것처럼 보였다.
“…제, 제가 그 검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모충일이 연천에게 말을 높이고 있었지만, 연천도 모충일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다.
연천은 잠시 망설였다.
연천이 그 검을 늘 지니고 다닌 이유는 스승님이 남기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의 말처럼 검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모충일이 스승님에 대해서 뭔가를 알려준다면… 검을 보여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
연천은 말없이 검을 풀어, 모충일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