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고매혼:바람에_홀린…-92화 (92/230)

92화

의원을 모셔온 연천은 한시름을 놓고 문 앞에서 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형란은 가끔 밖으로 나와서 뜨거운 물이나 깨끗한 천을 챙겨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연천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의원과 그를 돕는 형란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해오고 영친왕의 성 주변을 살폈다.

효시된 머리는 내려졌지만, 벽서는 여전히 붙어 있었다.

영친왕의 검을 훔치다 잡힌 자들을 처형했다는 그 벽서 말이다.

해가 한창일 때부터 시작한 의원의 치료는 해가 저물고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의원과 형란은 거의 새벽녘이 되어서야 방 밖으로 나왔다.

형란은 피와 살점이 섞인 화살촉을 천에 싸 가지와 나와 처리했다.

묻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얼굴로 보아 치료가 잘 된 듯싶었다.

다음 날, 세 사람은 연천이 장에서 사 온 조촐한 음식으로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의원님, 그간 편안하셨나 봅니다. 얼굴이 좋습니다.”

형란의 말에 연천은 고개를 돌려 을령을 쳐다보았다.

“밥이며, 빨래며 챙겨주는 녀석들이 있다 보니 내가 좀 편하긴 하다.”

말이 거의 없던 을령은 형란에게 제법 따뜻한 말투로 답했다.

“다시 당산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너는 마을로 갈 거냐?”

“네…….”

“스승님은 마을에 계시고?”

“그럴 겁니다.”

“잘 되었구나, 환자들의 뒤는 스승님께 맡기면 되니….”

연천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에 처음 의원을 만났을 때 느꼈던 위화감이 들었다.

뼈에 가죽만 붙은 것처럼 비쩍 마른 몸, 중독된 것은 아닌지 걱정되도록 시커멓고 퀭한 눈, 기운 없는 눈동자와 핏기없는 새하얀 피부… 대체 어디가 얼굴이 좋다는 것인지…….

환자를 치료하는 의원의 모습, 독을 연구하는 학자의 모습… 그 어느 것과도 섞여들지 않는 을령의 모습에 묘한 이질감과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2, 3일 안가에서 묵으며 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한 을령은 다시 당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안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연천이 을령을 말렸다.

“…….”

을령이 연천을 쳐다보며 반쯤 뜬 눈을 껌뻑거렸다.

며칠을 같이 지내본 연천은 을령이 사악한 기운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원래 눈을 절반쯤만 뜨고 사물을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은 상당히 기운 없어 보이고, 어딘가 아픈 것 같으면서 뭔가를 숨기는 것 같기도 했다.

“당산에 의원님을 괴롭히던 무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연천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나를? 괴롭혀?”

의원은 연천의 말이 전혀 의외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자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을령과 길게 대화를 한 것도 아닌데, 연천은 자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아… 걔들? 괜찮은데.”

의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아니…….”

연천은 의원을 더 말려야 하는지, 자신이 당산까지 모셔다드리며 그 사악한 무리를 처리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의원님께서 괜찮다 하시면 괜찮은 것입니다.”

형란의 말에 연천은 더 이상 의원을 말리기가 뭣했다.

을령 본인이 괜찮다는데 계속 못 가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저 의원의 뭔가가 연천의 상식에서 어긋난 것 같은데 연천은 그것이 무엇인지 끄집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럼 나는 가겠네.”

을령이 짧게 말했다.

“의원님, 감사했습니다. 언제 또 뵐는지요?”

형란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또 볼 날이 오겠지, 스승님께 안부 전하거라.”

“건강하십시오.”

형란이 을령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몸조심하십시오.”

연천도 안가를 나서는 을령에게 말했다.

“젊은 사람이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구먼…….”

을령이 연천을 쓱 쳐다보곤, 중얼거리며 안가를 나섰다.

연천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아, 안가 밖으로 따라 나가 을령이 사라지는 방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을령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타박타박 걸어, 어느 순간 연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연천과 형란은 고비를 넘긴 환자들을 싣고 성도를 벗어나기로 했다.

시일을 들여 안정을 취하는 것이 환자들에게는 좋겠지만, 잠잠한 왕성의 동태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연천은 흔하고 낡은 마차를 구해와서 식량과 의원이 준 약, 그리고 환자들을 실었다.

다행히 성도와 사천을 벗어나는 데에 별다른 저지는 없었다.

쉬지 않고 며칠 밤낮은 달리던 마차는 어느 날 밤, 복건 무이산 아랫마을의 한 기와집 앞에서 멈추었다.

형란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문을 두드렸다.

두껍고 묵직한 문이 열리고 문밖으로 나온 법소는, 예고 없이 한밤중에 나타난 형란을 보고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 누워있는 세 사람을 보고는 다급히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위기는 넘겼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환자들을 몇 날 며칠, 밤낮으로 마차에 태워서 왔더니 몹시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집 안에 불이 켜지고, 형란 일행이 도착한 것을 알린 법소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연천은 법소와 함께 환자들을 안으로 옮겼다.

누군가가 서둘러 깔아놓은 이불 위로 세 사람을 눕히기가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옷매무새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장년의 사내가 급하게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사내는 마을의 촌장인 모충일이었다.

모충일은 바닥에 누워있는 세 명의 사내를 보더니 밖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의원! 의원을 모셔 오너라, 어서! 서둘러라.”

잠을 자던 식솔들이 깨어나 부산하게 움직이고, 집 안의 모든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법소가 소리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모충일이 의원을 모셔오라고 소리를 쳤으니 누가 가서라도 모셔오겠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법소가 나선 것이다.

모충일은 몸을 낮추어 누워있는 사내들을 한 명씩 살폈다.

의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지, 법소가 무슨 수를 썼는지 금방 달려왔다.

의원의 지시로 모충일과 연천, 형란은 환자가 있는 방의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 쉬어라,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꾸나.”

모충일이 굳은 얼굴로 형란에게 말했다.

“촌장님….”

할 말이 많은 형란이 모충일을 불렀다.

“고생했다. 내일 이야기하자.”

모충일이 형란의 말을 끊고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

형란이 입을 다물었다.

“저희 아이들을 예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소를 마련해 드릴 테니 오늘은 푹 쉬시지요.”

모충일이 연천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연천이 짧게 답했다.

연천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모충일의 신경은 온통 의원이 들어간 방으로 쏠려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상황도 파악해야 했고, 식솔들을 데려와 준 은인께 감사의 인사도 해야 했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세 사람이 우선이었다.

“따라오시지요.”

법소가 연천에게 말했다.

연천은 모충일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 법소를 따랐다.

모충일은 형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환자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방에 누워있는 아이들이 더 급했다.

연천은 차려준 음식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두툼한 이불이 깔린 침상에 누웠다.

며칠 만에 편안한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멀리 떨어진 별채에 마련해준 연천의 거처는 조용했다.

일정하게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 고요한 밤공기를 채웠다.

요란하고 시끄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가 없는 밤은 텅 빈 것처럼 쓸쓸했다.

언제고 헤어질 수 있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걸아와 이별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친형을 만나 그에게 보냈으니 잘된 게지… 나와 있어봤자,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연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걸아와 함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을 가지고 온 시녀는 식사만 차려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정갈하게 아침이 차려진 탁자를 둘러보다, 먹음직스럽게 볶아진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흐음….”

연천이 작게 숨을 내뱉었다.

식사 시간의 고요함에 입맛이 떨어졌다.

밥을 먹는 게 전쟁 같았다.

걸아는 음식이 탁자에 놓이기가 무섭게 제 앞으로 잡아당겨 입으로 욱여넣기 바빴다.

음식을 씹어 삼키는 소리는 또 어찌나 요란스러운지.

양 볼 가득 음식을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모양은 꼴사나운데… 희한하게도 그 모습이 입 짧은 사람도 식욕이 돋게 했다.

새삼 혼자서 밥 먹는 것이 적적하고 쓸쓸했다.

영 입맛이 없었다.

마지못해 차려진 음식을 끼적이던 연천은 결국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법소가 찾아왔다.

연천은 법소를 따라 그가 안내한 방으로 들어섰다.

정리가 잘된 방에는 커다란 탁자가 놓여있었고, 모충일과 형란이 이야기 중이었다.

방으로 들어서는 연천을 보고 모충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란도 따라 일어났다.

모충일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했다.

“대협! 고맙소. 내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도 못 했구려,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어서 고맙소.”

“아닙니다, 그분들은 무탈하십니까?”

연천은 그가 데리고 온 환자들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덕분에 괜찮다고 하오. 참말로 고맙소.”

모충일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

연천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연천이 타인을 돕는 일에 망설이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스승님과 관련이 있기에 나선 것이었다.

필요에 의해 한 일에 감사의 인사를 받자니 민망했다.

형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형란아! 괜찮다. 그만 고개를 들어도 된다.”

모충일이 형란을 위로했다.

“제 잘못입니다. 영친왕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을 텐데… 눈앞에 검을 보니 마음이 급해서 그만…….”

“너희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할 것 없다.”

형란을 향한 모충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일개 정보원인 저희가 섣불리 나서서 일을 그르쳤습니다. 한동안은 검에 대한 경계가 삼엄할 것인데….”

형란의 얼굴은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영친왕이 천마검을 미끼로 덫을 놓은 것이야. 걸려들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모충일이 형란을 달랬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영친왕의 성에서 고생이 많았다. 죄송하지 않아도 돼, 누가 어떤 일을 하던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만 죄송해하고 너는 마음을 추스르거라. 그래서 후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느냐?”

모충일이 따뜻하게 말했다.

“네… 촌장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