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형란이 만두를 들어 연천에게 내밀었다.
연천이 받아 들고 작게 미소를 보냈지만, 먹지 않고 손에 든 채로 입을 열었다.
“영친왕의 성에 참수된 세 사람의 목이 걸렸소. 천마검을 훔치다 잡힌 사람들이라고 하였소.”
연천의 느릿한 말은 묵직했다.
형란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영친왕이 천마검을 노리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것일 겁니다. 영친왕의 것을 노리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은밀히 우리를 찾고는 있겠지만 생각보다 경비가 삼엄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경비라고 할 것도 없었소. 천마검을 훔치다 잡힌 사람들은 옆방에 있지 않소? 효시된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곧이곧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연천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친왕의 성에서 탈옥을 한 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영친왕이 사람 셋을 처형하는 것이야 힘든 일도 아니지요. 다른 죄목으로 갇힌 자들일 수도 있고…….”
형란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삼켰다.
연천이 오라비들을 탈옥시킨 탓에 예정에 없던 자들이 처형당했다.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과 오라비들이 그 지경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 뒤섞였다.
“…….”
연천의 얼굴은 침울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사람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는 무림의 비정함에 가슴이 서늘했다.
왜인지 걸아가 생각났다.
냉정하고 각박한 무림에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음을 가르쳐준 아이가 말이다.
‘걸아에게 형이 있었어, 형이… 형과 함께 성을 빠져나갔겠지… 괜찮을 게야.’
뜨거운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 같은 연천의 속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시렸다.
형란의 목소리에 걸아에 대한 생각이 밀려났다.
“내놓고 우리를 찾으러 다니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서안 쪽으로 흔적을 만들어 두었으니 그쪽으로 집중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둘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좋겠지만, 오라비들의 상태가 저러니…….”
형란은 말을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마을까지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영친왕은 자신의 성이 파옥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누군지 모를 이들을 처형하고 일이 끝난 척하고 있었다.
이대로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영친왕이 변덕을 부려 제대로 그들을 찾기 시작한다면 잡힐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상태가 좋지 못한 환자를 셋이나 데리고 먼 길을 갈 수도 없었다.
가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지도 몰랐다.
“의원이 필요하오. 활촉의 모양이 독특하게 구부러져 있고 깊이 박혀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구려…….”
연천이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세 명의 사내를 어서 의원에게 보여야 했다.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 의원에게나 보일 수도 없었다.
영친왕도 탈옥한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을 찾는다면 제일 우선적으로 확인할 곳이 진료소였다.
“…….”
형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연천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답답했다.
형란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의원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믿을만한 의원을? 어디 가서 모셔온다는 말이오?”
연천이 형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영친왕의 영역인 이 성도 어디에 믿을만한 의원이 있다는 것인지….
“아마… 당산 주변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형란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산?”
연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의원이 당산에 왜?
“해독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라 독에 대한 연구를 하시느라…….”
형란이 뒷말을 흐렸다.
스스로도 개운치 못한 의원의 행적이었다.
의원이 산에 가서 약초를 캐어 관찰하고, 독을 연구하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환자의 치료를 위한 바탕이 되는 것이어야 했다.
의원 을령은 사람을 고치는 것은 뒷전이고, 독을 연구하는데 과하게 심취해 당산 인근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었다.
결계로 인해 당산 중심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주변 또한 당산에서 흘러나온 독충, 독초, 독과와 같은 독물들이 모여들곤 했기에.
형란은 그가 당산 인근에서 독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넓은 산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지금도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으면 잡아야 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했다.
“…….”
연천이 조금 놀란 눈으로 형란을 쳐다보았다.
당산이라면 누구보다 연천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삶 대부분을 보낸 곳이니 말이다.
결계 안에서 살았지만, 결계 밖 맛 좋은 과실이 열리는 곳, 약초가 무성히 자라는 곳, 독이 유난히 많은 곳, 산짐승이 모여 사는 곳… 연천은 그 주변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아마… 계실 겁니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형란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 인근 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소. 내가 가겠소. 누구를 찾으면 되오?”
연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형란이 연천을 바라보았다.
저것까지 연천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미안했지만, 당산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니 자신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형란은 당산의 위치만 어렴풋이 알 뿐이었지, 산이 어떻게 생겼는지, 산 어디에 의원이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 연천은 무공을 익혔다. 당산까지 가는 것도, 산을 타는 것도 자신보다 나을 것이다.
생각하던 형란이 입을 열었다.
“을령 의원입니다. 형란이가 찾는다고 하시면 될 겝니다.”
연천은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란을 안심시킨 후 안가를 나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 의원이 당산을 떠났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의원을 찾지 못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연천은 곧장 말을 구해서 당산으로 달렸다.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보냈던 그곳, 스승님과 함께했던 그곳, 이제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향하는 기분이 묘했다.
안가에서 멀지 않은 당산에 도착한 연천은 애써 결계를 못 본 척하고, 미리 생각해 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한 환자가 있어. 그 일이 우선이야…….’
결계 속 스승님과 살았던 집과 스승님의 무덤으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독을 연구하는 곳이라면 집히는 곳이 있었다.
당산에서 흘러나온 독물들이 모이는 결계 밖의 그 은밀한 곳을 알고 있었다.
“정말 너무 하신 거 아냐?”
“난 더 이상 못 참겠어!!”
“그럼 어쩌려고?”
“이번엔 어떡해서든지 끝장을 볼 거야!”
연천은 격양된 몇 개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숨겼다.
멀리서 보아도 목소리의 주인들에게서 사악한 기운이 풀풀 풍겨댔다.
연천은 조용히 그들을 살폈다.
무엇엔가 몹시 분개한 그들은 불쾌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며 흥분하더니, 곧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 가버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지켜보던 연천은 바로 그들을 뒤쫓았다.
인기척을 죽이고, 시커먼 기운을 흘리는 이들 뒤를 쫓아간 연천은 ‘역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무 명이 넘는 건장하고,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떼거리가 바람만 불어도 홱 쓰러져버릴 것 같은 한 사내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사내는 핏기없는 핼쑥한 얼굴에 눈 밑이 유난히 시커멓고 퀭했다.
연천은 사내가 저들에게 잡혀 볕도 보지 못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건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를 둘러싼 어두운 무리는 기분 나쁜 기운을 대놓고 풀풀 풍겨댔다.
사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잃을 만큼 거북한 기운이었다.
저리 좋지 못한 기운을 계속 받았다면 사내의 몸이 상할 만도 했다.
사내는 힘이 드는지 퀭한 눈을 미처 다 뜨지도 못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무리가 뿜어대는 사악한 기운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연천은 사내가 곧 쓰러지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조만간 의식을 잃던 기력이 다하건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사내가 걱정된 연천은 검을 뽑아 앞으로 나가, 불쾌한 무리를 향해 뇌전을 쏘았다.
잠시 후.
깊은 숲, 해도 잘 들지 않고 독물이 가득한 그곳에는 연천과 비실비실한 사내만 서 있었다.
“괜찮습니까?”
연천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뉘시오?”
사내의 목소리는 힘없고 가늘었다.
그의 첫마디는 살려줘서 고맙다든지, 도와달라든지 하는 말이 아닌 연천의 신분을 묻는 것이었다.
잡혀있던 사람을 구했더니, 누구냐는 물음에 당황한 연천은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이 산을 오른 이유를 말했다.
“어… 저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을령 의원이라는 분을요…….”
“나를? 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연천을 쳐다보았다.
“네, 네? 을령 의원이십니까? 저는… 그… 형란 소저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급한 환자가 있어서…….”
연천은 기운 없는 의원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형란이가?”
혼자서 형란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의원은 시커먼 동굴 앞쪽에 나무를 얽어 만든 공간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작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그리고 가타부타 말없이 연천을 지나쳐서 걸었다.
“……!!”
소리도 없이 가볍게 걸어가던 의원이 멈칫거리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사내 중 하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의원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아마도 뇌전을 제대로 맞지 못한 이인 듯,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었다.
의원은 가볍게 발을 털어 사내의 손을 떨쳐내고는 산 아래로 향했다.
연천은 바닥에 뒹구는 무리를 쓱 훑어보고는 의원을 뒤따랐다.
* * *
연천은 의원을 자신의 뒤에 태우고 말을 달렸다.
안가가 가까워져 오자 영친왕이 파옥한 자신들을 찾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왕성 주변도, 안가 인근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
그 고요함에 마음이 더 불편했다.
“의원님!”
형란이 안가로 들어서는 을령에게 달려들 듯이 다가갔다.
당산 인근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한곳에 오래 있지 않은 분이라 혹시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오랜만이네.”
표정이라고는 없던 의원 을령이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말했다.
“바쁘신데 이리 모시고 와서 죄송합니다. 오라버니들이….”
형란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을령을 환자들이 누운 방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