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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90화 (90/230)

90화

【마을로……】

형란은 곽준의 한쪽 팔을 단단히 잡고 걸었다.

연천도 양쪽 어깨의 사내들을 추어올리고 형란을 따랐다.

반 시진을 걸어 형란이 멈춘 곳은 마을의 외곽에 위치한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형란과 연천은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고 안으로 들어갔다.

외관과 다르게 집안에는 가구도, 이불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연천은 어깨에 멘 두 사람을 조심히 바닥에 눕혔다.

중독된 사내의 얼굴에 푸른빛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자기 발로 걸어온 곽준은 힘이 드는지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활에 맞은 사내는 의식이 오락가락하며, 신음을 흘렸다.

“저는 밖으로 나가서 저희의 흔적을 지우고 오겠습니다.”

형란의 말투는 다소곳했지만, 그 표정은 단호했다.

“위험하오.”

연천이 말렸다.

벌써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을지도 몰랐다.

형란 혼자 나가는 것은 위험했다.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더욱 위험합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어요.”

“…조심하시오.”

과단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연천이 답했다.

형란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연천은 누워있는 세 명의 사내를 한 명씩 살폈다.

화살촉은 안으로 감아 말리듯 휘어져 있었다.

실력 있는 의원에게 보여야 했다.

지금 연천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연천은 중독이 된 사내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몸은 지독한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랄한 독은 사람의 몸을 빠르게 지배해, 숨이 막히고 의식을 혼미하게 하지만 그 목숨만은 쉬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누가 만든 것인지…….’

연천의 머릿속에 뱀처럼 비릿한 미소를 띠는 백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내 생각을 지우고 집중한 연천은 자신의 기운을 밀어 넣었다.

깨끗한 기운에 독기들이 슬금슬금 물러나자, 연천은 힘을 주어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침이 꽂혀있던 미세한 피부로 시커먼 물이 줄줄 흐르다 진득한 것이 배어 나왔다.

사내의 입과 코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도 연천은 멈추지 않았다.

누워있던 사내가 급히 자세를 바꾸더니, 검은 덩어리를 토해냈다.

연천은 쉬지 않고 사내의 몸을 정화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사내가 선홍색 피를 내뿜었다.

연천은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하고 사내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사내는 편안한 얼굴로 규칙적인 숨을 내뱉으며 잠이 들었다.

잠시 후, 형란이 조용히 들어왔다.

형란은 피와 검은 액체가 뒤범벅된 오라비를 보고 놀라 그에게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곧, 그의 숨이 고르고 낯빛이 제 색을 찾은 것을 발견했다.

“어찌 된 것입니까?”

형란이 놀란 얼굴로 연천에게 물었다.

“내가… 해독을 했소… 미안하오. 좀 치워둘 것을…….”

연천이 사내 주위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닙니다.”

“…….”

연천이 머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란이 일어서더니 연천에게 큰절을 올렸다.

“대협, 감사합니다.”

“뭘… 그… 되었소. 그…….”

연천이 어정쩡하게 형란을 말렸다.

“…나갔던 일은 어찌 되었소?”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서안 쪽으로 흔적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것으로 속아주면 좋으련만…….”

형란이 한숨 섞인 말을 내뱉으며, 오라비들을 바라보았다.

연천도 불안한 얼굴로 힘들어하는 세 명의 사내들을 쳐다보았다.

다음날, 정오가 다 되어서 안가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연천이 주변을 살피며 문밖으로 나왔다.

장터에도,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움직일 시간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시간을 맞추어 나온 것이었다.

화살을 맞은 사내는 통증이 상당한지 신음을 멈추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소독을 하고, 통증을 줄이는 약이라도 써 볼 심산이었다.

화살자리가 곪거나 농이 들면 더욱 위험할 테니.

조용히 안가를 빠져나온 연천은 장터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형란은 영친왕의 시녀로 오랫동안 일을 했다.

얼굴도 알려졌겠지만, 첩자로 의심받을 수 있었다.

아니, 첩자가 맞지….

연천은 사태를 파악하러 나간다는 형란을 말렸다.

그리고, 그가 대신 나온 것이었다.

영친왕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성의 무사들을 모두 풀어 집을 하나씩 뒤질 수도 있었고, 연고 없는 자들을 모조리 성으로 잡아갈 수도 있었다.

그들로 인해 성도에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도저히 여의치 않으면 환자들을 이끌고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화살이 박힌 사내는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연천은 길게 난 왕성의 벽을 따라 걸었다.

영친왕의 호위무사 시험이 끝난 후, 성도로 들이닥쳤던 무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원래 성도의 인구가 적지는 않았지만, 인상 강한 무인들이 버글거리다 사라지니 휑한 기분마저 들었다.

연천은 사람들 틈에 섞여 눈에 띄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눈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성도 곳곳에 영친왕의 무사들이 깔려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눈에 불을 켜고 자신들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잔잔한 일상 그 자체였다.

영친왕의 성에서 탈옥을 했음에도, 성 밖에 검은 무복의 무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보아도 검문도 없고, 기찰도 없었다.

연천 일행을 쫓는 자들이 없었다.

한참을 걷던 연천은 걸음을 멈추었다.

영친왕의 성 한 편의 큰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그들은 왕성 높은 곳을 향해, 손가락질해댔다.

연천은 공터에 모인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장대 위에, 참수된 머리 세 개가 꽂혀있었다.

피를 대충 닦아낸 얼굴에 코가 주저앉고, 광대가 함몰되어 움푹 꺼져 있었다.

가족이 있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이 심했다.

이미 죽은 이들이지만, 그들이 살아서 얼마나 험한 일을 당했는지 알만했다.

연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효시된 머리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영친왕의 무슨 칼을 도둑질하려다 잡혔대.”

낮은 목소리에는 영친왕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장에 가면 널리고 널린 게 칼인데 왜 하필 영친왕의 칼을 훔쳤대?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만.”

왜 영친왕의 검을 훔치려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성도에 사는 이들은 이미 영친왕의 것을 넘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 하나만 조심하면 영친왕이 다스리는 세상은 나쁘지 않았다.

“훔치다가 잡혔다잖아, 훔치지도 못했대. 그게 그냥 칼이 아니고, 엄청 대단한 무슨 칼이래.”

“아무리 칼이 대단해도 지가 칼이지, 그게 목숨보다 더 대단하기야 하겠어?”

영친왕이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 이것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물건도 목숨보다는 대단하지 못하다는 것.

“쯧쯧… 애들은 이곳에 얼씬도 못 하게 해야겠구만.”

누군가 혀를 차며 지나갔다.

영친왕이 권력을 잡은 이후, 사람이 효시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대 황후인, 태상황후와 그녀 아비의 머리가 효시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이 뒤집혔음을, 영친왕의 세상이 열렸음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잠잠하던 성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세 사내의 머리가 걸렸다.

영친왕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뜻으로.

성벽에는 벽서가 붙어 있었다.

효시된 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영친왕의 검을 훔치다가 잡혀서 처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벽서를 읽는 연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벽서에 쓰여있는 내용대로라면 저들이 형란의 오라비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안가에 숨어 있지 않은가?

대체 저들은 누구이기에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어, 저리 머리까지 걸리게 된 것일까…?

불편한 무언가가 뱃속을 휘저어댔다.

영친왕은 애초에 천마검을 지키는 호위 따위 필요 없었다.

전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천마검의 호위를 뽑는 이 대단한 사건은 영친왕이 꾸민 커다란 계략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천마검을 넘보는 중원의 많은 무인들에게 경고를 보내기 위해서.

영친왕의 것을 탐하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벽서에는 효시된 자들을 돕다 함께 참수된 이들의 이름도 쓰여 있었다.

흔해 빠진 이름 몇과 신원미상자라고 쓰여진 이들은 열둘이 더 있었다.

영친왕은 알고 있었다.

참수된 이들 중에 신원미상자가 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가중해 준다는 것을.

무인들 중 천마검을 노리지 않는 자는 드물었고, 그 신원미상자들 중에 연락 뜸한 내 아버지나 내 스승, 내 제자나 내 아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만든다는 것을.

지금부터 주변 안부를 챙기고, 성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영친왕의 충고였다.

누가 참수되었을지 성 밖에서는 알 길이 없으니…….

연천은 복잡한 심정으로 공터를 지나 장으로 향했다.

약재상에서 몇 가지 약을 사고, 만두와 죽을 구입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영친왕의 무인들이나 누군가를 찾는 무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검을 훔치다 잡힌 이들이 처형이 되고 모든 일이 깔끔하게 끝난 것 같았다.

연천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뒤숭숭한 마음으로 안가로 향했다.

“어서 오시어요.”

연천이 돌아오자, 형란은 눈에 띄게 안도했다.

연천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말 대신,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을 좀 구해왔소.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오.”

연천은 활이 박힌 사내의 검상과 화살이 박힌 자리에 약을 발랐다.

그것은 그저 덧나지 않게 응급처치만 하는 것에 불과했다.

화살을 뽑아내고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었다.

그는 의식이 없는 중에도 신음을 내뱉었다.

형란이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해독을 한 사내의 얼굴은 제법 편안해 보였다.

형란이 그에게 죽을 먹였다.

내상을 입은 곽준도 일어나지 못했다.

내상도 내상이지만, 그 몸으로 걸어온 것이 만만치 않게 고되었으리라.

연천이 형란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환자들이 누운 옆방에서 그새 식어버린 만두를 앞에 두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무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상대방을 위해 음식을 놓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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