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연천은 달렸다.
어찌나 가볍게 뛰는지, 땅에 발바닥이 닿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가볍게 옥을 향해 나아갔다.
옥을 둘러싸고 있던 영친왕의 무인들은 멀리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연천을 보았다.
그들은 연천을 급한 전갈을 가지고 오는 영친왕의 무인이라고 생각했다.
검은 무복을 입고, 너무 당당하게 달려왔기에.
이곳은 영친왕의 성내였다.
지키는 이들도 많았다.
설마, 파옥을 하겠다는 자가 홀로 저리 대놓고 오기야 하겠는가?
연천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옥을 지키던 무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달려오는 자가 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검을 뽑아도 너무 일찍 뽑았다.
그들에게까지 오려면 아직 이장도 넘게 남아있었다.
자신이 적이니 미리 준비하라고 알려주는 것인지, 아니면 좀 모자란 자인지, 그것도 아니면 영친왕이 지시한 뭔가가 있는 것인지….
전혀 위협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내를 보며 무인들은 비슷한 생각을 했다.
검을 뽑아 든 연천이 허공을 좌에서 우로 베었다.
짧게 밝은 빛이 반짝이더니 연천의 전면에 서 있던 무인들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연천은 옥을 한 바퀴를 돌며 검을 휘둘렀다.
그의 동작은 단순하고, 빠르고 조용하며 정확했다.
위에서 아래로 베고, 그대로 검을 비틀어 좌에서 우로 가르고, 올려치며 그었다.
그 단순하지만 정확한 동작에 무인들이 쓰러져 나갔다.
쓰러지는 무인들에게 연천의 검은 닿지도 않았다.
연천의 검에 밝은 빛이 빠르게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옥을 둘러싸고 있던 영친왕의 무인들은 제대로 검 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모두 기절해버렸다.
형란은 멀리, 잠깐씩 비치었다 사라지는 빛을 보며 절망했다.
그런 빛을 낼 수 있는 이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백단’말이다.
무인들이 쓰러지자, 연천은 옥으로 다가갔다.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옥문을 열어, 안으로 들었다.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역하게 훅 끼쳤다.
새하얀 얼굴에 눈이 가로로 찢어진 사내가 달려드는 연천을 보고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한쪽 손은 내상을 입은 사내의 머리통을 잡고 있었다.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눈이 길게 찢어져 뱀을 연상케 하는 사내는 영친왕이 성에 들인 무림인 중 하나로, 그가 바로 죄인을 심문하고 취조하는 일을 전임하는 백단이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고통을 주는 수천 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잔혹하고 악랄한 취조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한, 수많은 진실을 끄집어낸 자이기도 했다.
침입자로 인해, 하던 일에 방해를 받은 백단은 손아귀에 있는 사내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주모자에 대해 제대로 된 단서도 얻지 못한 상태이기에, 머리통을 깨는 즐거움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백단은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한 연천을 노려보았다.
연천을 보던 백단은 이내, 얇고 유난히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려 웃었다.
뱀과 같은 교활한 웃음이었다.
자신을 즐겁게 해줄 놈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으니, 기분이 좋을 만도 했다.
백단이 연천을 향해 무언가를 날렸다.
끝이 둥글게 날카로운, 짐승의 발톱 같은 암기였다.
작은 원형을 그리며 날아간 백단의 암기는 갈고리처럼 살 속으로 파고들어, 제거하기가 어려운 깊은 상처를 남겼다.
연천이 몸을 가볍게 움직여 날아오는 것들을 피했다.
백단의 가는 눈꼬리가 반짝였다.
연천이 피할 것을 알았다는 듯, 연천의 몸이 착지하는 넓은 반경으로 검은빛이 도는 작을 알갱이들을 뿌렸다.
그것은 백단이 고문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흑충이었다.
쌀알만큼 작은 크기에 솜털처럼 가는 수백 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였다.
솜뭉치처럼 날아 사람이나 곤충의 피부에 붙어서 흡혈을 했다.
단 한 방울의 혈액이라도 흑충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솜털 같은 다리는 바늘처럼 날카로워지고, 피를 빠는 턱은 단단해져 잡은 먹이를 절대 놓지 않았다.
떼어 내려고 흑충을 때리고 뛰고, 손톱으로 긁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피를 빠는 흑충은 피의 응고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몸에서 먹이의 몸으로 맑은 액체를 내어놓는데 그게 사람을 미치도록 간지럽게 만들었다.
내장까지 자리자리하게 가려우면서, 사람을 날뛰게 만드는 고통.
자신이 오줌을 지리는지, 똥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고 눈을 까뒤집고 발광을 했다.
그쯤에서, 백단이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살고자 혹은 고통을 줄이고자, 알고 있는 바를 탈탈 털어 입 밖으로 내뱉으면, 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에 반쯤 정신을 놓고 허옇게 말라 죽었다.
하지만, 드물게 끝까지 입을 꽉 다무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백단이 작은 병의 뚜껑을 연다.
하얀 가루가 연기처럼 흩날리면, 흑충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백단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수천 가지의 비법을 가지고 있으니.
백단은 연천을 곱게 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처음 날린 암기는 흑충을 사용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암기를 피한 연천의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흑충이 날아왔다.
연천은 검을 둥글게 휘두르며, 뇌전을 넓게 펼쳤다.
작은 알갱이 같던 흑충이 뇌전의 벽에 부딪혀, 연천의 몸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백단의 눈이 흥미롭게 빛나며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섬뜩한 미소였다.
검을 든 연천이 백단에게 다가갔다.
연천이 다가가는 만큼 백단은 물러났다.
암기와 독, 벌레 등 알 수 없는 무기들을 다루는 백단은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거리를 벌리며 아예 옥 밖으로 나갔다.
백단은 서두르지 않았다.
저 재미있는 녀석을 괴롭히며 천천히 놀고 싶었다.
연천은 마음이 급했다.
일출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동이 틀 것이다.
해가 뜨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영친왕의 무사들이 교대를 하건 증원을 하건, 확실한 것은 자신이 불리했다.
연천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백단과 연천의 거리는 일장 이상이었다.
연천은 더 이상 백단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멀리서 백단이 있는 방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허공을 찌른 연천의 검 끝에서 가늘고 눈부신 빛줄기가 검은 공간을 그으며 실처럼 날아가 백단의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백단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의문 가득한 얼굴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연천은 서둘러 옥으로 들어갔다.
각혈을 했는지 입 주위와 앞섶이 피로 젖은 사내, 곽준이 옥의 한쪽 벽에 붙어 연천을 쳐다보았다.
내상을 입은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있었다.
연천이 곽준에게 다가갔다.
그가 경계 어린 얼굴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형란 소저를 돕는 사람이오. 일어날 수 있겠소?”
연천 말에 곽준은 핏기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곽준의 옆에는 의식 없는 두 명의 사내가 드러누워 있었다.
연천은 그중 한 명인 중독된 사내의 몸에 꽂혀있는 침을 조심스레 뽑아냈다.
그리고, 화살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미안하오. 조금만 참으시오.”
연천이 의식도 없는 사내에게 사과부터 했다.
“……?”
유일하게 의식이 있는 곽준의 눈동자에 불안한 의문이 담겼다.
“흐음…….”
연천은 심호흡을 하고는, 앞에 누워있는 사내의 몸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화살대와 깃을 분질렀다.
“으아아아악!”
사내가 의식이 없는 중에도 비명을 질러댔다.
어쩔 수가 없었다.
몸 밖으로 나와 있는 화살이 잘못해서 다른 사람이나 벽에 걸려 뒤로 빠지거나 방향을 바꾼다면 더 큰 고통과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천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사내의 옆구리에 난 화살마저 부러트렸다.
그가 울부짖음과 흡사한 신음을 터트렸다.
잠깐 사이 사내는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땀을 흘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연천이 그의 손을 잡고 잠시 도닥였다.
그리고, 의식이 없는 두 사람을 양쪽 어깨에 멨다.
곽준이 벽을 잡고 일어나, 허연 얼굴로 비틀비틀 연천을 따랐다.
* * *
형란은 멍한 얼굴로 구석에 주저앉아있었다.
이대로라면 해가 뜨고 머지않아 형란도 잡힐 것이다.
알고 있지만, 혼자서 성 밖으로 나갈 의지를 잃었다.
오라버니들과 자신이 끌어들인 이름 모를 사내를 두고 혼자 살겠다고 성을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형란은,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믿을 수가 없었다.
“오, 오…라버니?”
형란이 달려와, 허연 얼굴로 비틀비틀 걷는 곽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어디로 가야 하오?”
연천은 기쁨과 놀라움과 의구심과… 온갖 감정이 뒤섞여 정신없는 형란에게 다른 설명 없이 물었다.
형란은 머릿속을 채운 의문과 감정들을 털어냈다.
지금 어떻게 오라비들을 구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따라오시지요. 멀지 않습니다. 시종들만 출입하는 쪽문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형란이 곽준을 부축하고 앞서 걸었다.
연천이 양어깨에 사내 둘을 매고 따랐다.
화살을 맞은 사내가 줄곧 신음을 흘렸다.
비틀대는 곽준을 이끌고 앞장서서 걷던 형란이 걸음을 멈추더니, 후미진 담벼락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는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작고, 낡아 빠진 나무문이 있었다.
형란이 익숙하게 고리를 풀고 문을 밀었다.
오래된 문은 의외로 조용히 열렸다.
형란이 연천에게 먼저 나가라는 눈짓을 했다.
연천은 고개를 숙여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내들을 차례로 밖으로 잡아끌었다.
마지막으로 형란이 주변의 흔적을 지우며 나왔다.
세 겹으로 둘러싸인 성벽은 형란의 도움으로 조용히 지나올 수 있었다.
성을 나온 형란은 일단 한시름 놓였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일을 도모하기 전에 준비해둔 안가가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과단했다.
나무 아래에 숨어 몸을 벌벌 떨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이제 오라비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덜떨어진 여인처럼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오라비들을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