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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8화 (88/230)

88화

【파옥】

걸화의 울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리고, 연천을 잠자코 올려다보았다.

지금 걸화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는 백연천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비싼 옷을 입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걸화가 아는 백연천은 걸화를 보면 웃어주고, 그녀가 울면 달래주었다.

항상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걸화가 아파하는 것을 보면서도 묵묵히 서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알던 백연천이라 보기 힘들었다.

걸화는 연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렸다.

변명이든 해명이든 무슨 말이든 하기를.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하지 못한다. 나와 함께 하면 너에게 좋지 못해.”

한참 만에 입을 연, 연천의 작은 목소리는 거칠었다.

“…….”

걸화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잦아들었던 눈물이 다시 삐져나왔다.

연천의 묵묵한 얼굴을 보면서, 두려웠던 것이 이것이었다.

자신을 찾지 않은 연천이었다.

찾지 않은데 이유가 없을 리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두려웠다.

막 떼를 쓰고 싶었다.

이전처럼 안 된다 해도 끝까지 쫓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걸화를 엄습했다.

정말 연천과는 끝일 것 같은 두려움.

“…….”

연천은 그 한마디를 하고 말이 없었다.

그저 굳은 얼굴로 걸화의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스승님에 대해서 알아냈어요?”

걸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연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냈는데 내가 같이 다니면 안 돼요? 그분이… 그분이… 내가 욕했던 그분이 진짜 스승님이에요?”

물으면서 걸화는 그날을 후회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함부로 말한 것을 후회했다.

연천이 스승님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기에 가슴 깊은 곳에서 사무치게 후회가 밀려왔다.

“…….”

연천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욕하지 않을게요…….”

걸화의 목소리는 낮게 젖어 들었다.

“그래도 안 돼…….”

연천이 낮은 소리로 답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같이 다니면 안 돼요?”

걸화는 연천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내게 왜 이러냐고!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던 그 백연천으로 돌아오라고 빌고 싶었다.

“…….”

연천이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은데… 나는 형님의 스승님이 그분이어도 상관없는데…….”

“…….”

“조용히 따라다니는 것도 안 돼요?”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보고 싶었다.

연천이 주는 안온함과 따뜻함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제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보고 싶지 않을까?

종종 생각이 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었으니.

“안돼.”

연천이 아픈 목으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같이 다니고 싶은데…….”

“…….”

연천의 미간의 골이 깊어졌다.

“몰래 따라 다니면…?”

걸화는 떼를 쓰고 있었다.

어찌해서건 연천 옆에 남고 싶었고, 자신이 알던 그 백연천을 보고 싶어서.

“…….”

“안 돼요?”

걸화가 다시 물으며 연천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

연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고갯짓과 텅 빈 얼굴에 담긴 괴로움이 걸화의 물음에 답을 하고 있었다.

작게 열렸던 문이 완전히 닫힌 것 같았다.

이건 백연천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형님도 어쩔 수 없구나…….”

연천이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를 알면서도 걸화는 그와 헤어지기 싫었다.

그냥 같이 있고 싶고, 자신을 밀어내는 연천이 미웠다.

“…….”

“…잘 살아요… 잘… 난 못살 거예요. 나는 형님 때문에 잘 못살 거예요.”

걸화는 연천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로, 마지막 억지를 써댔다.

“…….”

연천은 눈을 내리깔고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나, 가야 하는구나….”

“…….”

연천이 걸화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담겨있었다.

“정말 가기 싫은데 가야 하는구나…….”

“…….”

연천의 대답 없는 얼굴은 이제 작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바보! 등신! 머저리! 나쁜 놈!!”

걸화가 연천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악을 쓰며 연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

“나 마음 아파 죽으면 다 형님 때문이야!!”

외치듯이 말하고는 객잔을 빠져나왔다.

“으아아아아… 아아앙…….”

결화는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객잔에서 멀어졌다.

걸윤이 두 마리의 말을 끌고 걸화의 뒤에서 터덜터덜 걸었다.

멀어지는 걸화의 울음소리가 연천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연천은 아주 오랫동안 세상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가족과 이별을 하고 있었다.

‘이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냥 죽은 것으로 알고 살면 좋았을 것을…….’

아무것도 없는 연천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 * *

2년 전, 영친왕의 성 외곽에는 크지 않은 전각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은 성에 들어오는 귀한 손님들의 시종이나 종속, 수하들이 묵는 숙소 중 일부였다.

현재는 새로 뽑은 임시 호위무사들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다.

엇갈려 자리 잡은 전각 사이의 어둠을 따라 움직이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두 인영은 빠른 걸음으로 전각 사이를 빠져나왔다.

두 명의 검은 인영과 똑같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성 곳곳에 도열 해 있었지만, 둘은 다른 무인들을 피했다.

넓은 전각을 반대 방향으로 삥 돌아 걷기도 하고, 몸을 최대한 낮추어 움직이기도 했다.

검은색의 무복을 입고 무인들을 피해 움직이는 두 사람은 연천과 형란이었다.

두 사람은 영친왕 무사들의 검은 무복을 훔쳐 입고, 형란의 세 오라비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워낙 성이 넓기도 했고, 영친왕의 무인들을 피해 움직이다 보니, 형란이 말한 옥에 다다르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나마도 형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천 혼자였다면, 영친왕의 성을 떠도는 미아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을 헤매고 다녔으리라.

“…….”

어둠 속에 쪼그려 앉은 형란이, 멀리 보이는 나지막한 건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세 명의 검 도둑이 갇힌 옥 주위로 영친왕의 무인들이 한걸음 간격으로 빙 둘러 가며 서 있었다.

족히 100명은 되는 무인들이 옥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은 비명이 옥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입술을 꼭 깨문 형란의 손이 떨렸다.

연천이 형란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

연천이 형란에게 눈짓을 하고 일어섰다.

자신이 가 볼 테니 기다리라고 말이다.

연천을 잡은 형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연천은 자신의 손을 놓지 않는 형란을 내려다보았다.

연천의 손을 잡은 형란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오라비들이 잡힌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함정인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알아채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잡힌 오라비들을 두고 차마 갈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잡혔더라도 오라비들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영친왕의 성에 잡힌 오라버니들을 혼자서 구해낼 도리가 없었다.

형란은 탐색과 정보 수집을 위해 잠입했다.

무공 실력은 부족했지만, 은잠술이 적성에 맞았다.

뛰어난 은잠술과 그저 그런 무공으로 오라비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가 연천이었다.

이 사람이 가면 오라비들을 구해올 수 있을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가 저어졌다.

오라비들을 구하겠다는 욕심에 이 사람마저 사지로 끌어들인 것이 아닌가?

쟁쟁한 무인들이 버글대는 저곳으로 가서 이 사람마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때는…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형란은 연천의 손을 놓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지만, 옥을 지키는 무인들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같이 고통에 찬 비명에 익숙한 듯했다.

연천이 의문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형란을 쳐다보았다.

형란이 젖은 눈으로 연천을 마주 보았다.

눈가에 이슬이 그렁그렁 맺힌 형란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고신을 할 것이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시각까지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해가 뜨기까지 두 시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죽지 않을 만큼 고신을 하고 널브러진 오라비들을 몇 명의 호위들이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연천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형란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지키고 있는 무사들도 많았고, 고신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형란은 알고 있었다.

무림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백단이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그의 수백 가지 고신 방법이 성내에 뜬소문처럼 무성했다.

사람의 가죽만 뒤집어썼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에게 일곱 번 죽임을 당해, 인간에 대한 독기만 남은 만년 묵은 백사를 사악한 주술로 살려낸 것이 그라는 소문이 성안에 파다했다.

그 소문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악독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오라비들을 구하고 싶었다.

형란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세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호위들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백단이 있었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어쭙잖게 나섰다가는 오라비들은 물론이고 연천마저도 죽을 수 있었다.

연천이 형란은 보고 빙그레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사내의 미소에 형란이 당황했다.

두려움에 떨리던 심장이 이상한 방향으로 뛰어댔다.

연천은 형란에게 잡힌 손을 빼내어, 옥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형란이 연천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는 이미 달려나가고 없었다.

후회와 두려움, 비탄이 뒤섞인 감정이 형란을 휘몰아쳤다.

‘저 사람마저 돌아오지 못하면… 그러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되었다.

비통하고 참담한 형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없는 눈물만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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