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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7화 (87/230)

87화

걸윤이 연천을 노려보았다.

연천은 잠든 걸화를 조용히 바라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잘 계시었소?”

연천이 걸화에게서 눈을 떼어, 걸윤을 보며 물었다.

“하! 잘못 지냈소!! 그대는 어지간히 잘 지냈나 보오?”

걸윤이 연천을 비꼬았다.

걸화가 아파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걸윤 또한 2년 내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협의만 높았던 그 머저리 같은 놈을 데려 나오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 말이다.

그간의 마음고생이 억울해 화가 났다.

헤어지기 전에 자신이 개방 사람이라고 밝혔다.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저 이기적인 놈은 그런 수고도 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소식만 전해줬어도 걸화도 걸윤도, 개방의 분위기도 지난 2년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나 보오.”

연천이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걸윤은 연천의 무거운 얼굴에 아주 조금 흥분이 가라앉았지만, 그의 말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어찌 걸아를 찾을 생각도 안 했소?”

“내가 무슨 낯으로 걸아를 찾겠소, 내 옆에 있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연천의 말에, 걸윤은 그와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자신의 스승이 혈영천마인 것 같다고 했던 그 말이.

“…….”

걸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연천을 쳐다볼 뿐 뭐라 말하지 않았다.

훤한 신수와 다르게, 연천의 표정과 분위기에는 생기가 빠져 있었다.

그 모습에 화를 내고 닦달할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

연천이 걸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걸아는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에게 생긴 유일한 가족이었다.

걸아와 있는 동안 연천은 그리 생각했다.

자신의 아우고, 제자고 피붙이와 같다고.

그 아이를 떼어 내는 게 연천이라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천의 앞날은 어찌 될지 모른다.

자신이 혈영천마의 제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곁에 정파의 핏줄인 걸아가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걸아는 물론이고 개방에까지 누를 끼칠 수도 있었다.

“그날 내게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이 진실이오?”

연천이 걸윤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혈영천마가 자신의 스승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연천의 스승이 정말 혈영천마인지 묻는 것이었다.

“…….”

연천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연천에게 향했던 날카로운 시선이 누그러졌다.

어찌 살아 나와 저리 신수가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걸화를 찾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었다.

혈영천마의 제자이니 차마 걸화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혈영천마와 얽혀 자신과 개방에 해가 될까 그리도 걱정했던 것은 걸윤, 자신이었으니.

연천의 상황이 이해가 되긴 했지만, 뭔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지난 시간이 억울했다.

“그래서 앞으로 걸아를 어찌할 셈이요?”

걸윤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찌하겠소… 걸아와 그대는 개방도가 아니오?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게지…….”

연천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후……!”

걸윤이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이면서 걸화에게 들러붙었다면, 걸윤이 무슨 수를 써서든 떼어 냈을 것이다.

한데, 저리 순순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이상하게 기분 나빴다.

함께 다니던 중에도 내내 마음에 들지 않던 연천이었다.

새삼 정이 들것도 없는데, 순순히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것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속에서 꿈틀대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짜증스러웠다.

“우리가 이곳에 왜 온 줄 아시오?”

걸윤의 날 선 질문에 연천은 조용히 걸윤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대를 찾으러 왔소. 걸아가 그대를 찾겠다고 해서 예까지 온 것이란 말이오.”

“죽은 것으로 생각하시오.”

연천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걸아를 몰라서 그리 말하는 게요? 걸아는 지금껏 당신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소. 그래서 영친왕에게 복수하겠다고 집을 나간 것을 내가 왕성 앞에서 겨우 붙잡았소.”

걸윤의 설명에 연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걸아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 아이는 단순하고 무모했고, 마음먹은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 객잔에서 묵으시오. 내일 술이 깨면 내가 걸아와 이야기를 해보리다.”

연천의 무거운 목소리는 침착했다.

걸윤은 도끼눈으로 연천을 노려보고, 걸화를 부축해서 자리를 떴다.

연천은 굳은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연천이 그리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형란이 걱정이 되어 연천을 말렸다.

“그만 드시어요. 몸이 상합니다.”

연천은 술잔을 내렸지만 변함없는 표정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 * *

“으으으흐…….”

심하게 앓아대는 소리에 걸윤이 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봉두난발을 한 걸화가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에휴…….”

걸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보고 있으면 속이 시끄러웠다.

어젯밤 연천을 만나고 돌아와 밤잠을 설쳤다.

연천은 자신이 걸화에게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지만, 연천과 만나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혹여, 걸화가 연천을 쫓아가겠다고 우기면 어찌하겠는가?

혈영천마를 추종하는 무리 속에 걸화가 끼어있는 것을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했다.

그것 또한 절대로 막아야 할 일이었다.

연천을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영친왕의 성으로 뛰어들 것이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연천에게 맡겨보는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 머리 아파, 윽! 속도 안 좋아. 으으으으, 으엑… 토하고 싶어…….”

걸화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에휴우…….”

한숨을 내쉰 걸윤이 걸화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야! 씻어! 너를 보겠다는 사람이 있어.”

“…나를 보겠다는 사람? 이 복건 땅에? 누군데?”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걸화의 목소리는 어눌한 데가 있었다.

“가서 봐….”

걸윤이 대충 얼버무렸다.

아직도 연천을 만나게 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걸화가 영친왕의 성에 뛰어드는 것보다 나은 듯해서 그리한 것이었다.

제발 걸화가 이번에 연천을 보고 정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면 되지, 암튼 너랑 말하면 짜증 나….”

걸화가 구시렁대며 침상에서 내려와 비틀거렸다.

“씻어!!”

“머리가 너무 아파…….”

“어휴, 저거…….”

걸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지손가락에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자신의 누이를 쳐다보았다.

“으으으으… 머리야… 누가 이 아침부터 귀찮게…….”

한낮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지만, 방금 눈을 뜬 걸화는 아침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걸화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걸윤이 말한 2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2층에 비단옷을 차려입은 사내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얼핏 보아도 꽤나 부잣집 자제로 보였다.

“거, 무슨 일이기에 저를 보자고….”

자신을 돌아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걸화는 말문이 막혔다.

“…….”

연천이 걸화를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미소 띤 얼굴이 어색했다.

“…….”

걸화의 미간이 구겨졌다.

서두르면 연천이 달아나기라도 할 듯이, 천천히 신중하게 연천에게 다가갔다.

“걸아야…….”

자리에서 일어선 연천이 조심스럽게 걸화를 불렀다.

연천의 앞에선 걸화가 그의 얼굴을 뚫을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

연천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연천이라고 지난 2년 동안 걸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밥상에 올라온 고기반찬을 볼 때나 고요한 방에 자려고 누웠을 때, 길을 걸을 때, 귀한 술이 생겼을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랐다.

가끔은 길을 가다 한 번쯤 마주치는 일은 없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작고 어린 걸아가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자랐을지 종종 궁금했다.

2년 만에 본 걸아는 키가 조금 크긴 했지만, 여전히 마르고 작았다.

“살아있었어요? 살아있으면서 나를 찾을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내가 먼저 나가 있으면 형님이 나를 찾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내가 걱정할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소식 한 자 보낼 생각을 안 했어요?”

“…….”

연천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살기를 바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씨이……!”

걸화가 주먹으로 연천의 가슴을 세게 쳤다.

치고 또 쳤다.

2년간 쌓인 마음의 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두 손을 말아 쥐고 연천을 쳐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연천은 꼿꼿이 서서 걸화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걱정을 했겠지, 마음이 아팠겠지.

자신을 찾아보려 이 짓 저 짓 다 해봤겠지.

그래도 찾지 못하면, 죽었다고 생각하며 체념하고 살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잊고 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혈영천마의 제자와 얽히는 것보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죽은 사람이 되려 했었다.

“내가 이리 모진 사람인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그리 걱정했어! 바보같이!! 이리 잘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멍청하게 복수하려고 했어! 형님은 정말 나쁜… 바보! 멍청이!! 등신이야!!”

걸화가 악을 써대며 연천의 가슴을 두드려댔다.

연천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걸화의 주먹을 받아냈다.

“으아아아아앙…….”

연천을 두드려대던 걸화는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2년간을 참았다.

그리도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산 그 세월 동안 울고 싶어도 참았다.

최소한 자신은 살아있으니.

편하게 쉬는 것도 미안하고, 밥 먹는 것을 먹는 것도 미안했다.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죽은 연천에게 미안해서 죽은 것처럼 살았다.

도저히 그리 살 수가 없어서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랬는데, 연천은 이리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걸화가 스스로를 죽이며 산 그 시간 동안 연천은 비단옷을 걸치고, 호위까지 대동하며 편히 살았던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

연천의 미간에 내천자가 깊이 새겨졌다.

눈을 꼭 감고, 걸화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등을 쓰다듬어 주지도, 다독여주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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