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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6화 (86/230)

86화

복수는 나중에도 할 수 있었다.

복건을 다 뒤집은 후에도 연천이 없으면 그때 해도 되었다.

연천을 찾는 데는 걸윤이 필요했다.

걸화가 분타에 가서 정보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쳐봤자, 총타로 끌려갈 게 뻔했다.

복건으로 간 사람에 대해 알아내려면 걸윤이 있어야 했다.

“흠…….”

걸윤이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일단 복수하러 가겠다는 건 막은 셈이었다.

* * *

걸윤과 걸화는 말을 타고 타박타박 앞으로 나아갔다.

“쫌 빨리 가면 안 돼?”

걸화가 재촉했다.

“나 너 찾으러 온다고 쉬지도 않고 달렸어, 이제 기운 없어서 못 달려. 답답하면 혼자 가든가!”

걸윤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잇… 쯧.”

걸화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참아야 했다.

혼자 복건으로 간들 찾을 수 없었다.

사람 찾는 데는 개방 거지들의 힘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걸윤이 있어야 했다.

“…….”

걸윤은 걸화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타고 늑장을 부렸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연천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장 어찌할 방법도 없었다.

최대한 천천히 걸화를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영친왕의 성으로 가는 것을 막을 심산이었다.

걸윤은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진짜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걸화가 혼자 구시렁거렸다.

그 형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왜 지금껏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사람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서 그렇지, 무공도 출중하고 빛나는 검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다.

그럼 왜 이제껏 나를 찾지 않은 것일까?

먼저 나가 있으면 형님이 나를 찾겠다고 약속했는데….

‘형님은 형님대로 나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내가 총타에만 계속 있어서 못 찾은 것이구나. 이리 어리석어서야…….’

걸화는 말 위에서 혼자 실실 웃었다.

“너 정신 나간 사람 같아, 그만 웃어.”

걸윤이 걸화에게 핀잔했다.

“내가 정신 나간 사람이면, 넌 정신 나간 사람 형이다!”

걸화가 쏘아붙였다.

“오라비도 아니고 형이냐? 내가 너랑 말을 말아야지, 아! 고만 웃어! 바보 같아!”

복건 어딘가에 그자가 제발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윤이었다.

“…흥!”

걸화가 걸윤을 흘겨보고는 고개를 팩 돌렸다.

“…….”

걸윤은 앞만 보고 나아갔다.

복건 전체를 뒤집어도 연천을 찾지 못할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타박타박, 일정한 속도로 바닥을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만 울렸다.

“걸부 형… 화 많이 났어? 그리고 저기… 신의님은 괜찮으셔……?”

걸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숨을 건 복수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의께 말할 수 없이 죄송하고, 걸부 형에게 미안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생각만 해도 묵직한 죄책감이 명치를 콱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거야? 걸부 형이 너 잡히면 가만 안 둔다 그러더라.”

걸윤의 과장된 협박에 죄책감이고 뭐고 확 깨는 걸화였다.

“거짓말!! 형이 그럴 리가 없어.”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냐?”

걸윤이 얄밉게 비아냥댔다.

“묻지도 못하냐?”

아무튼, 저 인간하고 뭔 진지한 말을 할 수가 없다.

“너는 대체 간땡이가 얼마나 부은 거냐? 어떻게 그걸 훔칠 생각을 해?”

이것은 걸윤의 진심이었다.

“필요하니깐 훔쳤지!”

미안한 마음은 마음이고, 배걸윤이라는 인간은 짜증 났다.

“야! 배걸화! 필요하다고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내 이름 배걸화 아니고, 배걸아야! 개방 밖에서는 걸아라고! 똑바로 불러!”

“너는 만날 나를 ‘야’라고 부르면서, 너는 이름이 불리길 바라냐?”

“바라면 안 되냐? 좋아! 꼬박꼬박 배걸윤이라고 불러줄께.”

“내가 너보다 세 살이나 많거든.”

“늙어서 좋겠다.”

걸윤과 걸화는 말을 타고 투닥투닥거리며 복건으로 향했다.

“아! 쫌 빨리 좀 가자고오!!”

걸화가 걸윤을 재촉했고.

“나 피곤해. 더 쉴 거야…….”

걸윤은 꾸물거렸다.

“나 더는 못 가! 쉬었다 가!!”

걸윤은 자주 쉬었고,

“뭘 또 쉬어!! 더 가아!!”

걸화는 걸윤을 다그쳤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때로는 서두르면서 복건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성도를 벗어난 지 보름이 넘은 어느날, 둘은 복건 무이산 인근의 객잔에서 묵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객잔 식당에 앉아있는 걸화와 걸윤이었다.

“아오!! 너 진짜 너무 꾸물거린다. 대체 여기까지 오는데 며칠이나 걸린 거야?”

걸화가 투덜댔다.

“…….”

걸윤은 귀를 후비적거렸다.

대꾸하고 싶지 않은 걸화의 말에는 늘 저런 식이었다.

“으이씨… 내가 너 때문에 승질을 하도 참았더니, 도인이 될 것 같다. 우와… 나 머리 깎고 소림에 들어가도 될 것 같아.”

말을 마친 걸화가 눈을 감고 씩씩거리며 심호흡했다.

“크하하하! 야! 그동안 사람들이 너 땜에 참은 게 얼만데, 넌 아직 멀었어! 그리고 도인이면 무당으로 가야지 어떻게 소림으로 가냐? 그리고 너, 소림에서 받아주지도 않거든!!”

걸윤이 통쾌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걸화 때문에 골머리 아픈 이가 한 명, 두 명이었겠는가?

사람 속을 긁어댄 게 하루 이틀이었겠는가?

걸화가 자신 때문에 성질을 참으며 속을 썩이고 있다는데, 걸윤은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여기 오리고기와 죽엽청 주시오!!”

걸화가 손을 들어 주문했다.

“너 술 마시게?”

“복건도 거의 다 왔잖아, 오늘은 좀 마시자. 와… 내가 너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 빨리 형님을 찾든지 해야지 계속 너랑 같이 다닐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진다, 터져.”

걸화는 연천이 당연히 살아있다는 듯이 말했다.

걸윤은 거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 겁난다. 안 그래도 너는 제정신이 아닌데, 술까지 먹으면 얼마나 정신을 놓을지 무서워.”

너스레를 떨며 걸화를 놀렸다.

“어! 오늘 나 먹고 죽을 거야! 안 그랬다가는 너 땜에 성질나서 돌아버릴 것 같아.”

걸화가 술을 잔에 따라 들이켰다.

“하… 저거 불안한데…….”

걸윤은 연거푸 잔을 비우는 걸화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걸윤아! 자! 자! 한잔 받아.”

걸화가 걸윤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리고 오리고기를 뜯어 입에 욱여넣었다.

지난 2년 동안 걸화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살았다.

성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걸윤이 먹고 자고 쉬는 동안, 옆에서 재촉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았다.

움직임 많은 걸화는 삐쩍 말라 있었다.

걸윤은 오랜만에 시원하게 무언가를 먹는 누이를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여기! 한 병 더!”

걸화가 술병을 흔들며 점소이에게 외쳤다.

“야! 그만 마셔, 벌써 많이 마셨어.”

걸윤이 걸화를 말렸다.

“아이쒸… 진쨔… 너능 맨날 왜 그러냐? 내가 뭐만 하면 못하게 구래…….”

걸화의 몸은 이미 휘청대고 있었다.

“아휴….”

걸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 말리지 않았다.

걸화가 술을 시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였다.

걸화는 히죽히죽 웃으며 술을 따라 마셨다.

“어서 옵쇼.”

네댓 명의 손님이 객잔으로 들어오자 점소이가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걸화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리고, 걸화의 시간만 정지한 것처럼 그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또 왜 저래….”

걸윤이 구시렁대며, 걸화의 시선이 머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걸윤의 얼굴은 놀람과 의아함과 짜증이 뒤섞여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걸화가 벌떡 일어났다.

쾅―

앉았던 의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걸화는 객잔의 기물에 온몸을 마구 부딪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비단옷을 입은 사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내는 척 보기에도 비싼 비단옷을 태깔 좋게 걸치고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하게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걸화를 내려다보고 있는 연천이었다.

“하하하하, 걸윤아! 내가 미치긴 미쳤나 봐. 형님이 여기 있어. 아! 오리고기랑 죽엽청을 먹어서 그렇구나, 나 이제 평생 오리고기와 죽엽청만 먹고살 거야.”

걸화가 비틀비틀 연천에게 다가가려는데, 연천의 옆에 있던 사내들이 재빠르게 걸화를 저지했다.

연천을 호위하는 자들이었다.

연천은 호위들이 걸화를 막는 것을 보고도 말리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그들을 보던 걸윤이 날듯이 뛰어가, 사내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걸화를 부축했다.

“하! 신수가 훤하시구려.”

걸윤이 연천을 쏘아보며, 비꼬았다.

연천은 걸화를 가만히 내려다 볼뿐, 걸윤의 가시 박힌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야! 놔! 형님이잖아, 형니임!”

걸화가 걸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댔다.

연천의 얼굴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처음 객잔에 들어올 때와 똑같았다.

표정이라는 것이 없는 그 얼굴 말이다.

“위로 올라가시지요.”

연천의 옆에 있던 호위가 걸화와 걸윤을 막아서며 말했다.

연천은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내 아우는 당신 걱정에 지난 2년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는데 당신은 이리도 뻔뻔히 잘 살아계시었소!”

걸윤이 2층으로 오르는 연천에게 소리쳤다.

연천에 대한 노여움은 걸화의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계단을 밟는 연천의 걸음이 더욱 느려졌다.

“영친왕에게 당신 복수를 하겠다는 서찰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소!”

걸윤의 외침에 연천의 발걸음이 딱 멈추었다.

“2층으로 모시거라.”

연천이 걸윤이 아닌 자신의 호위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다시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하! 저자가!”

걸윤은 화가 치밀었다.

걸화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연천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으로 하루하루 말라갔다.

그런데 정작 그 걱정의 대상은 훤한 얼굴로 자신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연천의 호위무사 하나가 걸윤에게 다가왔다.

“올라가시지요.”

“…….”

걸윤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걸화를 붙잡고 2층으로 올랐다.

텅 빈 2층에는 연천만 가운데의 커다란 탁자에 앉아있었다.

걸윤은 걸화를 조심스레 앉히고, 자신도 연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흐느적거리던 걸화는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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