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복건으로!】
걸화는 개방을 벗어나 성도 방향으로 향했다.
혼자 걷는 길이 조금 쓸쓸했다.
그녀는 곧장 성도로 가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미리 알아두었던 오봉산을 찾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봉산은 개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으로 형세가 가파르고 사나웠다.
산 옆에 사천으로 가는 길이 있을 뿐, 산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없고 꽃놀이하기에도 험했다.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오가는 것이 고작인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산이었다.
걸화는 산으로 묵묵하게 걸음을 옮겼다.
거친 산길을 성큼성큼 오르는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걸화가 오봉산을 타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 없는 동굴을 찾기 위해서였다.
개방지존도 그렇고 결화가 본 서책의 영웅들은 모두 인적 없는 깊은 산속 동굴에서 영단의 기운을 흡수했기에 걸화도 똑같이 하려는 것이다.
영단을 훔치기 전, 방에 있는 서책을 몽땅 끄집어내서 영단을 섭취하는 장면이 나오는 부분을 찾아 여러 번 읽었다.
걸화는 머릿속으로 서책의 내용을 되뇌었다.
연천의 도움으로 내공 운공을 시작했다.
개방에 온 이후로 쉬지 않고 조화신공을 운공하고 있었기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할 수 없어도 해내야 했다.
영단의 기운을 받아들여 영친왕에게 복수해야 했으니…….
쉬지 않고 산을 오르던 걸화는 자그마한 동굴을 발견하곤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대단한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바랑을 뒤져 영단이 든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걸화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청명하고 상쾌한 향이 흘렀다.
엄지와 검지로 영단을 집어 천천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영단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며, 깨끗하고 선명한 기운을 남겼다.
걸화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어렸다.
걸화는 가부좌를 틀고 조화신공을 운공하기 시작했다.
연천이 가르쳐준 대로 그의 맑은 기운을 생각하며 단전의 내공을 운기 했다.
대자연의 기운이 밀려 들어와 걸화의 내공과 합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 느끼는 기운의 양과 강력함이 달랐다.
걸화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엄청난 기세의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그녀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책에서만 보던 주화입마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었다.
걸화는 단전에 힘을 주고 들어오는 기운을 흡수하며 강하게 운기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잠시도 틈을 주지 않고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온몸으로 돌렸다.
해가 지기 전부터 시작한 내공 운공은 해가 지고,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걸화의 주변만 유난히 햇살이 가득 비치는 것처럼 따뜻하고 영롱한 기운이 어리었다.
걸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흘렀다.
걸화가 몸을 뒤로 해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이고… 힘들어! 배고파……. 에고 죽겠다. 에구구구… 진짜 죽을 뻔했어… 아고고고…….”
걸화가 먹은 영단은 신의가 걸부를 진맥해서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아무나 먹는다고 강력한 내공이나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걸부의 몸 상태와 상황에 맞추어 만든 것이었다.
준비가 되어 있는 걸부가 먹었다면 반갑자에 가까운 내공 증진과 벌모세수에 버금가게 내공이 정순해졌을 터였다.
하지만, 걸화는 그 강고한 영단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조화신공으로 인해 그저 주화입마를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행이었다.
걸화는 영단 덕분에 4, 5년을 꾸준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얻었다.
걸화가 감수한 위험과 노력에 비하면 턱도 없이 부족한 성과였고, 영단을 만드느라 애쓴 신의의 고생에 비하면 눈물 날 정도로 미미한 결실이었다.
오랜 시간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모아 만든 귀한 영단의 기운 대부분이 걸화의 몸을 거쳐,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과 시간이 담긴 귀한 배설물로 말이다.
잠시 후, 동굴 안에서는 꿩고기를 굽는 구수한 향이 진동했다.
부른 배 툭툭 치며 동굴 밖으로 나오는 걸화의 입은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산을 내려온 걸화는 말을 구입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성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택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밤이 되면 객잔에서 잠시 눈을 붙이거나 야숙을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또 말을 탔다.
성도에서 연천이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아,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좋았다.
영친왕의 성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연천에게 한 발짝씩 가까워지는 것 같은 벅찬 설렘이었다.
‘형님! 내 꼭 영친왕의 목을 베어 형님 복수를 하겠어요.’
걸화는 박차를 가해 말을 달렸다.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상쾌했다.
* * *
사천 성도에 도착한 걸화는 말을 팔아 치우고, 곧장 영친왕의 성으로 향했다.
성의 규모는 웬만한 도시보다 넓었다.
걸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 높고 단단한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하루 종일 담을 따라 걸어도 들어갈 길이 없었다.
걸화가 맨몸으로 넘어가기에 담은 너무 높았다.
담 중간중간에 몇 개의 문이 있었지만, 무섭게 생긴 무사들이 단단히 지키고 서 있었다.
하루 종일 걷던 걸화는 해가 지고 한참을 더 걷다, 객잔을 잡아 쉬었다.
개방에서 성도로 오는 길보다, 영친왕의 성을 통과하는 길이 더 힘들듯 싶었다.
다음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 주위를 걸었다.
견고한 담은 걸화가 들어갈 작은 틈조차 없었다.
걸화는 그날도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난 뒤, 터덜터덜 걸어 객잔으로 들었다.
사흘째 되는 날 새벽, 걸화는 문 하나에 길게 늘어선 수레를 발견했다.
열흘에 한 번씩 들어가는 식재료를 담은 수레였다.
담을 따라 늘어선 수레의 줄이 어찌나 긴지 끝에 있는 것은 성문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수레를 끄는 이들은 길가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걸화는 줄 제일 끝에 선 수레에 재빨리 숨어들었다.
푸성귀가 잔뜩 담긴 수레에 탄 걸화는 흙이 묻은 야채들 틈에 몸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영친왕의 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성의 위사들은 수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검사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성 밖에서 안으로 허락되지 않은 작은 물건 하나도 들이기 어려운데, 무려 사람이 탔다.
영친왕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걸화의 턱도 없는 시도였다.
‘아잇… 왜 이렇게 안가?’
수레바퀴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수레에 든 것을 하나씩 확인하는 작업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야채들 틈에 끼어 몸을 웅크리고 있는, 긴장되고 지난한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 아아! 아……!”
누군가 걸화의 머리 위에 놓인 당근과 양파를 밀어내고 귓불을 세게 잡아당겼다.
‘아직 영친왕의 성문 근처에 가지 못했을 텐데…….’
귓불을 잡은 거친 손길에 저절로 몸이 일으켜졌다.
걸화의 몸이 야채와 채소의 무덤을 뚫고 일어나, 그대로 수레 밖으로 끌려나갔다.
“아야! 아! 아아! 쫌! 아! 살살….”
수레 밖으로 빠져나온 후에도 손의 주인은 걸화의 귓불을 놓지 않았다.
“아! 야! 야! 놔! 아야!!”
걸화는 끌려가면서 소리만 질러댔다.
한참을 끌고 가던 걸윤이 뿌리치듯 손을 놓았다.
“아야… 여긴 왜 왔어! 아구 아파라!!”
걸화가 신경질적으로 귀를 문질렀다.
“아파? 겨우 그걸로 아프다면서 목숨 걸고 복수를 하겠다고?”
화를 참는 걸윤의 목소리는 낮았다.
잠 한숨 자지 않고 말을 갈아타고 달려온, 걸윤은 걸화보다 사흘이나 일찍 성도에 도착했다.
인근 개방 분타의 거지들을 풀어 영친왕의 성 주변을 지키게 했다.
분타주는 성내에서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서문과 남문 사이에 있는 성문, 바로 이곳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문은 성에 필요한 식자재와 진상품이 들어가고, 성에서 죽은 사람이나 쓰레기를 내는 문으로 개중에 보안이 허술한 곳이라고 했다.
걸윤이 이 문을 지킨 지 닷새 만에 걸화를 발견했다.
걸화가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할까 봐, 어찌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직도 긴장된 입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그건 그거고!! 내가 써 놓은 서찰 못 봤어? 나 말리지 마!”
걸윤의 마음도 모른 채 짜증을 내고는, 몸을 획 돌려 수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수레의 움직임은 더뎠다.
걸화가 탔던 수레는 아직도 영친왕의 성문에서 보이지도 않는 끝에 세워져 있었다.
지금이라면 다시 올라탈 수 있었다.
“그자가 살아있을 수도 있어.”
걸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며칠을 잠도 못 자고 말을 달리고, 마음을 졸이며 성문을 지켰다.
걸화의 얼굴을 보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긴장한 탓에 아직도 뒷목이 뻣뻣했다.
걸윤은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뭐? 거짓말!!”
걸화가 몸을 돌려 걸윤을 쳐다보았다.
“…….”
걸윤도 말없이 걸화를 쳐다보았다.
그의 삐딱한 표정은 딱 이랬다.
‘네 맘대로 해라!’
걸화는 수레와 걸윤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생각하다 걸윤에게 뛰어왔다.
“에잇…….”
양손으로 걸윤의 팔을 잡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정말이야? 거짓말이지?”
걸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흐음…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성도를 벗어난 마차 하나가 복건 무이산 인근에서 사라졌어.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어? 만에 하나라도 그자가 살아있다면 너의 복수와 죽음이 헛될 텐데.”
당시 개방은 영친왕의 성 주변과 성도를 벗어나는 사람 하나, 하나까지 확인을 했었다.
누가 성도 어디서 무슨 일을 보고 어디로 가는지 말이다.
급하게 구입한 마차 하나가 성도를 벗어나 쉬지도 않고 달리더니 복건으로 들이가 무이산 아래의 마을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차라는 것이 한번 쓰고 갖다버리는 그런 물건은 아니지 않은가.
크기도 크고 한번 구입하면 한동안은 계속 사용하는 것인데, 멀쩡하던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뭔가 뒤가 구린 일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별의별 일이 벌어지는 무림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게 연천과 상관있는 일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미 참수된 머리까지 걸린 마당에 더 알아볼 게 뭐가 있겠는가?
그자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상관없는 정보라도 들이대서 전국 곳곳에 있지도 않은 그자를 찾아다니더라도, 걸화가 영친왕의 성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정말이야?”
걸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걸윤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말던지….”
걸윤이 귀찮다는 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걸화에게는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잘 먹힌다는 것을 걸윤은 알고 있었다.
“맘대로 해라.”
걸윤이 몸을 돌려, 걸화의 반대쪽으로 걸었다.
“알았어! 믿어, 믿어.”
걸화가 다급하게 걸윤의 팔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