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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4화 (84/230)

84화

아버지.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형님의 복수를 하러 가겠습니다.

혹시 제가 죽더라도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하늘에서 형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 겁니다.

걸윤아.

더 이상 바보처럼 살지 마.

나를 기절시킨 것이 네가 아니라 형님인 걸 나도 알아.

내가 하늘에서 형님을 만나면 한껏 혼을 내줄 거야.

걸부 형.

영단을 빼앗아서 미안해.

그거라도 먹어야 영친왕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목숨을 걸고 하는 복수인데 성공해야 하지 않겠어?

나를 이해해 줘.

이 빚은 죽어서라도 꼭 갚을게.

미안해.

아버지, 걸부 형, 걸윤아. 그동안 고마웠어.

―걸화가

신 으ㅣ님, 정ㅁᅟᅡᆯ 조ㅣ송합ㄴㅣㄷㅏ.

한 장의 서찰에 세 사람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급하게 신의에게 쓴 한 줄의 사과글이 휘갈겨 쓰여있었다.

“이, 이를 어찌…….”

서찰을 든 천상의 손이 떨렸다.

굳은 것처럼 꼼짝하지 않던 걸윤이 눈을 다급하게 깜빡였다.

“개방을 나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걸윤이 일어섰다.

“그래, 네가 말을 타고 가면 걸화보다 빨리 도착할 게다.”

천상이 넋을 놓은 얼굴로 말했다.

“순순히 개방으로 따라오려고 할까요?”

걸부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다리 몽둥이를 부러트리건, 오라로 꽁꽁 묶건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오겠습니다.”

걸윤이 과단하게 말했다.

눈앞에 걸화가 있으면, 당장 잡아서 끌고 올 기세였다.

“일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영친왕의 성에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걸부가 말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걸윤아, 고맙다. 걸화를 잘 부탁한다.”

걸부가 나서려는 걸윤에게 말했다.

“형님도 고생하시오, 아버지와 개방을 잘 부탁하오.

걸윤은 이렇게 말하고 급히 채비하고는 상태가 좋은 말에 훌쩍 뛰어올라서 서둘러 개방을 벗어났다.

신의는 무림 아니, 중원 모두의 의원이었다.

정파건 사파건 황궁이건 어디서든 환영받는 사람이었고, 전쟁 아니라 더한 것을 치르더라도 신의는 중립이었다.

절대 신의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신의에게 해를 끼쳐도 안 되었다.

신의에게 은혜를 입은 수많은 문파와 백성, 그리고 황궁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신의를 건드려선 안 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오늘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개방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몰랐다.

까딱하다가는 무림 전체가 적이 될 수도 있었다.

걸화가 저지른 일의 파장이 얼마나 크게 돌아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사파와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타 문파에서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개방이라는 커다란 방파가 무림의 온갖 추문을 취급하고, 추잡한 일을 처리하는데도 빠르게 판단하여 지시하던 천상이었다.

양쪽의 두 아들까지 가세해서 승승장구하기만 하던 개방이 걸화 한사람 때문에 이런 위기를 맞게 될 줄이야.

개방 총타는 갑작스레 전쟁이라도 난 것 같았다.

천상과 걸부, 염문강은 걸화가 기거하는 안채로 향하면서 급하게 장로 회의를 소집했다.

일단 신의를 달래야 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을 내어주어서라도 그의 마음을 풀어야 했다.

걸화가 신의를 데려올 때 사용했던 비상문을 그대로 둘지, 그곳을 막고 다른 곳에 새로운 문을 만들지도 문제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개방도들을 불러 입단속을 시켜야 했다.

개방 방주의 여식이 개방에 들른 신의의 머리를 깼다는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끝장이었다.

천상은 서둘러 안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채에 들어선 천상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걸부도, 심지어 그 말 잘하는 염문강조차 입을 다물었다.

내당 바닥에는 잘 손질된 약재와 이름 모를 나무뿌리, 작은 환들이 굴러다녔다.

금이 가고 깨진 도자기 사이로 색이 다른 액체들이 흘러 기묘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진 보라색 비단보자기가 바닥 한편에 나뒹굴었다.

신의의 시종으로 보이는 사내는 탁자에 엎드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끝까지 잠을 자지 않으려 버틴 것인지, 원래 습관인지 눈을 절반쯤 뜬 모습이 괴기스러웠다.

신의는 어수선한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의 뒤통수에 꾸덕꾸덕한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허……!”

신의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옆, 바닥에는 피 묻은 짱돌이 놓여있었다.

“허!”

신의는 같은 자세로 멍하니 있다, 다시 실소했다.

“허! 허!”

신의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주저앉은 채로 실실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천상은 그런 신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겁이 났다.

개방 방주의 여식이 신의의 뒤통수를 짱돌로 내리쳐, 신의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어우…….’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천상이 조심스럽게 신의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신의! 그만 일어나시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허!”

천상을 보던 신의는 답 없이 실소했다.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천상이 눈짓했다.

걸부와 염문강이 달려들어 신의를 탁자의 의자에 앉혔다.

눈을 절반쯤 뜬 채, 의식을 잃은 교준이 엎어져 있는 그 탁자였다.

“거… 참!”

신의는 자신이 자리를 달리하여 앉은 것조차 인식을 못 하는 눈치였다.

“신의! 괜찮은가? 상처를 돌보아야 하지 않겠나?”

천상이 다시 말을 붙였다.

신의가 천상을 슬쩍 쳐다보았다.

“허허허허허, 거… 참!”

갑자기 신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신의가 실성한 것 같았다.

천상의 큰 몸체에 소름이 돋아났다.

“흐음…….”

천상이 신의 앞의 의자에 앉아, 길고 깊은 침음을 흘리며 그를 살폈다.

암만 봐도 정신이 빠진 사람 같았다.

“신의께 냉수라도 갖다 드려라.”

천상의 명령에 누군가 빠르게 움직였다.

항상 단정하고 여유 넘치던 신의는, 산발한 머리로 냉수를 줄줄 흘리며 들이켰다.

천상은 그런 신의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냉수 한 사발을 다 들이킨 신의는 커다란 사발을 쾅 소리가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 소저가 자네 여식은 맞는 겐가?”

드디어 입을 연, 신의의 첫마디였다.

천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가 실성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시름 하나를 덜었다.

“맞네. 내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천상은 우선 사과부터 했다.

“배걸화라고 했던가?”

“맞네.”

“걸화는 어디 있나?”

“흐음… 나도 모르네. 둘째가 찾으러 갔으니, 데려오지 않겠나… 정말 미안하네, 자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 보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들어주겠네.”

천상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영단이야 개방에 줄 것이었으니 누가 가져가든 상관이 없네만, 내 머리가 깨진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나?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개방에 와서 머리가 깨졌다고 하면 농이라고 할 것이야, 내가 직접 당했는데도 믿어 지지가 않구먼.”

정신을 차린 신의가 제법 매섭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겠네.”

“그것은… 자네 여식이 오면 직접 받겠네.”

신의가 딱 잘라 말했다.

“무엇을 원하기에 그 아이에게 직접 받겠다는 겐가? 내게 말을 하시게,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 아이가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가 없어.”

“그럼 기다리겠네.”

신의가 단호하게 말했다.

“허어…….”

천상이 불안한 얼굴로 신의를 쳐다보았다.

천상의 얼굴이 어두운 빛으로 굳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를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넓은 중원의 오랜 역사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사건이었기에.

그러니 천상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다.

신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보통의 사람이라면… 돈? 명예? 여인?

모두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걸화에게 직접 받겠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더 걱정스러웠다.

그가 뭘 바라는지 모르지만, 천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신의가 마음만 먹는다면, 개방이라는 방파는 중원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걸화는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여식이지만, 그에게 의탁하고 있는 수만의 개방도들 또한 자식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 또한 천상이 지켜야 했다.

“싫은 겐가?”

신의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신의가 묵는데 싫어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받아가겠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신경 쓰여 그런 게지…….”

천상이 말을 얼버무렸다.

그의 불편한 속내를 신의에게 보여 좋을 게 없었다.

최대한 좋은 낯으로 신의를 달래야 했다.

“그건 자네 여식에게 직접 말하겠네, 내 쉴 곳이나 마련해 주시게.”

신의가 옷을 툴툴 털며 일어섰다.

꾸덕꾸덕하게 말라붙은 피딱지가 신의의 뒤통수에 붙어 있었다.

천상은 치료를 먼저 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삼켰다.

명색이 신의인데 자신의 상처는 알아서 치료하겠지.

천상은 지금 그것보다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절대! 신의에 대한 소심한 복수의 마음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교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으흠…….”

천상은 신의를 따라 일어섰다.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신의가 묵는다고만 하면 달려 나와 그를 맞이할 곳은 지천에 깔렸다.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신의에게 진맥 한번 받겠다고, 환자를 이끌고 신의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며칠 밤낮을 기다리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그런 신의가 기약 없이 머물겠다니 기뻐서 날뛰어도 모자라 것만, 머리통 깬 값을 걸화에게 받겠다고 하니 마음이 불편한 천상이었다.

“허!”

신의는 천상을 따라가면서도 기가 찼다.

수면제가 들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누구인가?

신과 같은 의술을 가졌다 하여 신의라는 별호를 얻지 않았는가?

중원에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는 의원은 신의 말고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중 으뜸이 신의라는데 이의가 없었다.

약재를 감별해 내는 감각 또한 범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예리했다.

그런 신의가 수면제를 눈치채지 못한 차였다.

‘독을 넣었다 해도 몰랐을 게야…….’

평범한 약재를 섞은 것에 불과한데, 향을 맡고 맛을 보았는데도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신의에게 충격이었다.

“허!”

신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천상은 계속 ‘허!’ ‘허!’거리는 신의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정신이 나간 게 더 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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