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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3화 (83/230)

83화

걸화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거 한 입만 마셔도 한 시진 동안은 업어 가도 모른다고 했는데 왜 이리 꼼짝을 안 하는 거야? 아… 시간 없는데…….’

신의와 교준이 마신 차에 걸화가 수면제를 섞었던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빨리 잠들지 않는 두 사람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은 한 입만 마셔도 기절한다는 복령보심탕을 두 잔이나 받아마신 교준이 머리를 흔들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를 덮쳐오는 수마의 힘은 강력했기에, 두 눈을 부릅뜬 교준의 눈동자는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신의는 작은 잔에 담긴 어두운색의 액체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냄새를 맡고, 조금씩 입에 넣어 오래도록 입 안에 머금으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가리기 위해 향이 강한 약재들을 사용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런데 왜?

방주의 여식이 개방에서 신의에게 뭘 숨겨서 먹인단 말인가?

그럼 이것이 정말 저 소저가 만든 피로 회복을 위한 차라는 것인가?

향이 오묘하다.

대부분은 알겠으나, 몇 가지 재료는 신의도 헷갈렸다.

재료의 조합과 계량이 절묘했다.

서로가, 서로의 향을 뒤덮어 재료 본연의 맛을 흐리며 새로운 향과 맛을 냈다.

잔뜩 집중한 신의의 미간이 좁아졌다.

교준은 고개를 꾸벅이며 졸다가, 화들짝 놀라 실눈을 떴다가 다시 꾸벅거렸다.

걸화는 멀쩡한 낯으로 자신이 만든 차를 노려보는 신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신의는 약재에 대해 뛰어난 미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차에다 수면제를 탔다면 신의가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마음이 놓이지 않은 걸화가 약재상에서 향이 강하고 독한 차와 약재를 잔뜩 구입해 달여 넣은 것이었다.

황소도 한 모금만 마시면 한 시진은 일어나지 못한다는 복령보심탕을 먹고도 신의는 멀쩡했다.

‘같이 넣은 약재가 잠을 깨우는 것이었나?’

걸화가 초조하게 신의를 쳐다보았다.

걸화가 아무리 기다려도 신의에게 수면제의 효과는 없었다.

신의는 평생을 세상 모든 약재를 직접 캐어 손질하고, 더 나은 약효를 위해 이 방법 저 방법으로 달이고 찌고 맛보며 살았다.

어느 순간부터 약재에 대한 내성이 생겨 어지간한 약재도, 웬만한 독도 침범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을 모르고 신의가 잠이 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걸화는 초조했다.

언제 아버지나 오라비들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그들이 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애간장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신의를 잠재우기로 했다.

수마에 굴복하지 않으려 부릅뜬 교준의 눈 속에 아름다운 걸화가 짱돌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교준은 생각했다.

‘내가 과하게 피로하여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좀 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풀자, 곧장 편안한 휴식이 밀려왔다.

곧이어 걸화가 짱돌로 신의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짱돌을 바닥에 집어 던진 걸화는 교준이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잠든 것을 확인하고, 교준의 등에 멘 약재 가방을 벗겼다.

나무로 짠 가방을 열자, 수십 개의 작은 칸으로 나누어진 가방에 알 수 없는 약재와 풀뿌리, 환약과 고약, 작은 단지와 호리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뭐가 이렇게나 많아? 뭐가 영단이야?”

걸화가 급하게 가방을 뒤져댔다.

좁은 가방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약재와 환들이 뒤죽박죽 섞여 가방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급하게 약재 가방을 뒤지던 손이 멈추었다.

“이, 이거다.”

걸화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에 진한 보랏빛 보자기에 싸인 물건이 들려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곤, 급하게 비단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튼튼한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걸화가 긴장한 얼굴로 나무 상자를 열었다.

새끼손톱만 한 작은 환단이 하얀 종이 싸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아…….”

작은 환에서 맑고 깨끗한 기운이 품어져 나왔다.

깊은 숲속에 들어온 것 같은 청량한 향이 방 안을 채웠다.

“흐음…….”

살며시 영단의 향을 맡았다.

“이게 맞구나.”

경이로운 눈으로 환단을 내려다보았다.

“우와…….”

맑고 청명한 향기를 풍기는 작은 환의 효능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향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영묘하고 신비했다.

“하아…….”

공기 중으로 떠도는 향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몸이 한층 맑아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연천의 내공을 받아들였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미리 써놨던 서찰을 꺼내, 급하게 뭐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고운 자수가 놓인 유군을 벗고, 준비해 놓은 경장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대충 묶고, 숨겨놓았던 봇짐을 메고 서둘러 개방을 빠져나왔다.

* * *

“신의께서 늦으시구나.”

천상이 말했다.

“신의께서는 늘 늦으시는 분 아닙니까? 오늘 안에만 오셔도 빨리 오시 것일 겝니다.”

걸부가 성질 급한 천상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걸부의 말이 맞았다.

신의에게 약속 시간이라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약속한 날보다 며칠씩, 심하게는 몇 달씩 늦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더 급한 환자들을 돌보느라 약속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잊지 않고 약속한 날쯤에 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누가 마중이라도 나가 보거라.”

천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수하들을 보냈다.

“방주님, 마음이 급하십니다.”

걸부가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린 것이니, 좀 급해도 되지 않겠느냐?”

천상은 오늘 기분이 꽤나 좋았다.

중원 최고의 의원이라는 신의가 걸부를 진맥해, 그의 몸에 딱 맞게 만든 영단이었다.

모르긴 해도, 영단을 섭취만 하면 걸부의 무공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게 발전할 것이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성과가 기대되기도 했지만, 능력 있는 후계자를 두어 개방을 더 탄탄하게 이을 수 있으리라.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조용히 앉아있던 걸윤이 일어섰다.

“아니다, 그러다 길이 엇갈리면 어찌하느냐? 너는 여기 있어라. 신의가 오시면 너도 인사를 드려야지.”

천상이 나가려는 걸윤을 말렸다.

“걸화는 나오지 않으려나 봅니다.”

걸부가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미리 말을 했는데도…….”

걸윤이 어두운 낯으로 말을 흐렸다.

“네 잘못이 아니다, 자기 연무장에서 무공을 연마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거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걸부가 걸윤에게 말했다.

벌써 수도 없이 한 말이었다.

연천을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은 걸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그리 말해도, 걸윤은 죄책감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압니다.”

걸윤이 짧게 답했다.

때로는 알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벌컥―!!

천상의 집무실 문이 다급히 열리며, 수하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방주님! 큰일 났습니다. 신의께서!!”

“무슨 일이냐? 신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단 말이냐?”

천상이 수하의 말을 똑 자르고 물었다.

“신의께서… 아가씨의 내당에…….”

수하는 이번에도 천상 때문에 말을 마치지 못했다.

“무어??”

천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니, 신의가 그 아이의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천상이 불쾌한 얼굴로 크게 소리 질렀다.

아무리 신의라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다 큰 딸아이의 거처에 든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천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는 신의가,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여식의 방에서 무얼 한다는 말인가?

“내 이 영감을 요절을 낼 테다.”

성질 급한 천상이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천상의 눈치를 보던 수하가 하지 못한 나머지 말을 뱉었다.

“…머리가 깨져 쓰러져 계십니다.”

말을 하는 수하는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면구한 얼굴이었다.

천상이 수하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

‘나이가 드니 헛소리가 들리나 보다, 어서 걸부에게 자리를 물려줘야지 원… 이래서야…….’

“신의의 머리가 왜 깨져? 걸화의 방에는 왜 있고?”

질문한 것은 비교적 침착한 걸부였다.

“아마도… 아가씨께서 영단을 훔쳐 달아나신 것 같습니다.”

수하가 천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마쳤다.

“뭐……!”

천상이 허공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걸화라면 그 아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뒷골이 당기며, 머리통 전체가 멍하게 울렸다.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차근차근 말해 보게!”

늘 침착하던 걸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가씨께서 개방 아래에서 신의를 모시고 안채로 통하는 비상문으로 내당에 들었다고 합니다. 잠시 뒤에, 남장을 하고 개방 밖으로 나가셨다고 하니 아무래도…….”

보고하는 거지가 말끝을 흐렸다.

상황이 하도 말도 안 되는지라, 보고하는 것 자체가 황망했다.

“그렇다고 해도 걸화가 어찌 영단을 훔쳤다고 할 수 있습니까?”

걸윤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사고뭉치 걸화이긴 하지만,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아이였다.

거기다 최근 이 년간은 조용히 수련만 하며 지냈다.

갑자기, 영단을 훔쳤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걸윤과 다르게 걸부와 걸화는 유난히 사이가 좋았다.

걸화가 걸부에게 해가 되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신의의 약재 가방이 흩어져 있고, 이것이 아가씨 방에 있었습니다.”

상황 보고를 하는 거지가 이미 봉투를 열어 확인한 서찰을 내밀었다.

걸윤이 서찰을 받아 급히 읽어 내렸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방주인 천상이 먼저 읽도록 했을 테지만, 지금 걸윤은 마음이 다급해서 아버지와 형님인 걸부를 생각지 못했다.

서찰을 끝까지 읽어 내린 걸윤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걸윤아!”

걸부가 걸윤의 손에 들린 서찰을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서찰을 다 읽은 걸부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이 굳었다.

넋을 놓은 두 아들을 본 천상이 뒷목을 잡고 일어났다.

걸부의 손에 있는 서찰을 들어 읽었다.

“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 부자는 아무도 움직이지도, 어떤 말을 하지도 못했다.

“흐음…….”

상황을 보고하던 거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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