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라니깐】
아침에 오기로 했던 신의는 정오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에휴…….’
걸화는 바위에 엉덩이를 붙인 채로 대로를 향해 목을 쭉 빼고 기다렸다.
‘응?’
눈을 가늘게 뜨고 대로를 끝자락을 쏘아보았다.
저 멀리, 대로 끝에 두 사람의 윤곽이 나타났다.
작게 보이는 형태가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아도 쬐끄만 두 개의 윤곽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아우! 답답해… 답답해…….”
걸화는 구시렁대면서, 일어서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음… 음…….”
느릿느릿 움직이던 두 사람의 모습이 제법 가까이 다가왔다.
앞장선 사람이 신의인 듯싶었다.
나이 지긋한 장년인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별다를 것 없는 대로 양쪽의 풍광을 천천히 즐기며 걸었다.
걸음걸이가 느긋했다.
“아이구…….”
답답한 걸화는 달려가서 꾸물거리는 신의를 끌고 오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신의 뒤에는 걸화 또래의 청년이 나무로 만든 커다란 약재 가방을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신의만큼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낭창낭창 걸었다.
쳐다보고 있는 걸화는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아… 굼떠! 굼떠! 후딱후딱 좀 오지…….’
조바심을 참고 있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걸화는 자신의 속에 없는 인내심을 짜내고 짜내며 신의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신의의 가벼운 한 걸음 한 걸음은 느릿했다.
걸화의 애를 바짝바짝 태우던 신의가 드디어 걸화 앞에 이르렀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걸화가 입을 다물고, 예쁘고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신의에게 인사를 했다.
“소녀 배걸화가 신의께 인사드립니다. 아버님의 명으로 신의를 마중하러 나왔사옵니다.”
반짝이는 붉은 입술로 미소 짓는 걸화에게 신의 뒤에 있던 청년, 교준의 얼굴과 몸이 돌아갔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교준은 사악한 술법에 걸린 것처럼 정신을 빼놓고 걸화를 바라보았다.
“오호… 아버님이라면 방주님을 말씀하는 게요?”
“네, 그러하옵니다.”
걸화가 살짝 무릎을 굽혀 답했다.
크고 둥근 눈에 웃음이 담기며 반달로 휘어졌다.
“개방의 방주께서 이리 여염한 따님을 두시었구먼… 허허허허…….”
신의가 느긋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웃는 것도 답답해, 뭘 저렇게 한참을 웃어 대냐…….’
걸화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였지만, 겉으로는 어여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힘이 드셨을 텐데 소녀를 따라오시어요. 소녀가 빠른 길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걸화가 앞장서며 말했다.
“고맙구려, 내 방주가 부럽구먼. 이리도 고운 여식을 두시었다니… 허허…….”
신의가 허허허 웃음을 터트리며 걸화를 따랐다.
교준은 머리를 흔들어 얼굴을 묵직하게 바꾸고 걸화와 신의를 뒤따랐다.
걸화는 개방의 정문이 나 있는 외길이 아닌, 대로로 걸음을 옮겼다.
신의는 걸화가 자신을 어디로 이끌든지 말든지 부채질을 해대며 낭창하게 그 뒤를 따랐다.
대로로 나선 걸화는 대로 옆의 길도 없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가니, 숲이 우거진 좁은 길 앞에 거지 몇이 죽치고 앉아 있었다.
“에에? 아가씨? 아가씨가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거지들이 걸화를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걸화가 이곳에 올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걸화 뿐만 아니라 개방도… 아니, 누구도 오지 않는…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곳은 걸화가 기거하는 안채의 비밀 문으로 통하는 길의 초입이었다.
“아버님의 명으로 신의를 모시는 길입니다. 길을 터 주십시오.”
걸화가 미소를 보이며 단정하게 말했다.
“아…….”
세 명의 거지가 눈을 끔뻑였다.
보고를 받은 바는 없지만, 방주의 딸이 신의를 모시고 간다고 하지 않는가?
길을 내어주는 게 마땅했다.
거지들은 걸화와 신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길을 비켰다.
걸화는 신의와 교준을 이끌고 험한 숲으로 들어섰다.
걸화의 치맛단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풀에 긁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의는 필요도 없는 부채를 끊임없이 흔들어댔고, 교준은 표정 없이 걸었다.
걸화와 신의 일행에게 길을 내어준 거지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지나간 사람이 아가씨가 맞지?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는데.”
“어렸을 때, 유모가 살아계실 때는 저러고 다녔어. 그 얼굴이 그대로구먼… 성질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외모야 어디에도 빠지는 인물이 아니지.”
다른 거지가 그 말에 맞장구쳤다.
“내가 십 년 넘게 중원을 돌아다니며 무림삼화도 보았지만, 아가씨만큼 외모가 출중한 미인은 못 보았어.”
“짱돌 던지며 뛰어다니던 건 옛말이구먼 그래, 사람이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니깐.”
“짱돌…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조만간 시집을 가긴 가겠구먼, 방주님이 그리 명문가에 시집을 보내겠다고 하시더니 저리 곱게 컸으니 명문가 사내들이 보면 서로 데려가겠다고 싸우겠는데, 크크크.”
“흐허허허, 방주님이 아주 든든하시겠어.”
거지들이 걸화가 지나간 길을 보며 쑥덕거렸다.
걸화는 나무와 덩굴이 넓게 우거진 험한 숲길로 향했다.
그곳에서 좁은 산길을 타고 올라가, 작은 굴을 통해 걸화의 안채로 이어졌다.
걸화는 덩굴과 나뭇잎 더미를 헤치며 앞장서서 걸었다.
“개방을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입구가 많이 변했소.”
신의가 위협적으로 뻗어있는 나뭇가지를 피하고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네, 개방은 점차 변화하고 있지요. 아버님이 많이 힘쓰고 계십니다.”
걸화가 대충 대꾸하곤 걸음을 서둘렀다.
약속 개념이 없는 신의 때문에 일이 늦어지고 있었다.
“거… 소저… 천천히 좀 가시구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오? 허허허허…….”
신의가 또 허허거리며 웃었다
‘네, 쫓아와요!’
“신의께서 먼 길 오시느라 곤하실까 봐 소녀의 마음이 급하여서 그만…….”
걸화는 속마음과 다르게 말하고,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여 작게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묵직하게 바꾸었던 교준의 얼굴에서 턱이 천천히 벌어졌다.
걸화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신의가 웃으며… 급하게 걸화를 쫓았다.
교준은 입을 벌린 채, 그들 뒤를 따랐다.
신의가 사람의 인적 없는 굴을 두리번거렸다.
신의는 환자가 있고, 인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게 꼭 고관대작의 집만은 아니었으니 산속, 동굴, 움막, 강가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다.
그간 개방의 형편이 어찌 변한 건지, 알 길이 없기에 험한 길을 불평 없이 방주의 여식을 따랐다.
“후!”
이윽고 안채에 달린 비상문을 열고 자신이 기거하는 내당에 도착한 걸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한시름 놓았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안채를 확인하는 것은 가장 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깐, 신의가 갑자기 사라진다든지…….
좀 더 정확하게… 납치를 당했다고 표현해야 맞으려나?
걸화가 신의와 교준을 내당에 마련해 놓은 탁자로 안내했다.
“예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차 한 잔 드시어요.”
고운 목소리로 말하는 걸화의 손에는 자그마하고 예쁜 주전자가 들려있었다.
제법 그럴듯한 자세로 차를 따랐다.
반달로 접은 눈에 산뜻한 미소를 짓는 걸화의 치맛단은 너덜너덜했다.
영롱한 옥빛의 잔에 어두운 감색의 차가 담겼다.
색이 탁하고, 향이 진한 그것은 차라기보다 탕약 같은 느낌이었다.
신의가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여유로운 미소로 가득했던 신의의 얼굴이 진지하게 변했다.
‘천궁… 침향… 백지… 그리고 이것은… 이것은… 목향이던가……?’
‘하나같이 향이 강한 약재들이구먼.’
신의의 미간이 좁아지며, 깊게 생각에 잠겼다.
신의가 왜 신의라 불리겠는가?
저승길 초입에 들어선 자도 이승으로 끌고 와, 살려낸다는 신의였다.
천하에 신의가 모르는 약재는 없었다.
찌든 다지든, 가루를 내든 어떻게 형태를 바꾸어 놓아도, 어떤 강한 약재와 섞어 놓아도 그 안에 들어간 약재의 이름과 효능을 줄줄이 읊어낼 수 있었다.
한데 이 요상한 향기를 뿜어내는 차에 들어간 뭔가가 더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신의가 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이내, 진저리를 치며 꿀꺽 삼켰다.
“으음… 맛이… 뭐랄까… 굉장히 독특하구먼.”
신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눈을 반쯤 감고 차향에 집중했다.
‘이것이 연삼인가? 아니, 당귀인가? 어찌 이리 절묘하게 섞어 놓은 겐지…….’
깊은 생각에 잠겼던 신의가 걸화를 올려다보았다.
걸화는 신의와 교준 옆에 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무엇을 넣어 끓인 것인가?”
신의라 불리는 자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절묘하게 섞인 약재들의 조합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기가 어려워 걸화에게 물었다.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소녀가 직접 준비한 것입니다. 재료는 소녀만의 비법인지라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걸화가 새침하게 웃었다.
고운 반달의 눈으로 교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으로 말했다.
‘뭘 꾸물대! 어서 마시라고! 어서!’
재촉하는 걸화의 눈빛에 교준은 마지못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겼다.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진하고 불쾌한 맛이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씁쓸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소녀가 정성으로 직접 달인 것이옵니다. 어서들 드시어요.”
걸화가 예쁘게 말했다.
교준은 걸화와 시커먼 차를 번갈아 보다 눈을 딱 감고 찻잔을 비웠다.
신의는 한 모금 한 모금 신중하게 목으로 넘기며,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하아암…….”
교준이 길게 하품을 했다.
오늘 여러모로 긴장이 풀리는 교준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교준이 급하게 입을 막고 신의에게 말했다.
신의는 교준이 하품을 하건 사과를 하건, 조그만 잔 속에 든 검은 액체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교준의 말에 답을 한 것은 신의가 아닌 걸화였다.
“많이 피곤하시었나 봅니다. 아버님이 곧 나오실 겁니다. 그동안 차를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걸화가 주전자를 들고 예쁘게 말했다.
교준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걸화가 내미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액체를 더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