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명이 다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걸부가 걸화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말을 꺼냈다.
걸부는 천상에게 말을 했으나, 실상은 어두운 얼굴로 앉아있는 걸윤에게 말한 것이었다.
그자의 죽음이 걸윤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걸화와 함께 돌아온 후, 걸윤도 변했다.
얼굴에 걸려 있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사라졌다.
걸화 만큼이나 세상일에 관심이 많고, 뭘 해도 힘든 기색 없이 재미있어하던 걸윤은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진 것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것 같았다.
걸부는 이미 수만 번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쯧쯧…….”
천상이 앞뒤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날 이후,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걸화도 걸윤도 천상도 걸부도 백연천이라는 사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께 연락이 왔습니다. 영단이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닷새 뒤면 개방에 도착할 것이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걸부가 분위기를 바꾸어 말했다.
“드디어 영단이 완성되었단 말이냐?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제야 되었구나.”
어둡던 천상의 얼굴이 밝아졌다.
신의를 만나기가 어찌나 힘이 들던지 몇 번을 놓치고서 겨우 만나 부탁한 일이었다.
천상이 직접 찾아가서 신의에게 사정하고 설득해서 승낙을 받은 걸부의 영단.
그것이 완성되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데 어찌 좋지 않겠는가?
“…….”
걸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장난기 가득해서 불쾌하건, 재미있건, 즐겁건, 숨기지 못하고 감정을 담아내던 얼굴이 저리 변했다.
“섭섭한 게냐?”
천상이 조용한 목소리로 걸윤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걸윤이 부정했다.
“무인이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다. 그게 형이든 아버지이든… 다 이해한다. 신의께 부탁하여 다음에는 너를 위한 영단을 만들어 주마.”
천상이 부드럽게 말했다.
“…….”
걸윤이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두 해 전이었다면 걸부가 부러웠을 것이다.
형님이 먼저라고 생각하면서도 무공에 욕심이 많은 걸윤이기에 부러운 마음이 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것을 모조리 빼앗긴 사람처럼 아무런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은 걸화도 나와 신의께 인사드리라고 일러두어라.”
천상이 묵직하게 말했다.
신의는 무림에서 의술로 최고라 불리는 의원이었다.
사람의 앞일이라는 것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천상은 신의가 개방에 오는 길에 자식들을 다 소개 시킬 심산이었다.
위급한 어떤 순간에 신의가 자신의 자식들을 알아보게 될 일이 생기게 될지 누가 또 알겠는가.
“네, 방주님.”
걸윤이 답했다.
걸윤은 아주 오랜만에 걸화가 기거하고 있는 안채로 들었다.
그날 이후, 걸화는 안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걸윤은 안채로 들지 않았다.
걸화를 마주하기가 편치 않았다.
걸화를 보면 그가 떠올랐기에.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연천을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
연천이 혈영천마의 제자라고 했을 때, 앞섰던 걸화와 자신의 신상에 대한 걱정.
걸화와 연천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여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걸윤은 무거운 걸음으로 안채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서 걸화가 비도를 날리는 것이 보였다.
걸화는 개방 총타에서 흔히 입는 황토색 무복을 입고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걸화는 거지 복색을 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연무장에서 끊임없이 비도를 날려 무언가를 맞출 뿐이었다.
뭔가 더 나아진 것도 없었다.
전보다 사물을 맞추는 정확도가 늘기는 했지만, 새로운 방법이나 기술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은 구경도 못 했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연천과 함께했던 것처럼 그저 던져서 맞추는 것, 그것뿐이었다.
걸윤의 눈에는 걸화가 비도를 던지는 것이 무공을 수련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연천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흐음…….”
걸윤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채로 오는 내내 두려워했던 것이 걸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속이 쓰렸다.
걸윤은 자신을 뒤흔드는 감정을 숨기고 얼굴을 폈다.
“걸화야…….”
아무렇지 않은 척, 걸화를 부르며 연무장을 가로질러 걸화에게 다가갔다.
“…….”
걸화가 걸윤을 돌아보았다.
“…….”
걸윤은 걸화를 보며 웃으려고 애썼다.
얼굴만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던 장난스러운 웃음이 이제는 힘들었다.
“…어쩐 일이야?”
걸화가 물었다.
걸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혼자 연습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아? 오라비가 같이 도와줄까?”
걸윤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새로운 비도술을 배우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됐어, 혼자 있는 것이 편해.”
걸화가 말했다.
걸화는 화려한 비도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고, 비도술에 대단한 발전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혼자 던지고 맞추는 것이… 그것이 좋았다.
“으흠… 닷새 뒤에 신의께서 총타에 오신다. 걸부 형님의 영단이 완성되어 가져다주러 오신다는구나, 방주님께서 너도 나와서 신의께 인사를 드리라고 하셔.”
걸윤이 안채에 든 이유를 말했다.
“영단? 그… 먹으면 힘이 막 세어진다는 그 영단?”
걸화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힘이 막 세어지는 것은 아니고 내공을 늘여주는 것이야. 물론 무공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
걸윤이 뭔가 비어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공 발전에? 그럼 영단을 먹으면 빠른 시일 내에 무공을 막 잘하게 되고 그런 거야?”
걸화의 얼굴에 오랜만에 호기심이 어렸다.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걸윤이 적당히 답했다.
영단이라는 것이 먹는다고 갑자기 무공이 확 느는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내공을 증진시켜준다.
영단을 먹은 후 무공의 성과는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중원에서 의술로 으뜸으로 꼽히는 신의가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만든 것이니, 그 효과는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래?”
걸화의 얼굴이 아주 오랜만에 생기를 띠었다.
걸윤은 걸화가 항상 혼자만 지내다가, 자신을 봐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종종 걸화를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걸윤이 걸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뭘 웃어? 바보같이!”
말을 하던 걸화가 멈칫하더니,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다.
잠깐 사이 걸화의 눈이 젖어 든 것을 걸윤은 놓치지 않았다.
방금 걸화의 머릿속에 뭐가 스쳤는지 걸윤도 느꼈다.
상황 파악 못 하고 바보같이 웃던 그 사내 말이다.
“잊지 말고 나와, 그날은 복색도 좀 신경 쓰고. 그리고… 혹시 내가 필요하면 말해, 뭐든 도와줄게.”
걸윤이 서둘러 말을 끝냈다.
아직도 그자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화를 보는 걸윤의 마음이 불편했다.
애써 눌러놓았던 기분 나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알았어.”
걸윤은 걸화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등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 * *
개방 총타 거지들의 눈이 휙휙 돌아갔다.
개방의 거지들에게 중요시되는 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무공이었다.
개인 성향과 형편에 맞는 종류의 무공을 배우긴 하겠지만, 공통되고 가장 중시되는 것은 은잠술이었다.
일상에서 은잠술이 몸에 배도록 훈련했다.
은잠술이 일상인 개방 거지들은 눈에 띄는 행동은 자제했다.
몸을 급하게 돌리거나 한 사람을 유난히 빤히 쳐다보는 행동들 또한 억제해야 했다.
그런 거지들이 떼거리로 몸을 휙 돌려, 걸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은잠술을 가르치는 장로 유적이 보았다면 크게 경을 칠 노릇이었다.
거의 이 년 만에 안채 밖으로 나온 걸화의 모습에 거지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곱게 빗은 걸화의 머리카락에서는 반질반질 윤이 흘렀다.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얼굴에 커다랗고 맑은 눈은 별을 빼어다 박은 것처럼 반짝였다.
동글하고 도독한 콧방울에 연지를 바른 붉고 도톰한 입술.
화려하게 수놓은 새하얀 유군을 입은 걸화는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거지들의 눈과 몸이 그들의 의지와 오랜 기간의 훈련 성과에 반해 걸화에게 돌아갔다.
곱게 차려입은 걸화는 거지들이 대놓고 쳐다보거나 말거나, 자기 갈 길 가기 바빴다.
다리를 쩍쩍 벌려, 큰 걸음으로 걸어 개방 입구를 나섰다.
거지들이 걸화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분내가 잔상처럼 퍼졌다.
걸화는 팔자걸음으로, 개방을 내려가는 외길 한가운데를 성큼성큼 걸었다.
하늘하늘한 유군의 치맛자락이 펄럭거렸다.
한참을 내려가던 걸화는 총타로 올라오는 외길과 대로가 만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나 돌아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짝다리를 집고 건들거리며 서 있었다.
조금 서 있는 듯하더니 목을 쭉 빼고 대로 쪽을 쳐다보았다.
대로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지 않았다.
‘아잇… 왜 이렇게 안 와… 쯧…….’
걸화가 초조하게 한쪽 다리를 달달달 떨어댔다.
대로의 끝에서 외길을 따라 올라가면 개방 총타가 나왔다.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 이상, 외길 방향으로 오는 이들의 목적지는 모두 개방 총타였다.
거지 세 명이 대로를 따라 걸어와, 걸화를 힐끔거리다 외길로 올라갔다.
걸화가 짜증스럽게 뒤통수를 긁어댔다.
아무도 없는 게 뻔히 보이는 대로를, 몸을 쭉 빼고서 내다보았다.
불안함에 다리를 더 급하고 경망스럽게 떨었다.
“신의라는 사람이 이렇게 시간을 안 지켜서야…….”
걸화가 투덜댔다.
사실 신의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기는 했다.
가다가 급한 환자를 만나거나, 치료하던 환자의 증상이 생각보다 깊어져 며칠씩 약속을 어기는 것은 예사였다.
며칠이건 달포건 늦어도 신의가 나타나기만 하면, 버선발로 달려 나와 그를 맞이했다.
누구도 신의가 늦는 것에 대해 탓하지 않았다.
몇 시진쯤 늦는 것은 늦었다고 쳐주지도 않았다.
인상을 팍 구기고, 유군이 펄럭거리게 다리를 떨어댔다.
아침 햇살이 맑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건만, 걸화는 바람이나 햇살 따위는 어찌 되는 상관없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신의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