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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80화 (80/230)

80화

【다시 일상】

연천이 걸화를 보고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걸아야! 너는 어찌 그리 나를 따르는 게냐?”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는 게 너무 우울했어요. 형님을 만나서 처음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하루를 살아도 형님 옆에서 살다 죽는 것이 나아요.”

걸화가 이제껏 담아 두었던 진심을 말했다.

“고맙다, 걸아야. 나를 그리 믿고 따라주어서 고맙다. 나도 네가 있어 즐겁고 행복했다. 내 앞에 나타나 내 아우가 되어주어서 고맙구나. 걱정하지 말거나 죽지 않을 테니…….”

연천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고 걸화를 토닥였다.

걸화가 아플 때 그랬던 것처럼, 걸화가 무서워서 잠들지 못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내, 걸화가 연천의 품에 축 늘어졌다.

연천이 걸화를 조심히 바닥에 눕혔다.

“……!!”

놀란 걸윤이 다가와 걸화를 살폈다.

“훈혈을 점했소. 잠시 기절한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걸아를… 부탁하오.”

연천이 잠들 듯 기절한 걸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연천에게 걸화는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자 아우고, 동료였다.

이렇게 손을 놓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팠지만, 이 일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그리도 애타게 찾았다. 연천이 본 스승님의 자취를.

넓은 중원 어딘가에는 스승님을 제대로 본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분의 따뜻하고 인자한 모습을 말이다.

믿으면서도 하루하루 희망이 사라져갔다.

스승님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아프도록 지독해서.

그런데, 드디어 그런 사람을 만났다.

스승님을… 진짜 스승님을 아는 사람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야 했다.

연천의 미간이 좁아졌다.

연천의 눈은 한참동안 걸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흐음…….”

눈을 꼭 감았다 뜨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천은 기절한 걸화에게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걸윤이 그런 연천의 팔을 잡았다.

“대협! 같이 나갑시다.”

걸윤이 연천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걸아를 잘 부탁하오.”

연천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답하지 않았지만, 걸윤과 같이 나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대협… 내 진짜 이름은 배걸윤이오. 개방의 배걸윤이라고 하오. 그동안 감사했소. 걸아를 돌보아준 것에 대해서 말이오. 내 대협께 큰 빚을 졌소. 내게 그 빚을 갚을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소?”

걸윤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대면서 진심으로 말했다.

“아… 개방의 배걸윤 대협. 걸아 덕분에 나도 즐거웠으니 빚이라 생각지 마시오.”

연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잡는 걸윤에게 고마웠지만, 자신은 그들과 함께할 수가 없었다.

“대협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혈영천마는 중원의 살인귀라 불리오. 그런 자를 돕는다는 것은 대협과 스승님을 욕되게 하는 짓이오. 돌아가신 스승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을 해서야 되겠소?”

걸윤은 애쓰고 있었다.

“…….”

“내가 대협을 힘으로 끌고 갈 수도 있소.”

연천을 잡은 걸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저히 안 되면 완력을 쓸 작정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스승님이… 혈영천마, 그분인 듯하오.”

“……?!”

연천을 보는 걸윤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

크게 벌어진 동공은 연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손아귀에 힘이 빠졌다.

연천이 작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오, 대협도 걸아도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 생각하며 살 거요. 두 사람에게 피해 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요. 그동안 고마웠소.”

걸윤은 혈영천마와 얽혀서, 자신과 걸화와 개방의 앞날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다.

연천은 그런 걸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연천은 멍한 걸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방을 나섰다.

걸윤은 연천을 잡지 못했다.

그저 망연한 얼굴로 연천이 사라진 문을 쳐다보았다.

* * *

천상이 뛰었다.

워낙 성질이 급한지라 종종 뛰듯이 급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오늘 그의 걸음은 유난히 더 빨랐다.

그의 뒤를 따르는 걸부도 염문강도 장로들도 말리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천상이 서두르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상은 총타의 문을 넘어 개방으로 올라오는 외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의 뒤를 한 무더기의 개방도들이 우르르 따랐다.

외길 절반쯤 내려가던 천상은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소령산 외길을 오르는 자는 말을 탄 걸윤이었다.

그 뒤에 정신이 절반쯤 나간 걸화가 매달려 있었다.

“걸화야!”

천상이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천상의 얼굴은 걸화가 나가기 전보다 상해 있었다.

걸윤이 말을 멈추고 걸화가 바닥에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기운 없는 걸화는 걸윤의 도움으로 겨우 말에서 내렸다.

천상이 걸화에게 다가갔다.

천상을 보는 걸화의 미간이 좁아졌다 펴졌다, 좁아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얼굴을 구긴 걸화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버지이…….”

머리를 천상의 가슴에 묻었다.

천상이 걸화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으아아아, 아아아앙!”

걸화가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옆에 서 있던 걸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걸윤의 가슴속에 불쾌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개방으로 오는 내내 적당히 덮어두었던 것들이었다.

멍청하기 그지없는 작자였다.

제 죽을 길을 제 발로 찾아간 바보 같은 놈.

편하게 죽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죽어 갔을 것이다.

자신이 손을 놓아서…….

그 바보 같은 놈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끌고 나오면 됐을 것을…….

제멋대로에 아무것도 없는 거지 아이를 데려다 그리 정성껏 보살피는 멍청한 놈이었다.

얼마나 멍청한지 제 스승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 모자란 자가 혈영천마의 제자일 리가 없는데…….

혈영천마는 당대 아니, 현재까지도 그의 무공을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고금제일이었다.

한데 그 바보 같은 자의 검법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혹시라도 그게 진실이면 어떠하랴.

‘데리고만 나올 것을… 나와서, 헤어져도 될 일이었는데… 살리고만 볼 것을… 끝까지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했다.

무공이 약하다 무시해서 미안했고, 얼빵하다 욕해서 미안했고, 별 볼 일 없다 업신여겨서 미안했다.

손을 놓아서… 그래서 정말 미안했다.

걸윤이 무거운 얼굴로 혼자서 주억거렸다.

“으어어엉… 으어억….”

걸화의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아픈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걸윤은 더 괴로워졌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걸윤의 속을 불편하게 쑤셔댔다.

걸화가 저리 힘들어하지 않으면, 걸윤의 마음은 좀 편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걸화는 아파했고 걸윤은 괴로웠다.

“그래, 그래… 그래……. 네가 힘들었구나. 그래… 아비가 여기 있다…….”

천상이 걸화의 등을 토닥였다.

걸화의 통곡은 발악에 가까웠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몸부림이었다.

한동안 개방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 보다 무겁고 침울했다.

* * *

얼마 뒤.

“걸화는 좀 어떠냐?”

천상이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혈을 점해두었으니 한동안은 잠들어 있을 겁니다.”

걸부가 말했다.

“그래서 그자는 어찌 되었느냐?”

천상이 걸윤에게 물었다.

“천마검을 훔치다 잡힌 세 명의 사내가 참수되어, 그 목이 영천왕의 성 앞에 효시 되었다고 합니다. 성 앞에 벽서가 붙었습니다. 세 명 외에도 그 일과 관련되어 처형된 자들이 꽤 됩니다. 그자의 이름은 없었으나 신원미상자도 몇 되었으니 그중에 하나일 겁니다.”

걸윤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자는 이 세상에 없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그것은 무인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이었기에…….

“쯧쯧… 젊은 사람이 그리 무모해서야… 어찌 영친왕의 성에서 파옥을 하겠다고…….”

천상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답답한 자였습니다.”

걸윤은 이 말을 연천에게 직접 하고 싶었다.

‘이 세상 물정도 모르고 답답한 인간아!!’ 라고

“인근 분타에 소식을 넣어 작은 것 하나라도 매일 보고하라고 일러라, 운이 좋아 시신이라도 수습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천상이 무거운 얼굴로 명했다.

* * *

이 년 후.

개방의 거지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쫓아다니느라 바빴다.

무림 돌아가는 이야기와 소문, 풍문이나 항설 같은 것들 말이다.

무림에는 언제나 사건과 사고가 넘쳐났고, 새로운 무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계속되는 변화를 파악해야 했기에 거지들은 분주했다.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총타로 들어오는 거지들의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보와 소식을 캐는 데 있어서 개방의 실력은 나날이 좋아졌고, 거지들이 일 하나는 제대로 한다는 평판이 자자했다.

개방주 천상은 두 아들과 함께 있었다.

무림행을 핑계로 집 밖으로 나돌던 걸윤을 불러들여, 오랜만에 삼부자가 함께하는 것이었다.

“걸화는 무엇을 하고 있더냐?”

천상이 물었다.

오랜만에 걸화까지 온 가족이 다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수련 중입니다.”

걸부가 짧게 답했다.

걸화는 집을 나갔다 돌아온 이후, 안채의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수련을 하는지 마는지, 한다면 무슨 수련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무장에서 비도를 던지고 있다는 보고뿐이었으니 천상에게 수련 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쯧쯧… 벌써 이 년이다. 안채에서 나오지 않은 게…….”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걸화는 안채에서 두문불출했다.

덕분에 똥통에 빠지는 거지도, 돌팔매질을 당하는 거지도, 뒤통수를 얻어맞는 거지도 없었다.

개방은 더없이 평화로웠지만, 천상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걸화가 전처럼 사고라도 치고 다니면 좀 나을 것 같았다.

걸화는 하루 종일 안채의 연무장에서 비도만 던지고 있었다.

가끔 천상이 안채로 찾아가기도 했지만, 걸화는 무엇 하나가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골칫덩어리인 자신의 딸 배걸화가 아닌 것 같았다.

눈을 반짝이며 엉뚱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천상은 처음 보는 딸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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