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침묵을 깬 것은 연천이었다.
“그분이… 혈영천마가 어찌 그대의 은인이오?”
연천의 낮게 깔린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제가 어렸을 때, 형편이 어려운 아버지가 고리대를 빌렸고 돈을 못 갚자 그자들이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형란이 간략하게 말했다.
“그분을… 뵌 적이 있소?”
연천이 물었다.
“네, 제가 여섯 살 때 뵈었습니다. 참으로… 멋진 분이셨지요. 세상에 나도는 소문은 다 헛것입니다. 그분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형란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허!”
걸윤이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형란의 말에 더 이상 상대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걸윤이었다.
연천이 형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란이 놀라서 피하려고 했으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연천에게 두 손이 잡혀버렸다.
“소저를 믿소, 내가 돕겠소.”
연천이 형란의 두 손을 꼭 잡고,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형란과 연천의 얼굴은 작은 표정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도록 가까웠다.
의아한 얼굴을 한 형란이 연천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연천의 눈가가 촉촉하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걸화는 형란과 연천을 보며 입을 삐죽댔다.
“가, 감사합니다.”
형란이 연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답했다.
“으흠…….”
걸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내, 백연천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고 있었다.
한동안 같이 지낸 정도 있고, 걸화를 돌보아준 은혜도 있었다.
말리는 것이 맞았다.
말리기도 전에 말려지지 않을 것 같아 속이 답답했다.
“이것 보시오. 대협! 뭘 어찌 돕겠다는 거요? 보지 못했소? 검을 훔치다 잡힌 자들이 어찌 되는지? 아까 본 것은 시작에 불과하오. 온갖 고문을 당하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오.”
걸윤이 침착하게 말했다.
걸윤은 연천을 말리기 위해 한 말이었으나, 그 말에 형란의 몸이 떨렸다.
그녀도 그것을 알기에 그리 죽여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난 이 일을 해야만 하오. 이 일을 하기 위해 내가 무림으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구려.”
연천이 묵직한 얼굴로 걸윤에게 말했다.
“대체 뭘 어찌하겠다는 거요?”
그 오라비라는 자들은 성치 않은 몸으로 이미 영친왕의 무사들에게 끌려갔다.
뭘 어떻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걸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연천은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잠시 후, 연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옥에 갇힌 오라비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소?”
‘이런……!!’
“지금 그게 될 말이라고 생각하시오!! 영친왕의 옥을 깨부수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오! 그건 가능하지 않소! 시도하다가 잡히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러시오!!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오!!”
걸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저 생각 없는 사내를 어찌해야 하나 싶어 속이 콱콱 막혔다.
무조건, 지금 성을 나가야 했다.
검 도둑이 들었으니 조사를 할 터였다.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기 딱 좋았다.
검 도둑과 한패인 그녀가 이 숙소에 든 것을 들키는 날엔 목숨 부지하기 힘들었다.
아니, 곱게 죽기도 힘들게다.
“대협, 나는 가야 하오. 한데… 내가 대협께 큰 부탁을 좀 해야겠소.”
연천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걸윤이 고마워서 말이다.
“어휴우…….”
얼굴이 시뻘게진 걸윤이 누구 하나 날아갈 듯 숨을 내쉬었다.
“걸아를 좀… 부탁하겠소. 성을 나가게만 도와주시오.”
연천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저 아이 못 맡겠소, 대협이 데리고 나가시오.”
걸윤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연천이 걸화를 아끼는 것을 알았다.
걸화 때문에라도 파옥을 하겠다는 그 턱도 없는 생각을 접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미안하오. 걸아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않소?”
연천이 사정했다.
“모르오!! 대협이 파옥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소!”
걸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날이 밝으면 성내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영친왕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피를 뿌린 자였다.
중원 바닥에 영친왕을 저지할 만한 세력도 없었다.
영친왕이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둘이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난 무조건 형님이랑 같이 갈 거예요!”
잠에서 깨어 연천과 걸윤의 이야기를 듣던 걸화가 나섰다.
“걸아야! 너는 대협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거라.”
연천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떠돌지 말고 정착할 곳을 찾아보아라.”
연천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탈탈 털어 걸화에게 내밀었다.
“싫어요, 나는 무조건 형님하고 같이 갈 거예요.”
걸화는 막무가내였다.
“어이구……!!”
답답한 걸윤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쳐댔다.
저 정신 빠진 두 사람이 죽을 자리로 못 가서 저리 안달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제발 좀!! 둘 다 정신을 차리라고!! 왜 죽지 못해 그리 안달이오! 내가 부탁하겠소. 대협! 제발 나갑시다. 저 소저도 데리고 나갑시다. 그게 소저를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이오!”
뻘게진 얼굴로 말하는 걸윤의 입에서 침이 튀었다.
걸윤은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미안하오.”
연천은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내가 어찌하면 가겠소? 좋소! 내 이 성만 벗어나면 대협을 형님이라고 부르겠소! 그러니 나갑시다. 형님! 제발 나갑시다!!”
걸윤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연천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정말 미안했다.
“어휴우…….”
걸윤은 아예 연천에게서 몸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고민했다.
저자를 때려눕혀서 끌고 갈까 하고…….
“나도 미안해!”
걸화가 낭창하게 말했다.
걸윤이 몸을 획 돌려 걸화를 노려보았다.
걸화가 뱅글뱅글 웃었다.
“아이구!! 아버지이이!!”
이 총체적인 난국에 총타에 계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은 걸윤이었다.
“걸아야! 먼저 성 밖으로 나가 있거라, 내 이 소저를 돕고 따라가겠다. 내가 나가서 너를 찾아갈 테니 대협과 먼저 가거라.”
연천이 부드럽게 말했다.
“형님! 그거 알아요?”
걸화가 연천에게 물었다.
“뭘?”
연천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형님, 거짓말 되게 못해요. 난 무조건 같이 갈 거예요.”
“어구…….”
걸윤이 뒷목을 잡고 신음했다.
한쪽에선 연천과 걸화가 계속 입씨름 중이었다.
걸윤은 주위를 둘러보며 심호흡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해가 뜰 때까지 남은 시간이 길지 않았다.
걸화도 연천도 성 밖으로 나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걸윤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연천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자신에게는 누이인 걸화가 더 소중했다.
도저히 안 된다면, 걸화만이라도 데리고 나가야 했다.
생각을 하던 걸윤이 결심을 한 듯 나서며 연천에게 포권을 했다.
“대협! 그동안 내 아우인 걸아를 돌보아주어서 고맙소.”
걸화라도 데리고 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걸화가 자신의 아우인 것을 알면, 연천은 지금처럼 좋게 밀어내지 않을 것이다.
좀 더 과단하게 떼어내거나, 버리고 떠날 수도 있었다.
걸화를 무사하게 데리고 나갈 수 있다면 어떤 수든 쓸 수 있었다.
걸화가 그렇게도 여인인 것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으니 그것은 덮어두었다.
그것은 밝혀도 밝히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었으니.
“야!!”
걸화가 매섭게 걸윤을 노려보았다.
“……!!”
걸윤을 보는 연천은 놀란 듯 말이 없었다.
걸아가 저 대협의 아우라고?
연천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생각 보면 눈치챌 만도 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다른 듯 꽤나 닮아 있었다.
거기다 둘이 싸우면서 해대는 말들을 조금만 귀담아들었다면 알았을 텐데…….
하지만, 연천은 알아채지 못했다.
원체 눈치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싸워대는 것을 어찌 다 신경을 쓰겠는가?
눈 닫고, 귀까지 닫고 있어서 몰랐다.
혼자 말없이 생각하던 연천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걸아를 믿고 맡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이씨! 이 나쁜 놈!! 네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난 무조건 형님이랑 갈 거야!
걸화가 연천의 팔을 꼭 붙잡았다.
다른 느낌의 긴장감이 방 안을 채웠다.
“…저는 밖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떨림이 잦아든 형란이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는 것이 예의도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자신 때문에 저들이 싸우는 것 같아 불편했다.
결정은 저 세 사람의 몫이었다.
자신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받아들여야 했다.
한데, 이상하게도 믿음이 생겼다.
잠깐 본 그 사내가 꼭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말이다.
자신 때문에 싸워대는 세 사람에게 미안하고, 위험한 일인 것도 알지만 자신이 누구의 처지를 이해해줄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누구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 상황에 나타난 귀인이었다.
그 사내가 도와준다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라비들을 구해야 했다.
더 이상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밖으로 나온 형란은 담 위로 머리만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오라비들을 잡아다 놓은 곳에 모여 있으리라.
전각 안에서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란은 저들이 어서 결론을 내기를 기다렸다.
찬바람을 쐬자, 정신이 맑아졌다.
걸윤이 걸화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너는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간단 말이야! 그러다 잡히면 어쩌려고! 너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혈영천마를 추종하는 자를 돕다가 그랬다고 하면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해 댈 게다. 아버지와 우리 모두에게 그 비난이 향할 게야! 아버지의 어깨에는 수많은 이들이 달려 있어. 그들의 삶을 철없는 너 하나 때문에 망치려 드는 게야!”
걸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개방 방주의 여식이 영친왕과 척을 지고 거기다 혈영천마의 추종자를 도왔다는 말이 돈다면, 개방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게 뻔했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개방이 전대 마교 교주와 얽혀있다고 하면, 다른 정파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무림에 발붙이고 살기 힘들 것이다.
“내 행동은 아버지와 상관없어! 애초에 너와 동행하지 말았어야 했어! 난 죽더라도 형님이랑 같이 죽을 거야, 당장 꺼져.”
걸화가 우겨댔다.
“나야말로 처음부터 널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어!”
걸윤은 정말로 후회했다.
“…….”
걸화가 걸윤을 노려보다, 표정을 바꾸어 연천에게 말했다.
“형님, 어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