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 뒤로, 검은 무복의 무인이 축 늘어진 다른 사내를 끌고 나왔다.
사내는 입 주위와 앞섶에 핏자국이 있을 뿐, 외관은 비교적 멀쩡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인들은 알았다.
그가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팔 한쪽, 다리 하나를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도 말이다.
아마도 내장은 진탕이 되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다음으로 팔뚝과 옆구리에 화살이 박힌 사내가 끌려 나왔다.
화살이 박힌 사내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 검의 자상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사내 역시 짐승처럼 끌려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 뒤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그것이 잡힌 이들 전부인 듯, 검은 무복의 무인들이 끌려간 이들 뒤를 따랐다.
구경하던 이들도 그들 뒤를 쫓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한 것일 게다.
검은 무복의 무인들은 비참한 꼴을 보여주려는 듯, 뒤따르는 자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연천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 들어가자.”
자신도 자신이지만, 어린 걸아에게 못 볼 것을 보게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못했다.
천마검을 쫓으면서 피범벅이 된 이들을 보게 된 것이벌써 두 번째였다.
연천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우울했다.
숙부님의 말씀대로 하는 게 모두를 위해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천은 걸화와 함께 숙소가 있는 전각으로 향하면서도 기분이 찝찝했다.
백화루 은월의 말이 떠올랐다.
천마검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피를 부를 것이라는 그 말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께름칙했다.
“오늘 밤… 여기를 뜨는 것이 좋겠다.”
연천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천마검을 봤다.
천마검과 조우하면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잠시… 스승님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만이었다.
더 이상 천마검을 쫓으며 못 볼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의 뒤를 캐는 것을 그만둬야 할지도 몰랐다.
연천의 말에 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걸윤도 긍정의 표시를 하고 터덜터덜 걸었다.
파월산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저 다친 사람만 있어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잡혀간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이 상황을 더 끔찍하게 만들었다.
걸화가 많이 놀랐을 것이다.
세상의 비정함에, 그리도 보고 싶었던 무림에 대해.
“……?!”
정원을 지나던 중, 걸화가 걸음을 멈추었다.
“누가 있어요.”
걸화가 말했다.
그 말에 걸윤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쟤, 충격받은 거 아니야? 또 뭔 헛소리래……?’
연천이 진지한 얼굴로 걸화를 쳐다보았다.
연천과 걸화의 시선이 마주치자, 연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화를 믿는다는 의미였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면 그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걸윤이 인상을 쓰고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걸화는 정원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정원의 대부분을 비추는 달빛이 들지 않아, 유난히 어두컴컴하고 스산했다.
걸화는 어른 키 높이로 무성하게 자라 난 덤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시커먼 덤불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거기… 뉘시오?”
“…….”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에휴…….”
걸윤이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둘의 이상한 짓거리는 볼 때마다 참기가 어려웠다.
걸윤은 개방에서도 추적술이 뛰어나고, 사람의 기척을 잘 찾기로 손에 꼽혔다.
그런 걸윤이 느끼지 못하는데, 거기 뭐가 있겠는가?
걸화가 망설이다가 시커먼 수목이 우거진 아래로 몸을 숙여 들여다보았다.
“뉘시오?”
연천이 걸화 옆에서, 걸화처럼 몸을 숙였다.
걸윤이 찝찝한 얼굴로 둘을 쳐다보았다.
맨바닥 수풀에 얼굴을 들이밀고 뭘 하는 건지…….
‘둘이서 없는 일도 만들어내며 다니니 심심하지는 않겠다.’
고개를 덤불 안으로 밀어 넣은 걸화의 눈에 영친왕의 시녀들이 입는 엷은 꽃분홍색 옷자락이 보였다.
“거기서 뭐 해요?”
걸화의 물음에 옷자락 끝이 심하게 흔들렸다.
걸화가 수풀 아래의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어 그 속에 숨어 있던 존재를 끌어당겼다.
시녀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여리여리한 시녀는 걸화의 완력에 버티지 못하고 끌려 나왔다.
수풀 아래에서 나온 것은 영친왕의 시녀가 맞았다.
시녀를 보고 제일 놀란 것은 걸윤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걸윤은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한데, 걸화는 알아챘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무공도 모르는 걸화가 자신보다 기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으니, 걸윤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수풀 밖으로 끌려 나온 시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죽여 주십시오… 죽여 주십시오… 죽여 주십시오…….”
오체투지한 채,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걸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숙소로 데려가자, 여긴 언제 누가 나타날지 몰라.”
착잡한 얼굴을 한 걸윤이 말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문제가 있어 보이는 시녀와 함께 있는 것이 눈에 띄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버려둘 수도 없었다.
정보를 취급하는 개방도의 감이 그녀가 중요한 뭔가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걸화와 연천이 몸을 떠는 시녀를 양쪽에서 부축해 숙소로 이동했다.
그들의 숙소가 정원과 가까웠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마검을 훔친 자들을 보러 갔기에,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그들의 숙소에 당도할 수 있었다.
숙소 전각에 도착해서도 시녀는 계속 몸을 떨어댔다.
“…그냥… 죽여 주세요……. ”
그리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살려달라고도 아니고 죽여 달라고 말이다.
“우리가 그대를 죽일 이유가 없소,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오.”
연천이 부드럽게 말했다.
걸화가 물을 떠와 그녀에게 먹였다.
냉수를 마시고 시간이 지나자, 시녀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왜 거기 숨은 것이오?”
“죽여 주십시오…….”
연천의 물음에도 시녀는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우리는 호위 무사를 그만두고 오늘 밤에 이 성을 빠져나갈 것이오. 우리는 이제 이곳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니 걱정 마시오. ”
연천의 말에 시녀, 형란이 그를 쳐다보았다.
“…….”
형란은 떨리는 눈동자로 연천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아까 사람들 끌려 나온 거 보고 겁나서 그래요? 같이 성 밖으로 나갈래요?”
걸화가 물었다.
“……!!”
안정되어 가던 형란이 다시금 떨기 시작했다.
연천은 그녀가 조금 전의 일 때문에 놀란 것이라고 생각해서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소. 원하면 우리와 함께 나가시오.”
걸윤이 인상을 구겼다.
‘아니,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 어떻게든 구슬려서 숨은 이유를 알아내야지. 저리 물러 터져서야…….’
연천의 말에 이제껏 떨고만 있던 형란의 두 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혼자 갈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을 두고 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찬 형란이 흐느끼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어디 계시오?”
연천이 물었지만, 형란은 답하지 않았다.
“…….”
형란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
연천은 형란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전각 안은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긴장이 풀린 것인지 걸화가 꾸벅꾸벅 졸았다.
걸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린다고 답을 들을 수 있겠는가?
상대가 대답을 하도록 몰아붙여야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면, 시녀를 버리고 가야 했다.
오늘 밤 어수선한 틈을 타 걸화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성을 빠져나가 어느 정도 벗어나려면, 지금쯤 채비를 해야 했다.
답답한 걸윤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가 않소. 이 께름칙한 곳에서 어서 빠져나가고 싶소. 소저가 말하지 않으면 우리만 나갈 수밖에 없소.”
형란이 말을 하는 걸윤과 잠자코 있는 연천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한참 뒤,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검을 가져가려다 잡힌 이들이 오라버니들입니다. 저희는 그저… 그저 검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시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마검을 훔치려다 잡힌 자들이 소저의 오라비들이라는 말이오? 하!! 그 검의 주인은 혈영천마요. 어떻게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말이오?”
시녀를 보는 걸윤의 눈빛이 좋지 못하게 변했다.
검을 훔친 자들을 어찌 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영친왕이 검 도둑을 찢어 죽일지 삶아 죽일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 갈 거라는 것이다.
저 시녀와 같이 있으면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천마검 도둑과 한패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분을… 꼭 찾을 겁니다.”
형란의 말에 연천의 눈이 커졌다.
“당신 마교에서 왔소?”
걸윤이 의심의 눈초리로 물었다.
형란을 향한 걸윤의 눈은 차가웠다.
마주치지도 말았어야 할 사람을 숙소로 들였다.
천마검 도둑과 한패를 말이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교에다, 혈영천마를 추종하기까지 한다?
최대한 빨리 여기서 나가야 했다.
그녀와 더 있다가는 자신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아닙니다, 저희는 마교도가 아닙니다. 그분이 저희의 은인이기에 은혜를 갚기 위해 찾는 것입니다.”
형란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과단하게 말했다.
“하! 그자는 희대의 살인귀요. 그자를 은인이라 부르는 소저 또한 무림의 악인이 될 수 있소!”
걸윤의 메마른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쓰읍…….”
벽에 기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걸화가 침을 닦으며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
형란이 원망 가득한 눈으로 걸윤을 노려보았다.
걸화는 눈을 비비고, 서로를 쏘아보고 있는 형란과 걸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묵직한 침묵이 전각 내부를 눌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