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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매혼:바람에_홀린…-76화 (76/230)

76화

방해하던 걸윤이 없어지자 걸화가 연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항상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는 연천을 위로해주고 싶었기에.

조용하다 못해 황량한 방 안의 공기는 묵직했다.

무거운 분위기만큼 시간도 답답하고 느리게 흘렀다.

연천의 손을 잡고 꾸벅꾸벅 졸던 걸화는 어느 순간 바닥에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걸화가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참 뒤, 연천이 조용히 일어나더니 웃옷을 벗어 걸화에게 덮어주었다.

걸윤은 연천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봤다.

“좀… 괜찮소?”

걸윤이 어색하게 물었다.

“미안하오……. 내가 좀 놀라서… 괜찮소.”

연천이 답했다.

다시 무거운 침묵 속에 걸화가 꿈에서 뭘 먹는지 쩝쩝대는 소리만 방 안을 울렸다.

연천과 걸윤은 말없이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쓰으읍… 형님, 나 배고파…….”

실컷 자고 일어난 걸화가 침을 닦으며 연천에게 말했다.

연천이 씨익 웃었다.

“형님, 이제 괜찮은가 보네.”

걸화도 웃었다.

마주 보고 웃는 둘을 보는 걸윤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저것들이!’

* * *

정말 반나절 꼬박을 밥은커녕 물도 한 모금도 주지 않았다.

답답하고 지겨운 시간이었다.

이건 숙소로 지정해준 전각에 갇혀있다 이곳으로 옮겨와 갇힌 꼴이었다.

반나절은 더디었지만, 다행히 지나갔고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이 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알리고 다시 그들의 전각으로 안내해주었다.

걸화는 시종이 가지고 온 식사를 입에 쓸어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오. 그렇지 않소? 귀한 검을 저렇게 지킨다는 것이 말이 되지가 않소.”

걸윤이 연천을 보고 물었다.

“음… 뭔가 개운치 않은 건 맞소.”

대답한 연천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연천도 걸윤의 말에 동감했다.

귀한 검을 그리 허술하게, 이제 갓 뽑은 호위무사에게 지키게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 알려면 조금 더 기다려보는 수밖에.

걸화는 둘이서 뭐라고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 바빴다.

걸윤과 걸화는 먹는 것을 가지고도 끊임없이 싸워댔다.

연천이 식사를 두고 가는 시종에게 음식을 넉넉히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다음 날부터 음식의 양이 이전의 배는 되었다.

덕분에 밥 먹는 시간이 그럭저럭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걸화는 먹을 때는 주위에 관심이 없었으니…….

반나절 동안 검을 지킨 이후, 숙소에서 똑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시간 말이다.

“형님, 우리 계속 이리 있어야 해요? 너무 심심하고 답답해요.”

걸화가 칭얼댔다.

“조금만 더 있어 보자, 설마 이것이 전부는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연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검이 있는 방에서 가끔 시간을 보내는 게 그들이 하는 일의 전부일 것 같았다.

“뭔 호위 무사가 만날 이렇게 방에만 박혀있어요? 난 엄청 재밌는 것을 많이 할 줄 알았는데.”

걸화가 입을 내밀고 말했다.

연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재밌는 것은 아니고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시험을 치러 실력 검증까지 마친 무사들을 뽑았으니 말이다.

한데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시간이 날 때 너는 내공심법을 배우면 어떻겠느냐?”

생각하던 연천이 말했다.

“정말요? 좋아요!”

걸화가 입을 옆으로 찢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밥을 마저 먹고 내 방으로 오너라.”

연천이 젓가락을 놓고 먼저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 먹었어요. 지금 가요! 가!”

걸화가 남은 음식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연천의 뒤통수에 대놓고 크게 대답했다.

“나랑 얘기 좀 하고 가.”

걸윤이 입 안 가득 음식을 머금고 일어서는 걸화의 앞을 막았다.

걸화가 입술을 비틀며, 온 얼굴에 짜증을 담아 걸윤을 쏘아보았다.

걸윤도 떨떠름한 얼굴로, 닫힌 연천의 방문으로 향했던 시선을 걸화에게 돌렸다.

“왜!”

걸화가 삐딱하게 물었다.

저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었다.

시비를 거는 거지.

“정말 저런 자에게 내공심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저자에게서 제대로 된 내공이라고는 느껴지지도 않아.”

연천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걸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걸윤은 연천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가 걸화를 걷어주고 챙겨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공이 형편없고 자신의 실력을 간과하고 행동하기는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속악하지 않고 무던한 자였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함께하게 될지 몰랐다.

나서서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굳이 사이가 틀어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르쳐 준다고 하잖아!”

걸화는 사사건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걸윤이 너무 미웠다.

“다 큰 처녀가 사내랑 단둘이 방에서 무얼 하겠다는 게야?”

연천의 눈에는 걸화가 어린 사내아이지만, 걸윤에게는 다 큰 처녀였다.

내공을 운공한다고 다 큰 처자와 사내가 둘이서만 아무도 없는 방에 있겠다는 것이었다.

이건 연천이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아, 방에 들어가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라비로서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공심법을 배우겠다고 했잖아.”

걸화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을 믿는 거야? 저자는 널 가르칠만한 수준이 못 돼. 자기 내공이나 키울 것이지, 누굴 가르쳐!”

걸윤의 입에서 결국 또 연천의 험담이 튀어나왔다.

걸윤은 이런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저자는 꼭 이렇게 일을 만든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것은 그냥 애교로 넘어가 줄 수도 있지만, 걸화를 가르치니 어쩌니 하니깐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기지 않는가?

거기다 다 큰 처녀와 단둘이서 한방에?

아이고!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연천은 걸화가 여인인 것도 모르는데, 걸윤만 혼자 안달복달했다.

걸화가 아플 때, 연천이 걸화의 방에서 밤을 새운 것을 알면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지 않을까?

“야! 내가 우리 형님 욕하지 말랬지! 그리고 제발 신경 꺼! 내 앞에서 좀 꺼지라고!”

걸화가 신경질을 내고 연천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휴… 저게, 저게… 어휴우!!”

걸윤이 자신의 가슴을 한 손으로 팡팡 쳐대고는, 연천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왜 들어와!”

걸화가 걸윤에게 쏘아붙였다.

“나도 내공 운공하는 걸 좀 배워 보려고…….”

걸윤이 우물쭈물 답했다.

다른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하! 웃기고 있네, 나가!”

걸화는 그곳이 제방이라도 되는 양 소리쳤다.

“야!”

걸윤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천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둘의 싸움이 어떤 방향으로든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랬다, 말려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누구든 한사람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안 나가? 안 나가?”

걸화가 발로 걸윤을 밀어냈다.

“나도 내공심법을 배우겠다는데, 네가 뭔데 나가라는 거야!”

걸윤은 걸화의 발이 닿은 부분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나가라!”

“나도 배우러 온 거니 냅 둬라.”

“형님은 너한테는 가르쳐 주겠다는 얘기 안 했다!”

걸화가 그리 말하고 혀를 쏙 내밀었다.

걸윤은 연천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입술을 부르르 떨어댔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쟤 왜 저래?’

걸화가 뜨악한 눈으로 걸윤을 쳐다보았다.

연천도 눈을 감고 부르르 떠는 걸윤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몸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이상했다.

걸윤이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조그마한 목소리를 내었다.

“혀, 혀, 혀, 형…님……. 저도 가, 가르쳐 주시오.”

연천과 걸화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말을 끝낸 걸윤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들과 다니면서 걸윤이 연천에게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나이가 같으니 그리 부를 필요가 없었지만, 걸화가 걸윤에게 연천을 형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그래서, 걸윤도 연천도 연천이 나이가 더 많은가 보다 하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암튼, 걸윤은 연천을 형님이라 부르지 않았을뿐더러 딱히 뭐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싶은 말만 불쑥 내뱉었다.

걸화와 둘만 있을 때면 저 작자, 머저리, 얼빵이, 주제도 모르는 놈이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연천 앞에서는 나름 조심했다.

“혀, 형님……. 가, 가르쳐 주시오.”

걸윤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 말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했다.

저 엉성한 작자에게 형님이라는 소리는 죽어도 하기 싫지만, 그 작자와 걸화를 단둘이만 방에 두는 것은 그것보다 더 싫었기에.

걸윤이 그리 예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있는 사람에게 형님이라 부르고, 깍듯이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치기만 가득해 능력도 없으면서 철없는 어린 누이를 꼬셔 데리고 다니는 저 작자에게는 도저히 형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형님이라고 불러서 이들 옆에 있을 수만 있으면 그리해야 했다.

걸화를 저 사내랑 단둘이 방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걸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시오.”

연천이 미적지근하게 답했다.

“쳇!”

걸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연천 옆에 앉았다.

“음… 음…….”

걸윤도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음… 보자…….”

말을 끝낸 연천은 걸윤이 자리에 앉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

걸화는 또 저러는구나 싶어서 그냥 기다렸다.

뭐 하나를 배우려면 연천만의 길고도 긴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아니깐.

‘음… 현존하는 문파의 심법은 안 될 것이고. 이건 너무 패도적이고… 이건 불안정하고……. 음… 안정적인 게 뭐가 있을까?’

연천은 턱을 문지르며 스승님께 들었던 심법 중에 걸화에게 맞는 것이 무엇일지 깊게 고민했다.

걸화는 연천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심각해졌다.

걸윤은 꼴같잖은 두 사람을 보며, 콧방귀도 빈정거림도 한숨도 꾹 참았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쫓겨날 수도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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