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고매혼:바람에_홀린…-75화 (75/230)

75화

휑하게, 빈방 안에 묵직한 고요가 흘렀다.

걸윤이 검을 쳐다보았다.

대충 보아도 알만했다.

눈앞의 이 화려한 검이 천마검이라는 것을.

한데, 이게 뭐란 말인가?

그리도 귀한 검이라고 하면서 고작 세 사람에게 지키라고?

“하! 이걸 지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걸윤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바보냐? 방금 지키라고 말했잖아?”

걸화가 비웃었다.

“너야말로 바보냐? 이게 그리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새로 들어온 호위 무사들에게 맡겼어, 이곳은 주변에 변변한 호위도 없는 성의 외각이야. 이건 이 검을 지킬 마음이 없다는 소리야.”

걸윤은 다시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었다.

검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아니, 이건 검을 훔쳐 가라고 멍석을 깔아주는 것과 같았다.

지켜보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 일행과 귀하다는 그 검만 떨렁 놔둔 것이 그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변에 호위가 없긴 왜 없어? 이렇게 버글대는데!! 아! 시끄러! 난 이걸 지킬 거야.”

걸화가 짜증스럽게 걸윤에게서 고개를 돌려 검을 쳐다보았다.

연천은 홀린 것처럼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연천의 귀에는 위적훈의 목소리도 걸윤과 걸화의 다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그 검과 연천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벽에 걸린 검만 눈에 들어왔다.

연천은 저 검을 알았다.

각각 색이 다른 다섯 개의 보석이 박힌 검집.

보석의 색은 유난히 강렬했다.

투명한 광택의 자잘한 보석들이 박힌 검의 손잡이는 더욱 익숙했다.

연천의 눈이 젖어 들었다.

* * *

연천은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데려온 연천의 건강 상태는 심하게 좋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에 선 연천의 원기는 바닥이었고, 몸속에 기운은 하나도 없었다.

스승님은 연천에게 귀한 약재를 항시 달여 먹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천의 몸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그의 원기는 수시로 불안정했다.

연천은 그때를 기억한다.

그리도 즐거웠었지.

생김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화려한 전각들, 홀리는 향기를 풍겨대는 음식들이 가득한 별천지 같은 곳을 며칠이고 구경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사 먹고 객잔의 폭신한 침상에서 잠도 잤었다.

그리고… 저 검을 팔았지.

약재와 동글한 환단을 잔뜩 사 들고, 또 며칠이 걸려 그들의 집으로 돌아왔었다.

연천을 회복시켜준 그 약재들을…….

화려한 검 위에 스승님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눈가에 굵은 주름이 잡히며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그 얼굴.

연천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 거친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연천의 눈에서 소리 없이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님! …형님! 괜찮아요? 형님!”

걸화가 애타게 연천을 불렀다.

연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걸화가 걱정 어린 눈으로 연천을 보더니, 자신의 옷소매로 흘러내린 그의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이것이… 천마검이라고?”

연천이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물었다.

“네….”

걸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천마라는 분이……?”

연천이 짧은 몇 마디를 느릿하게 말했다.

걸화는 천마 뒤에 ‘분’이라고 붙이는 게 거슬렸지만, 모르는 척하고 말했다.

“혈영천마, 그… 극악… 그… 암튼 그… 혈영천마가 가지고 사라졌던 검이에요.”

걸화는 극악무도한 이라는 말을 삼켰다.

자신이 혈영천마를 욕할 때, 연천의 표정을 기억했기에.

“…….”

연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멍한 표정으로 검을 향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걸화가 연천을 의자에 앉혔다.

연천은 정신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천마검을 바라보았다.

걸화와 연천이 앉아있는 의자 옆으로 슬금슬금 걸어온 걸윤이 팔꿈치로 걸화의 어깨를 툭 쳤다.

가만히 연천을 지켜보던 걸화가 짜증스럽게 걸윤을 올려보았다.

“야! 왜 저러냐?”

걸윤이 연천을 턱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깐!”

걸화가 짜증을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천을 위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너나 오라비라고 불러!”

걸윤이 빈정댔다.

“조용히 해! 형님 들어!”

“암튼 왜 저래?”

옆에 선 걸윤이 연천을 내려 보며 물었다.

“나도 몰라.”

연천을 보는 걸화의 얼굴은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너 왜 이곳에 온 거야? 저 자랑, 이 검이랑 뭔 관계가 있는 거지?”

걸윤이 진지하게 물었다.

“넌 몰라도 돼.”

걸화가 새치름하게 답했다.

“야!”

걸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끄러! 형님 놀라”

정말 걸화의 안중에 오라비인 걸윤은 없었다.

오직 연천 걱정뿐이었다.

“야! 너는…….”

걸윤이 말을 멈추었다.

말을 해보았자 결론도 안 나오는 말씨름의 연속일 뿐이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걸윤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내가 저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

소리 지르고 성질내는 것보다 이렇게 살살 달래는 것이 걸화의 입을 여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단지, 그렇게 하려면 걸화에게 해대고 싶은 말을 참아야 했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때라고 걸윤의 머리 한편에서 말하고 있었다.

“…….”

걸화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걸윤을 올려다보았다.

걸화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연천은 믿어도, 함께 자란 오라비 걸윤은 못 믿었다.

어른스러운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얼굴만 마주하면 놀리고 괴롭혀 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그건 걸윤도 마찬가지였다.

걸화를 믿지 않았다.

“너 개방을 우습게 보지 마, 중원 최고의 정보통이야.”

막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누르며, 걸화를 살살 구슬렸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으흠…….”

걸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

걸윤은 걸화의 인내심이 그리 크지 못하니, 조만간 입을 열 것이라 생각하며 기다렸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걸화가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형님은 이번에 중원에 처음 나왔대. 세상 물정을 나보다 더 몰라. 숲에서 자랐다는데 완전 촌인가 봐. 그리고… 천마척결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었어. 스승님이 그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았어.”

걸화는 연천에 대해 아는 것을 걸윤에게 말했다.

말하고 보니 자신이 연천에 대해서 참으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이 혈영천마 손에 죽었나 보지, 스승을 죽인 검을 보고 놀란 건가?”

걸윤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혈영천마는 살인귀였으니, 그의 손에 죽은 자가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닌 것 같아.”

걸화가 그다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면 뭐?”

걸윤이 빈정대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어, 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고.”

걸화의 목소리는 영 자신이 없었다.

연천은 혈영천마를 옹호했었다.

걸화도 집히는 것이 있긴 했지만, 확실한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음… 천마척결은 십수 년 전 사건이야, 어릴 때 스승이 천마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계속 숨어 살았다면 말이 되지. 뭐 딴에는 복수를 하겠다고 무공 수련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저자의 무공이 딱 거기까지구먼…….”

스승이 삼재검법은 가르치고 천마에게 당했다면 말이 된다.

고지식한 백연천이 스승에게 배운 것만을 끊임없이 수련했다면,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저자 아니고 형님!”

걸화가 걸윤의 생각을 방해했다.

걸윤과 연천의 나이는 같았다.

걸화는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걸윤에게 형님이라 부르라고 했다.

자신이 보기에 연천이 훨씬 더 어른 같으니 그리 부르는 게 딱 맞을 것 같아서.

걸윤은 걸화 때문에 연천이 자신보다 나이가 더 있으려니 생각하기는 했지만, 절대 형님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쯧!”

걸윤이 혀를 찼다.

걸화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름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천마척결과 관련해서 뭘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걸윤이 빈정대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걸윤이 연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걸윤과 나름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걸화였다.

“음…….”

걸윤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혈영천마는 이미 십여 년 전에 죽었다.

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내가 지금껏 숨어 있다, 이제야 세상으로 나왔는데 복수할 상대가 없다고 한다면?

확실히 하려면 혈영천마의 천마검을 확인해야 했겠지.

천마검은 혈영천마가 신체 일부분처럼 들고 다니던 것이었으니, 그게 여기 있다는 것이 혈영천마가 정말 죽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깐.

‘그래서 영친왕의 성에 들어온 것이군… 스승을 죽인 검이라면 놀랄 만도 하지, 저리 놀라는 것을 보면 스승이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수도 있겠군. 평생을 잊지 못했을 게야… 안됐네…….’

걸화는 연천의 옆에 앉아, 넋 나간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걸윤이 연천을 잡고 있는 걸화의 손을 확 잡아 뺐다.

어린 누이가 외간 사내의 손을 덥석덥석 잡는데 오라비가 말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걸화는 자신을 방해하는 걸윤이 짜증스러웠다.

걸윤을 째려보고 다시 연천의 손을 잡으려 하자, 걸윤이 막았다.

“왜 그래!”

걸화가 짜증을 냈다.

“너는!”

‘여인이 돼서!’라는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걸화는 그 말을 굉장히 싫어했다.

태어나서부터 보아 온 총타의 거지들처럼 걸부처럼 걸윤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 했고 그들은… 모두 사내였다.

“이씨!”

걸화가 연천을 생각해서 성질을 누르고 있었다.

“야! 남녀가 유별해, 어디 사내의 손을!”

낮게 말하는 걸윤의 목소리에 불편함이 묻어 있었다.

연천에게 걸화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고, 걸화가 하는 양을 지켜봐 주었지만 이건 다른 문제였다.

“나 폭발할 것 같으니깐 그냥 좀 둬라.”

걸화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말을 끝낸 걸화가 걸윤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소리 지르고 악을 쓰는 것보다 저리 조용할 때가 더 무서운 걸화였다.

걸화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던 걸윤이 결국 항복했다.

“에잇.”

두 사람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 둘을 쏘아보았다.

0